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유병수 작

지금 내가 눈을 찌르는 LED 실내등을 꺼 두고 드러누운 이곳은 내 집이다. 이곳에는 안전장치가 허술해 위험이 상존한다. 미심쩍은 화재경보기는 있으나 스프링클러가 없는 식이다. 한날은 어느 방에선가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해 줄기차게 울어 댔다. 간혹 벌어지는 일인데 덜컥 겁이 났다. 이곳에서는 화마가 덮쳐 현관 출입구 쪽이 막히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생명과 직결된 재난 상황에선 훨씬 더 민감하고 실효적이다. 그날 나는 매캐하고 뜨거운 연기에 질식당하는 고통을 가늠해 보았다. 불길에 휩쓸려 기도가 타들어가며 울부짖는 공포는 상상을 뻗치다 그만두어 버렸다.

거주지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 중요한 사실을 잘못 전달했다. 175x150cm로 획일화된 주거 용적을 사람의 집이라고 씨부리다니. 셰퍼드나 그레이하운드가 자기 집이라 우기고 으르렁거린다면 모를까. 여기는 몸만 들이고 드러눕는 아주 작은 방일 뿐이다. 차츰 실내 공기가 희박해지는 중이라 생각을 집중하기 어렵다. 거듭 말이 엇나갔다. 행복고시원이 규격화해 세를 놓는 호실들은 방이라고 뻗대기도 뭣하다. 단지 며칠간 날림으로 뚝딱해 반듯한 사각 형태를 만든 베니어판 칸막이일 뿐이다. 잔뜩 귀를 기울이면 옆방 사내가 돌아눕느라 뒤척이는 기척까지 잡힌다. 아무래도 집이나 방이라고 지칭하려니 낯이 뜨겁고 좀스럽다. 주거용 칸막이라는 표현이 무난할 듯하다.

하여간에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주거용 공간에서 가살을 떨고 사노라면 마음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팬데믹으로 인해 사망자 집계가 부쩍 누적되던 올해 봄날들. 코로나19가 발목 꽉 잡고 난리를 쳐대는 그간엔 말 못하게 심각했다. 푸른 마스크를 쓴 영혼은 숨이 가쁘다고 삐쳐서 애써 자기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영혼이 그러는데 지분에서 밀리는 껍질인 나라고 별수 있겠나. 폐차에 잠입해 번개탄 피우고 의식을 치르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두려운 나머지 의식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찌그러진 폐차 문 밖으로 나와선 트롯 가수 홍자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날 밤에는 홍자 말고도 여러 생각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장차 백신이 나오면 숙주인 인간과 공생을 해야 할 코로나19 감염증. 근자에 와선 기대치가 폭삭 주저앉았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이끌 뉴 노멀이 언론에 한참 오르내렸다. 어쩌면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울어진 지구를 흔들어 바로 잡아줄 것 같았다. 하늘로 솟구쳐 새가 되려는 번개탄 이벤트는 경과를 지켜본 다음에 이행해도 되지 않을까. 번개탄 잘못 피우다간 지옥불로 떨어질 확률이 꽤나 되지 않을까. 아직은 나에게 인류를 위해 폐기물 처리장 등지에서 노동에 복무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잡다한 번민이 잇따르는데 지구한테 언제 밥 한 끼 같이 할 거냐고 치근대는 달빛은 얼마나 처량하던지. 으슥한 공터에서 번개탄 피우고, 쥐포 한 마리 구워 중국산 화주를 물처럼 퍼마시고, 픽 쓰러져 필름이 끊겼다. 이튿날 저녁에 깨어나 보니 어떻게 돌아간 건지 고시원 방이었다. 당시엔 코로나 블루가 내 피를 초록색으로 물들인다 한들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고시원 문 밖으로는 옴짝달싹 못해서 숫제 다른 행성 이주민이 된 것 같았다. 빽빽하게 칸막이 치느라 창들을 막아 버린 고시원 복도 통로는 삭막했다. 인터넷 동영상에 뜨는 화성이 주는 분위기와 실제로 엇비슷했다.



하지만 황금 송아지 신당을 모시는 행복고시원 사장은 시류를 잘 타서 대박이 터졌다. 활활 타오르는 촛불들이 광장을 메우고 출렁이는 격변기를 통해 무슨 계시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정권이 바뀌기 직전 진압군처럼 밀어붙여 고시원 여섯 곳을 일거에 인수한 혜안은 놀라웠다. 어둠이 주도할 미래를 점치는 주술 역시 엑스터시에 빠진 샤먼처럼 어찌나 신묘한지. 코로나19와 맞물린 이즈음 행복고시원에선 빈 호실이 그날 안에 바로 채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자칫 이 도시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군상들이 다 털어먹고 무시로 들락거려 칸막이가 부족할 지경이다. 팔십 평 못 미치는 공간에는 언제나 난민 부류의 마흔 여섯 명이 틀어박혀 시큼한 한숨 소리를 엮는다.

공용 화장실, 공용 샤워실, 공용 주방, 공용 세탁기..... 부대시설은 모조리 공용인데 화장실이 바쁜 시간대에는 순번을 기다리다 지리는 노인도 더러 나온다.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주범은 경찰견 풀어 수색하지 않아도 명백한 편이다. 소모적인 생활 시설을 미니어처처럼 축약하고 감축해 운영하는 공용 주거지. 거기에는 헌법 조문으로 침 발라 놓은 ‘모든 국민’과 ‘인간다움’이 낄 자리가 없다. 어디에 사시느냐, 한잔 걸치러 가시는 맛집이 있느냐. 바깥에 나가서 내가 가장 꺼리는 질문은 이처럼 단 몇 마디로 내 정체를 캐려는 것이다. 하지만 탄소 지대인 고시원을 벗어나 폐호흡이 수월한 천변으로 나가려면 그만한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복두꺼비처럼 생겨먹은 노인장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착 달라붙어 호구 조사에 나서기 때문이다. 무심코 폐호흡에 집중하다 그딴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금방 얼굴이 달아오른다. 탄소 함량이 호흡을 방해하고 오줌을 지리게 만드는 공용 주거지. 한잔 걸치지 않은 맨정신으로 그걸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행정적인 나이로 갓 노년에 접어든 나는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인조 대리석으로 외벽 두르고 깔끔 떠는 원룸 주민이면 그다지 민망한 때깔은 아니다. 개인 화장실에 딸린 샤워기와 싱크대가 구비된 원룸에 입주해 적당히 즐기는 삶은 내 일생의 꿈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만한 요령마저 부족해 갈팡질팡 떠돌며 치이는 몸뚱이가 거추장스러웠다. 여기는 떼가난에 찌든 빈민들이 무연히 한 세월 견디려고 집거한 보증금을 깔지 않는 20만 원짜리 월세방이다. 대부분 거주민들은 구청에서 지급하는 주거 급여로 월세를 충당하며 뿔뿔이 살길을 찾아 헤맨다. 내 집, 내 방, 아니 내 칸막이도 아닌 수급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으로 이 도시에 간당간당 빌붙어 지내는 것이다. 그러니 한 발이라도 삐끗하면 하늘 한 쪽이 스스럼없이 무너진다.



이곳에서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해가 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인종이 드물다. 옆방에

기거하는 318호실 사내가 살며시 문을 여닫는다. 최근 들어 거동을 대폭 줄여 하루 이동 거리가 좀벌레와 겨루는 사내의 목적지는 뻔하다. 이 며칠간은 먹는 것에도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꺼칠한 껍질을 벗어 버린 듯 무게가 실리지 않는 발소리가 들린다. 너무나 여려서 소리라기보다는 기척에 해당한다고 해야 하나. 어두운 복도 통로에서 끌리는 기척은 발이 수십 개 달려 조금 시끄럽게 구는 벌레가 기어가는 듯하다. 기척인지 소리인지, 들리는 것인지 감각에 와 닿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 미세한 발놀림이 두 개의 대변기와 하나의 소변기로 책정된 화장실 쪽으로 살금살금 움직인다.

이곳에선 유독 그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들 생명체가 내는 소리나 기척을 죽이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들이다. 툭툭 건드리면 움찔하고는 금방 몸을 말고 ‘나 죽었소’ 능청 부리는 콩벌레가 뭐 그리 대수인가. 미리 방광을 비우고 잔기침 참고 거르면 하루 이틀 나자빠져 죽치는 건 일도 아니다. 이곳에서 내 최고 기록은 나흘을 넘기고 반나절을 더한다. 그때는 탄수화물의 섭취를 갈망하는 욕구보다는 그것을 없애고 싶은 강박이 한층 강렬했다. 눈에 흙을 집어넣을 거라면 몰라도, 눈 빤히 뜨고 잘도 나불대면서, 왜 그리 사느냐고? 나도 같은 의문을 갖고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른다. 행복고시원은 문제 해결을 회피하는 자들의 묵음 처리에 관대한 보호 구역이다. 그래야 그나마 죽살이의 궤적을 흔들지 않고 꿈틀거릴 수 있다.

눅진한 칸막이에 처박혀 꼼지락꼼지락 궁상을 떨다가, 슬픔에 잠기면 더럭 119 전화번호 누르고, 폐가 숨 쉬는 일을 등한시해 염왕이 흰눈 흘긴다고, 제발 구급차에 실어서 응급실로 데려다 달라고, 애걸하는 318호실 사내가 돌아오는 기척이 잡힌다. 그러한 그는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침묵의 주거지에 부합하기 위해 사리고 지낸다. 매번 출동을 거부하는 119 전화기에 하소연 늘어놓을 때 말고는 음소거가 일상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그리 살면서 과연 한순간이나마 행복할 때가 있었을까. 어디든 오갈 데 없는 늘그막들이 막바지에 몰리면 수급자 딱지 붙이고 객쩍은 얼굴 들이밀며 기어드는 행복고시원. 여태껏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그 이름이 오늘따라 사뭇 별나게 들린다.

언제어디서나 가치를 부여받는 행복이라는 것. 행복이라니, 그것이 가치를 투사하는 스펙트럼의 본질은 무엇일까. 모든 빛줄기가 초점을 한 군데 맞추어 빚어내는 황금색인가. 여우비 지나간 언덕 위에서 굴절된 파장으로 눈을 홀리는 일곱 빛깔 환상인가. 지금 그 행복이라는 이름이 유별나게 들리는 연유는 이곳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잔망스러움 때문이리라. 이곳에 움츠린 늘그막들은 꽉 막힌 칸막이에서 비비다 끝내 귓것 될 처지 아닌가. 그런 판국에 버젓이 행복을 판매하려고 내건 간판이라니. 황금이 모든 가치를 압도해 진정한 불행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이 빌어먹을 세기에 말이다.

이곳은 늙은 수급자만 취급하는 전용 공간이라 인종을 다루는 기준도 별나다. 수급자 아닌데다 풋것들이 방을 구한답시고 얼쩡거리면 겉치레 인사말조차 듣기 어렵다. 행복고시원 살림을 맡아보는 총무는 대번에 시큰둥해져 빈방 없다고 내쫓아 버린다. 하니 이곳에 거주하는 군상들에게, 행복이라는 것, 그것은 이미 벗겨진 허물 같은 것이다. 괴사목처럼 비틀어진 육신에 수급자라는 행정적인 관리 대상인 이들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주눅 든 생애 어느 부위에서 배출하는 기구한 욕망의 상징인가. 차라리 행복과 불행이 화끈하게 배틀을 겨루어 정하든지. 아니면 불행을 전제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야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호실에서 가만히 가부좌 틀어도 어리비치는 잿빛 길 건너 저편에서 서성이는 불행들. 이곳을 장악한 적막 뒤에는 갖은 불행들이 그림자를 만들고 시시각각 일렁이며 어른거린다.

어쩌면 불행이란 각자의 폐허가 빚어낸 환각이거나 비명을 지르는 환청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을 장악한 불행들은 보다 실제적이다. 이곳의 불행들은 ‘게르니카’도 차용되지만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킨다. 거지반 누룩처럼 뜬 얼굴이 거뭇거뭇 물드는 정황이나 증거를 제시하며 명백한 실체로 전달된다. 방치되어 누렇게 부풀어 오른 무연고 시신을 바라보면 구역질이 난다. 보름 전에는 304호실 노인이 목소리로 얼굴도 없는 그놈에게 당했다. 노인은 부패한 시신으로 열흘 남짓 방에서 미적거리다 끽소리 못하고 끌려 나갔다. 길거리나 고시원 방에서 퍼드러진 적나라한 주검들은 썩어 가는 돈육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망자를 기리는 어떠한 곡소리나 비문도 새겨지지 않는다.

망자가 떠난 304호실은 강력 락스로 문상을 하고는 얼렁뚱땅 채워졌다. 며칠 전부터 재래시장에서 파는 식용버섯을 불로초라 우기는 노인이 들어와 개긴다. 그럭저럭 앞가림은 하는지 혈색이 좋고 식욕도 왕성한 노인이다. 하지만 여기는 바깥과는 확연히 물이 다른 칙칙한 빛깔에 절여진 세상이다. 누구든지 차츰 혈색이 빠지고 누렇게 침전되기 마련이다. 간신히 걸음이나 떼는 노모나 노부를 칸막이에 처넣고 내빼는 이도 드물게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이들은 절절한 사연이 아니더라도 무엇엔가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살려고 들어와도 여기에 처박히는 순간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인지. 아마도 우리는 고귀하다고 여길 만한 생명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행성에서 부대끼며 살아 보라고 신화적인 손이 빚어준 생명체임은 분명하다. 아무리 험악한 세상일지라도 지옥의 구덩이로 만들어 생명체가 살아갈 이유를 빼앗으면 안 된다.



엉겁결에 웬 놈한테 목이라도 졸린 듯 숨이 턱턱 막힌다. 증상으로 봐선 굳이 확인을 거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날마다 유일한 통풍구인 중앙 환풍기를 덜커덕 꺼버리고 내빼는 미친 종자는 313호실 햇늙은이다. 구청에서 주선한 자활근로 나가는 작자인데 왜 그러는지는 병원에 처넣어 봐야 안다. 아무튼 그가 아침에 흡족한 샴 고양이처럼 히죽히죽 환풍기를 죽이고 현관문까지 닫고 나가 버리면 미칠 노릇이다. 한 시간가량 후인 지금쯤에는 자체적으로 생성된 이산화탄소가 고시원 내부를 스멀스멀 채운다. 하지만 다른 문제에 앞서 촉박하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만큼 큰일은 아니다. 실내 공기에 이산화탄소 함량이 어지간히 높다고 해서 숨통을 끊어 놓진 못한다. 단지 머리카락이 야금야금 빠지고 숨이 막히는 단계일 뿐이다. 당장 생존할 지형이 지구 온난화로 위기에 처한 남극의 펭귄처럼 살벌한 내게는 이쯤은 별것도 아니다.

자기 몫이 거덜 난 세상에 빌붙어 목숨을 간수하려는 욕망은 소중한 것이다. 유일한 희망인 그마저 삭제해 버리면 이 도시에는 주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갈 것이다. 나는 내 방을 반나마 차지한 매트리스에 밀착하여 꿈틀거린다. 하루를 건너는 시간들은 아주 지겹고 더디게 흘러간다. 그 시간들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면 텅 빈 공간이 정체돼 머문다. 무료한 시간들에 낚이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소일거리를 챙겨야 한다. 한때는 눈만 뜨면 인터넷 창에 댓글을 쳤는데 해가 지도록 푹 빠져 버렸다. 그랬더니 뱀처럼 혀를 놀리는 이상한 놈이 플랫폼 안에서 반지랍게 쏘다니고 있었다. 사악한 혀들이 뇌관을 건드리는 모든 쟁점에 목숨 걸고 관여하려는 덜떨어진 놈이었다.

막판에는 댓글 싸움으로 치고받다 열 받은 상대방 유저에게 신상을 탈탈 털렸다. 서울역 노숙자 부류라는 실체마저 노출돼 고상한 입질은 뻥긋하지도 못했다. “진짜 길거리 개 같은 인생들이네.” 한번은 신나게 물어 뜯겨 욕설을 치려다 얼굴이 화끈거려 잽싸게 털고 나왔다. 당시 댓글 싸움은 파생 상품으로 서민들 피 말리는 금융권을 내가 마귀새끼처럼 질기게 비난한 탓이다. 억대 연봉에 환장해 미친 돈 지랄하는 야바위도 그들이 뺑뺑이판 돌리면 ‘자유 경제’라는 사실을 몰랐다. 미처 몰라 뵈어서 죄송하다. 요즘은 외부로 튀려는 생각들을 전두엽에 봉인해 두고 지낸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든 어차피 미궁 같은 현실을 내리족치고 패대기치는 형태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현실이라는 실타래가 머릿속을 헤집고 헝클어져 돌아다니면 뭐랄까. 이때부터는 갑자기 눈에 백태가 부옇게 끼고 헐떡이며 끝장으로 치닫는다. 그러면 나는 마침내 노화의 막바지에 이른 것처럼 하늘 한 귀퉁이 붙잡는 심정으로 맥을 놓아 버린다.

갈수록 맥박이 희미해지는 노화 작용은 생성 동력에서 벗어나 소멸로 이끄는 비루함을 속속들이 전달해 준다. 하루 종일 매트리스에서 뒹굴다 흐름을 잘못 타면 구렁텅이로 처박히기 십상이다. 흐름의 끝에선 급박한 노화 수치가 심전도 모니터처럼 지지직거리며 머릿속을 틀어쥔다. 나날이 얼마만큼 뇌세포가 절멸하는지, 끝장으로 치닫는 경로가 치매 노인 요양원인지, 까마귀들 집단 서식처인 서울역 광장 어디인지..... 이딴 번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혈관과 연결돼 적색 버튼을 누른다. 때로는 의식의 흐름이 빨간불을 깜빡이며 급선회한다. 지금은 고시원 내부가 수 천km 깊이로 가라앉은 해저처럼 적요하다. 입소자들이 죄다 해저 암연 어디엔가 홀연히 매몰돼 버린 것 같다.



어느 순간엔가, 휴면 상태로 능글맞게 뭉개던 정적이 균열을 일으킨다. 작동 모드 전원을 켠 각 호실이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대부분 귀찮거나 고시원 사무실에 눈치가 보여 아침을 거르는 사람들이다. 간장에 절인 개구리 반찬이라도 있으면 점심 끼니는 먹어 두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불현듯 등장한 개구리 반찬에 미각을 내주고 멍청하게 눈을 끔벅인다. 징그러운 양서류 뒷다리를 찢어서 질겅질겅 씹는 기분이다. 그 틈새로 뭐든지 먹으려고 방 문 여닫는 소리가 비죽비죽 발을 내민다. 307호실 노인장은 폐플라스틱 신대륙이 조만간 탄생할 행성에서 출렁이는 대양들을 순회한 항해사 출신이다. 그는 잘 묻혀 지내다가도 공용시설로 행차할 때에는 괜히 문을 쾅쾅 닫으며 성깔을 부린다. 자기는 건재하고 몹시 화가 나 있으니 건들지 말라는 몸짓이다.

맨발로 걸으면 진득진득 달라붙는 복도 통로를 가르며 하루 중에 가장 분주한 소리들이 넘나든다. 공용 주방에서 번지는 버섯찌개 냄새가 달큼하게 복도 통로를 휘젓는다. 혈색 좋은 304호실 노인이 끓이는 버섯찌개 냄새다. 나는 불로초라는 신앙이 담긴 종교적인 음식 냄새에 코를 벌름거린다. 고시원 신김치, 대파, 양파, 무 숭숭 썰어 넣고 고추장 풀어 개구리 찜을 조리면 무슨 맛일까? 나는 부지중에 개구리 반찬 생각을 이어간다. 끈끈한 양서류 비린내를 삼킨 속이 뒤집어져 울렁거린다. 점심 끼니로 볶음라면을 해 먹을 작정이었으나 입맛이 싹 가신다.

개구리 반찬이라는 징그러운 식감을 유포한 328호실 사내는 여전히 한밤중이다. 술김에 밤새워 주절주절 지껄이던 그는 새벽녘에야 나가떨어져 잠들었다. 한물간 늙은 여우처럼 여윈 그는 이슥한 밤이 들이치면 제 방에서 번번이 구슬픈 노랫말을 낮게 읊는다. 여우야 여우야 뭣하니/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죽었니 살았니..... 볼살이 움푹 팬 용모와는 달리 때로는 깜찍한 어린아이 목소리로 여우놀이 유희요를 부른다. 고아들을 돌보는 수용 시설에 몰래 두고 온 제 아이가 즐겨 부른 노래라나. 그게 벌써 20여 년 전인 IMF 외환위기 언저리 일이라는데 무슨 영문일까. 밤마다 여우가 무슨 반찬을 먹는지 궁금해하는 그는 방금 아이를 떨치고 온 것처럼 울먹인다. 328호실은 협소한 복도 통로를 끼고 바로 앞에서 내 방을 건너다본다. 어중간한 오후나 되어야 그는 깨어나 해장라면을 끊이느라 공용 주방에 나타날 것이다.



행복고시원은 어딜 가나 난립하는 고층 아파트 단지 뒷길거리 초입에 파묻혀 지낸다. ‘미모사 크리닝 센터’와 ‘기도원, 하늘교회’와 함께 든 5층까지 올라간 상가 건물 2층 전체를 사용한다. 4층과 5층은 잡스런 방판 업체 티가 나는데 길을 찾아 헤매는 기색에 찌든 노인들도 빈번히 층계를 오르내린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3층 교회에선 평일에도 간간이 앰프 소리가 울린다. 이 도시가 멈춰 버린 셧다운 기간에도 기도는 이어졌으나 가늘게 흐느끼는 울음에 가까웠다. 그 깊고 긴 터널을 벗어난 근자에는 코로나19로 영성을 상실한 앰프 소리가 요란스럽다. 그때마다 나는 귀를 틀어막는 대신에 사도신경을 외운다. 아무도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 코로나19 시대 교회들은 추락하는 불새의 운명을 지녔다. 그들은 이제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에 흐르는 피를 지워야 할 것이다.

미션 스쿨에서 점수를 딸 요량으로, GOP 중대에서 군종병으로 편히 지내려고, 성경 구절을 외우던 아이와 군인이 되살아난다. 나는 무심히 지나치는 시선으로 그 두 얼굴을 힐끗거린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스치는 행인을 대하듯 시무룩이 외면한다. 오래된 기억에서 떠밀려 나온 아이와 군인은 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내게는 서로 먼발치에서 바라본 얼굴들처럼 낯설다. 이미 나와는 멀어진 아이와 군인은, 내가 아니다. 무상함 때문이리라. 지나간 세월들을 다그치며 횡행하던 초상들이 흐릿하게 지워져 간다. 미래로 가는 길이 끊어지면 과거에서 돌아 나오는 길 역시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곁눈 내리깐 까마귀가 서울역 주변부를 드나들며 새겨 놓은 동선만은 색다르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수시로 침투해 핏줄처럼 선명한 채색선을 긋는다. 날마다 해거름이면 까마귀들을 삼키고 아침에 뱉어 내는 일시 보호소, 무료 급식소, 무료 진료소..... 무참하게 날개가 꺾여 길모퉁이에 나앉은 까마귀 시절을 나는 왜 잊지 못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어떻게 그토록 한 번이나마 날아오르려고 버둥거렸을까. “이봐, 이게 바로 너야. 비틀린 껍질 말고 이제 뭐가 남았겠어? 다 끝났어. 받아들여야 돼.” 까마귀에게 떳떳하지 못한 내가 변명하듯 나지막이 지껄인다. 웅성거리는 길거리에 내쳐져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으려고 독하게 머물던 까마귀. 아주 작은 방을 소망으로 간직한 얼굴 파묻고 광장에서 잠이 들던 까마귀가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다.



공용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전기렌지가 구비된 주방은 여느 고시원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발 디딜 용적이 비좁아 두 사람이 들어가 어깨를 비비면 꽉 들어차 버린다. 327호실 노인이 마른 밥알과 반찬찌꺼기가 눌어붙은 식기를 닦느라 개수대 앞에서 달그락거린다. 뚝배기 된장찌개를 달이고 달이는 사내는 신규 입소자인지 처음 보는 낯이다. 고시원 생활에 익숙한 내부자들은 욕망을 죽이고 가릴 건 가린다. 된장찌개 진하게 달이거나 프라이팬에 드러누워 뒤척이며 냄새피우는 간고등어를 굽지 않는다. 고시원 복도를 구석구석 휘감으며 방마다 깊숙이 스며드는 냄새들은 언제 맡아도 징글맞다. 환기창이 없는 방 안에 진득이 고이는 냄새라 질색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327호실 노인장은 행복고시원 입소자들 중 연장자에 속한다. 스무 해가 넘도록 고시원을 전전한 고전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초창기 무렵에는 ‘고시원 밥 먹는다’ 떠벌리면 접대가 죽여줬다고. 장차 디케의 전당에서 ‘엄숙한 나무망치 두드릴 위인으로 알아서 모셨다’는 전설도 전해 준다. 구미호를 등장시켜 정신 사납게 굴어도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노인은 고시원 아닌 고시촌 ‘디케들’과는 연대를 의미하는 손 한번 잡아 보지 않았다. 애당초 발을 들일 때부터 고시원은 망가진 자기 전부를 쑤셔 넣은 집이었다. 공사판에서 허리를 와지끈 부러트려 수급자로 전락해 들어갔다니. 노쇠화 아니고는 육체노동자를 몰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전형적인 수순이다. 근간에도 허리가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아 울먹이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노인은 발열복대 한 쪽을 변기에 빠트리고 난감해서 울상 짓고 있었다.

거듬거듬 식기를 세척한 노인이 엉덩이에 손을 닦으며 돌아선다. 마음대로 굽히거나 방향을 틀기 어려운 피폐하고 엉거주춤한 동작이다. 아득히 치솟은 비계 파이프 위에서 발바닥 감촉만으로 휘청휘청 걸어 다니는 노인이 눈앞에 선연하다. 노인이 추락한 시대는 목숨값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고층 아파트 공화국 진입기였다. 안전벨트 차림으로 나서면 간밤에 꿈자리 사납더냐고 놀려먹기 일쑤였다. 예전부터 코로나19 시대 전까지, 나는 화급할 때마다 공사판 잡부로 된밥을 벌어먹었다. ‘이판사판 공사판’이라 석면 가루 마시고 대포 한잔으로 속 달래던 고대 풍속에도 훤하다. 요즘은 철거 공사 현장에서 석면 가루를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푸념이나 할 처지가 아니다. 조선족을 비롯한 이주민 노동자들이 공사판에 대거 침투해 밑바닥들 전쟁터나 다름없다.

“어어, 언제 왔어? 아까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쭈글쭈글한 주름으로 목덜미를 덮은 노인이 빙긋 웃는다. “안녕하세요, 형님.” 나는 노인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넨다. “잠깐만 기다려. 밥 퍼서 얼른 나갈 테니까.” 노인이 고시원 전기밥통 뚜껑 열고 주걱으로 휘저으며 괜스레 미안해한다. 한때는 용 꽤나 쓰던 비계공 출신인 노인은 비쩍 마른 몸을 가누기도 힘겨워 보인다. 노인을 지탱하는 몸에는 군데군데 철심이 박혀 뼈마디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발바닥 종골과 왼쪽 늑골과 오른쪽 어깨에 두루 철심을 박고 있다. 비계 파이프를 헛디뎌 지상으로 낙하하면서 노인은 무엇을 보았을까. 죽음이라는,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무엇이 가슴에 새겨질까. 아찔하게 추락하면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공포의 형상. 그렇다면 이곳에 널브러져 맞닥뜨리는 그 순간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죽음이 단지 공포에 불과하다면 허망할 따름이다.



노인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고 하루의 첫 끼니인 라면 요리에 집중한다. 음식 국물이 말라붙은 가스레인지에서 라면을 꼬들꼬들 설익혀 방으로 들고 돌아온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한 입 뜨려다 나흘째 끼니를 거르는 옆방 사내를 의식한다. 반찬이 궁하면 고시원 흰밥을 간장에 비벼서 먹으면 될 텐데..... 마침내 식욕을 거부할 만큼 병이 깊어져 영혼의 체제로 전환하려는 것일까. 한세상 꺼떡거리다 노랗거나 회색 가루로 강산에 뿌려질 이 한 몸은 무엇일까. 짭짤하게 간 들인 라면 국물을 퍼먹으며 나는 좀체 옆방 사내를 지우지 못한다. 동시대에 태어나 우연히 이 시기, 이 도시, 그리고 행복고시원 내 옆방에 거처를 마련한 사내. 신부전증이 악화돼 신음하는 그는, 이 도시에서 병들어 버림을 받은 그는, 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것일까. 무름한 시선이 이미 이 도시를 벗어나 아련한 하늘빛 너머 피안에 닿아 있는 것일까.

주방에서 공용으로 비치된 양은 냄비를 씻어 두고 다시 방 안에 틀어박힌다. 행복고시원

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균류처럼 순순히 매트리스에 드러눕는다. 후줄근한 매트리스에서는 지속해서 번식 중인 곰팡이 냄새가 난다. ‘기생은 자연계의 가장 흔한 생존전략’이라는 뜨끔한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이곳에 처음 와서 세탁을 하려고 점무늬 하늘색 커버를 벗겨 보고는 한동안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매트리스 알몸에는 멍자국처럼 얼룩들이 묻어나 있었다. 퀴퀴한 체취를 삭히며 크고 작은 도형을 그려 낸 반점들은 각종 국거리, 찌개류, 믹스커피를 엎지른 흔적 같았다. 행복고시원 매트리스에 남겨진 검은 자국들은 졸렬한 기생의 흔적일까. 나는 벌건 취기로 인해 대낮에 막걸리 사발을 엎지른 적이 있다. 좁은 방을 대부분 차지하는 매트리스에 낮술 끼얹고, 미래로 나아가 단순히 움직일 옹졸한 재화조차 갖지 못한 나에게 묻고 싶다. 네가 이 도시에 기생하는 균류가 아니면 무엇이냐고. 매트리스에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에 대해선 궁금할 게 별로 없다. 나와는 동류인 심상하고 그늘진 낯빛 또한 짐작된다. 하지만 건물 일층 우편함에 그들 이름으로 쌓이는 각종 연체금 고지서를 볼 때는 서글퍼진다. 행불자인 그들이 막장인 여기를 떠나서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그들은 얼굴을 숨기고 어딘가 은밀하게 수용돼 있으므로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 도시가 걸러 내려는 유령들인가.

불빛을 제거한 방 안은 탁한 연못에 깔린 진창처럼 적요하다. 내 것이 분명한 가늘게 늘어지는 맥박이 짚인다. 나는 어둠에 잠식된 그림자만큼이나 희미해져 간다. 304호실

노인이 풍기던 고약한 시신 냄새가 코끝을 짓뭉갠다. 수급자 노인들 주거지인 이곳에선 망령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언젠가는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는 두려움은 기괴한 환각에 시달리도록 내버려 둔다. 고시원 방이 아닌 안전한 병실에서 영면에 들고 싶다는 욕망을, 나는 버리지 못한다. 고적한 밤이 지나고 아침마다 누군가 차분히 내 맥박을 짚어 보는 곳이면 안심이 된다. 그리고 지금, 지독한 화공 약품 냄새가 들이치고, 위기를 감지한 맥박이 마구 요동친다.

이처럼 ‘미모사 크리닝 센터’는 빈번히 신호를 보낸다. 업소용 초대형 세탁기들이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고, 화학 세척제가 유독한 가스 냄새를 뿜어 올리면, 기어코 내가 질식하리라는 공포심에 코를 틀어막는다. 실상은 환각일진대 공포심을 느끼고 일그러진 나는 끈질긴 고통에 압도당한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진 상태로 매트리스에 널브러져 가쁘게 숨을 내모는 몰골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이때 마침 3층 하늘교회 찬송이 울려 퍼지면 색다른 감회에 사무칠까. 영혼이 외치는 부르짖음 듣고 따라 부르려고 입술을 비틀게 될까. 그리고 비로소 뼈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성령이 임하심을 믿는다고, 참연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인가. 회개의 심정을 갈무리한 나는 주기도문을 외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거룩히.....

이래저래 잔망스런 걱정에 휘말려 있으니 전신이 노곤하게 까라진다. 아무래도 혼탁한 실내 공기가 끼치는 영향인 듯하다. 오래 전에 식품 회사 냉동 창고 용도를 집적하여 건축된 두터운 콘크리트 구조물로 사방이 틀어막힌 옹색한 실내 공간 아닌가. 그러니 마흔 여섯 명이 폐에서 펌프질하여 이산화탄소를 뿜어 올리면 산소 부족으로 허덕이는 폐쇄 환경과 뭣이 다르겠나. 날마다 끼니나 때우고 매트리스에 붙어서 지내려니 숨이 막힌다. 하물며 나는 요즘 들어 판판이 이 상황을 인식하지 않는가. 코로나19 변종 바이러스에 습격당해 고통스럽게 항체 형성을 기다리는 음압병실 수용 환자처럼. 어떠한 변화도 모색하기 난감해 매 순간이 진저리난다.

건성으로 유선 채널을 휙휙 돌리다 멈칫한다. 뼈마디를 앙상하게 드러낸 북극곰이 줌 렌즈로 당겨져 화면에 잡힌다. 언제부턴가 자연 다큐멘터리 영상들은 갈수록 종말적인 기후 변화가 유인하는 심층에 초점을 맞춘다. 어디론가 떠나는 북극곰이 불안감에 시달리는 침울한 눈동자를 두리번거린다. 위기에 빠진 자연 생태계에서 당장 발을 딛고 나아갈 다른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끝은 어디일까. 영상 속에서 무작정 길을 떠난 북극곰이 어느 지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강풍에 휘청이며 쓰러진다. 매트리스 밑으로 던져둔 리모컨을 집어 들고 유선 채널 종료 버튼을 누른다. 극한으로 몰아치는 생태계에 유폐된 북극곰이 잔인한 잔영으로 남는다. 잠이 오려는지 눈꺼풀이 처지고 가물거린다. 허리를 몇 번 뒤척여 잠이 들기 편한 자세로 고쳐 잡는다.



깊은 바다 밑 지형이 아니면 미명을 띤 극지방 같기도 하다. 낯선 곳임에도 기시감을 주는 지형이 익숙하다. 비밀스런 협곡 같은 통로가 희미하게 시야를 터놓는다. 진창길이 여러 갈래를 벌리고 뻗어 나간다. 누군가 살금살금 이동하는 발소리가 끌린다. 비로소

이곳이 적막한 고시원 복도 통로임을 알아챈다. 317호실에서 잠든 육체와 분리된 나는 신기해서 주변을 면밀히 살핀다. 어둠에 잠긴 복도 통로를 헤집고 누군가 317호실 내 방으로 접근한다. 샴 고양이처럼 살풋살풋 발을 놀리며 나타난 소시오패스 얼굴에 싸늘하게 번지는 미소. 아침마다 행복고시원 숨통을 틀어막는 313호실 햇늙은이 손에는 휴대용 분무기가 쥐어져 있다. 허리를 구부린 그가 내 방 틈으로 독가스를 쉭쉭 뿌린다. 다량의 독가스를 흡입한 내가 매트리스에 엎드려 버르적거린다.

연이어 독가스를 마신 사건 이후 장면이 음산하게 펼쳐진다. 나는 강렬한 불빛 아래 비치된 병실 침상에 손발을 묶인 채 끈덕진 생명을 유지한다. 유동식을 주입하는 비위관으로 콧구멍을 틀어막혀 입을 벌리고 헐떡인다. 허탈하게 기력이 소진된 가운데 죽살이의 경계를 감지할 만한 의식은 남아 있다. 주변 병상에서는 비슷한 몰골로 결박된 환자들이 미약한 숨결을 내쉰다. 흰색 가운을 걸친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 뚜벅뚜벅 침상에 다가붙는다. 간호사가 손가락 두 개를 내 입 안에 쑤셔 넣고 오른쪽 어금니를 거칠게 비튼다. 나는 무력한 나머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수분이 고갈돼 말라가는 식물 줄기처럼 사지를 늘어뜨린다. 무표정한 간호사가 18K 금으로 된 오른쪽 어금니를 흔들어 쑥 빼내 간다. 허물어진 잇몸에서 비릿한 피가 흘러나와 고인다.

다소 억울한 심정으로 너절하게 늘어져 이어질 순서를 기다린다. 예전에 연명치료 거부와 장기 기증을 서약한 나는 이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금이빨을 빼앗긴 사실만이 착잡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질긴 음식을 씹기 위해 노숙을 할 때도 망설이며 팔아먹지 않은 것이다. 초록색 수술 가운 차림의 외과 의사가 식물인간을 탐지하는 시선으로 빤히 내려다본다. 움직임을 만들지 못하는 내 몸에는 마취용 주사 바늘이 꽂힌다. 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생명 현상을 질질 끈다는 의학적 진단이 내려진 모양이다. 내게서 금이빨을 훔쳐간 간호사가 멍하니 허공으로 향한 내 눈을 들춰 본다. 명줄이 붙어 있지만 나는 차츰 흐려지는 의식을 놓아 버린다. 이제는 내가 나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해체되는 순간만이 남아 있다.



악몽에서 깨어나 매트리스에 엎드리고 이맛살을 찡그린다. 혼미하게 잠결을 메우던 악몽이 되새겨진다. 비위관, 소변 카테터, 링거 줄 들을 어지럽게 감은 내가 희부연 혼백처럼 눈앞에 어리쳐 어룽진다. ‘이게 뭐지? 정말 지독한 악몽이야.’ 나는 중얼거린다. 하지만 단순한 악몽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하물며 이곳에선 악몽의 실체가 다가들면 안전하게 대처할 방법이 없다. 지친 혈관이 천천히 맥동을 줄이고, 의식과 단절된 숨결이 낱낱이 흩어지고, 육신이 질척한 늪으로 침잠하는 과정을 지나치면, 나는 다른 존재로 형성될 것인가. 이 또한 망상과 환각이 주는 악몽인가. 행복고시원 매트리스 위에서, 토막토막 끊어지는 숨결을 움켜쥐려는 듯, 내가 버르적거린다.

신부전증으로 힘겹게 버티는 318호실 사내는 기척을 내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로는 내내 잠잠하다.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라는 칩을 내장하고 인식하도록 태어난 동물이다. 하지만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는 불로초를 찾아 헤매거나 칩의 존재를 섣불리 흘려버린다. 의료비용 문제로 투석 치료를 중단한 그는 다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예정된 시한이 아직 먼 굽이에서 주춤거리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내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이 방에서 끌려 나가게 될 시점은 언제쯤일까. 가진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에 굴복하여 이곳으로 숨어든 나는 이제 무엇을 간추려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이 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콩벌레처럼 움츠린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한사코 이 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내가 두렵다.



종일 LED 실내등을 켜지 않은 방 안이 우묵하게 처진다. 수개월 전부터 나는 이곳에 틀어박혀 빛을 익숙하게 대하지 않는다. 매일 어둠 속에서 TV를 시청하고, 알뜰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매트리스에 웅크리고 잠을 잔다. 너무한다 싶은 자책이 들어 좁은 방에서 LED 조명을 받고 있으면 강렬한 탐조등 앞에 선 것처럼 주눅이 든다. 나는 나를 해부하는 날카로운 광선을 거부한다. 그리고 고시원 복도는 침침한 조명으로 인해 조잡한 인공 태양이 빛을 흘리는 듯하다. 우울감을 더하는 인공의 빛이고, 지금은 내 모든 것이 흐릿하고 어둡다. 가끔 천변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햇빛 쬐던 터에 최근에는 그마저 중단해 버렸다.

다른 쪽 살피지 않고 막연히 이곳에 주저앉아 버티는 내가 가증스럽다. 이곳은 위축된 나를 은닉하고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이곳조차 나와의 연관성이 부정되고 기필코 내게 다가올 끝이 얼핏 비치면..... 지금은 유난히 스산하고 외지고 추위를 타는 그늘에 버려진 듯하다. 나는 구부리고 누운 상태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팔을 쭉 뻗는다. 매트리스에서 먼 쪽으로 떨어진 벽을 가만히 두드려 본다. 누렇게 변색한 미색 벽지를 두른 베니어판이 내는 울림이 공허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되돌려 보내는 신호가 오지 않는다. “내가 정말 위급하면 벽을 연달아 치겠어요. 그때는 119를 불러 주세요.” 일전에 옆방 사내가 참치 캔을 건네며 당부한 말이 깊숙한 울림으로 다시 들린다.

하루 동안 누적된 적막감이 은연중에 덩치를 부풀린다. 나는 지저분한 매트리스와 일체감을 이루어 간다. 짓눌린 무게만큼 휘어진 매트리스에 몸을 더욱 밀착시킨다. ‘마치 진공의 시간들에 에워싸인 느낌이야. 여긴 기어코 이렇게 되고 마는 건가.’ 이번엔 허공을 허우적거리듯 중얼거린다. 침울하고 격리된 공간을 틔우고 나오는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고 싶다. 먼 길을 걸어와 이곳에서 지쳐 가는 외로움 따위는 아니다. 지구의 반대편처럼 밤낮을 바꾼 328호실이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길게 들이마신 숨을 차분하게 고르며 내쉰다. 연이어 적적한 327호실 노인 방에서 숨통 끊기는 소리가 뚝 들린다. 차디찬 침묵을 흩트리고 여우놀이 유희요가 복도를 휘적휘적 건너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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