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 호수와 얕은 산등성이에 느긋한 즐거움 만끽

푸른 소나무숲과 갈색 전나무숲이 호수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지난 주말, 집안행사가 있어 강원도 횡성을 다녀왔다. 우리 지역에서 가기에는 너무 멀고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간 김에 평소 생각해 두었던 ‘횡성호수길’을 찾아 나섰다.

횡성호 일대를 도는 6개 구간이 조성되어 있고 특히 가을풍경이 아름답다고 지인이 알려준 게 있어 꼭 한번 들러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실행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지금 강원도는 가을이 지고 있는 시기라 아쉬웠지만 긴 여운을 남길 만큼 가을색이 조금은 남아 있어 그나마 늦은 가을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횡성호수길을 안내하는 입간판.

‘횡성호수길’을 걷고자 가족들과 함께 횡성읍에서 20여 분 거리의 횡성호수 ‘망향의 동산’ 주차장에 닿았다. 오전이라 조용하다. 평소 주말에는 많은 탐방객이 붐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망향의 동산’에는 횡성댐 조성으로 수몰된 지역 주민들을 위로하고 옛 삶의 터전을 회상하는 기념관과 기념탑이 있고 매년 망향제를 올리는 곳이다.

횡성호수길 6개 구간은 제1구간 ‘횡성댐길’ 3㎞(1시간), 제2구간 ‘능선길’ 4㎞(2시간), 3구간 ‘치유길’ 1.5㎞(1시간), 4구간 ‘사색길’ 7.0㎞(2.5시간), 제5구간 ‘가족길’ 9㎞(2.5시간), 제6구간 ‘회상길’ 7.0㎞(2.5시간) 등 총 31.5㎞ 11시간30분의 힐링로드로 구성되어 알맞게 선택하여 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비되어 있다. 그중 횡성호 한가운데 섬처럼 빠져나온 곳에 조성된 제5구간 ‘가족길’ 코스가 최고의 뷰(View)를 자랑하고 편안히 걸을 수 있는 코스로 망향의 동산에서 출발하여 회귀하는 9km 구간으로 횡성호수길 6개 구간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길이라 하여 ‘가족길’을 한 바퀴 돌아보고자 출발한다.

들머리 입구 게이트에 만들어진 ‘코뚜레’(소의 코를 뚫어 끼는 나무고리) 조형물이 ‘한우의 고장’ 횡성을 찾아온 탐방객을 환영한다. 초입 길가 울타리에 횡성호수의 아름다운 장면을 촬영한 사진들로 노천 갤러리를 만들어 탐방객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속의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낭만적이라 사진만 보아도 횡성호수의 속살을 보는듯하여 기분이 상쾌하다.

붉게 물든 단풍이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몇 남지 않은 붉은 이파리을 파르르 떨고 있다. 호숫가로 난 널찍한 산책로 곁에 짙은 다크브라운(dark brown) 옷을 입은 키 큰 낙엽송이 푸른 호수와 어우러져 사진 속 풍경을 옮겨다 놓는다.

매표소라는 조그마한 건물에서 표를 판다. 호수길 탐방에 돈을 받고 입장시킨다는 게 의아했지만 금방 고개가 끄덕여진다. 횡성호가 위치한 갑천면에서 지역경제를 위해 고안해 낸 방안으로 성인 2,000원의 입장료를 내면 횡성사랑상품권으로 바꾸어주면서 지역 내 가게에서 쓸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커피 한잔에 2,000원이니 이곳에서 소비해달라는 애교(?)썩인 호소라 마다할 수가 없다.

호숫가의 볼거리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재미나다.

너른 호수를 끼고 걸어가는 곳마다 재미나는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 탐방객들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남녀의 키스 장면 형상이나 깨진 독에 담겨 있는 꽃나무들이 그 새 시들어 버렸지만 잔잔한 호수만큼이나 평화롭다.

호수 건너 높은 봉우리인 어답산(786m)이 호수 아래로 내려와 물속에 잠기고 갈색 물감이 덧칠하고 있다. 평탄한 산책로를 걷다 보면 물속으로 나 있는 포장도로를 볼 수 있다. 수몰되기 전 있던 도로를 그대로 놓아두고 반쯤 물에 잠겨있게 하여 수몰의 아련함을 회상하게 한다. 그 길 위에 가족이 장터로 가는 형상의 조형물 ‘장터 가는 사람들’을 세워 더욱 애틋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추억의 신작로’ 마냥 향수를 자극한다.

호수를 따라 굴곡진 길을 걸으며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고 비단결 같은 물결위로 점점이 채색되는 산 그림자를 무심히 들여다본다. 미동도 않는 그림자 속에 가끔씩 붉은빛이 찰랑이고 마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텅 빈 나무벤치가 호수를 바라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듯 조용히 자리하고 건너편 낮은 봉우리에 가을볕이 환히 내려앉는 한 폭의 수채화가 길손을 더욱 낭만주의자로 만들어낸다. 조용한 호수가 심심하지 않게 자작나무로 만든 사람모양과 동물 형태의 우스꽝스런 캐릭터에 미소를 지으며 유유자적 휘적거리며 걷노라면 번잡한 마음이 어느새 사라진다.

호수를 곁에 두고 바라보는 장면마다 고요하고 평온한 감정이 저절로 울어 나오는 풍광이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다정한 자작나무 연인들이 맞아주는 호수 전망대에 한 쌍의 커플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호수길 초입에 횡성호수 사진을 전시하는 노천 갤러리가 눈길을 끈다.

횡성호는 갑천면의 5개리인 중금리, 부동리, 화전리, 구방리, 포동리 등이 수몰되어 만들어진 호수로 2001년 완공하여 횡성, 원주 시민들의 식수와 농업용수, 공업용수 등으로 활용되며 주변에 조성된 트레킹 코스 등이 힐링 명소로 각광 받는 휴양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특히 사계절을 통틀어 각각의 절경을 볼 수 있고 이른 아침 호수에서 피어나는 물안개와 일출 광경이 일품으로 알려져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물속으로 잠기는 도로 위에 설치한 장터 가는 사람들이라는 조형물이 이색적이다.

오랜 옛날 삼한시대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泰岐王)이 신라 박혁거세에게 쫓기어 횡성 태기산으로 들어와 태기왕국 건설을 꾀하다 신라군에 패하여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태기왕의 군사들이 쫓기어 이곳 개천에서 피 묻은 갑옷을 씻었다 하여 ‘갑천면(甲川面)’이란 이름이 지어졌다는 유래로 태기왕국의 꿈이 횡성호에 잠겨 있음을 군데군데에서 설명하고 있다.

제5구간 ‘가족길’은 A코스와 B코스로 구분되어 있지만 회귀점이 같아 헷갈릴 일은 없다. A코스와 B코스 만나는 지점에 쉼터가 있고 화장실도 있어 쉬어 가기 좋은 곳이다. B코스는 ‘오색꿈길’이라 하여 ‘태기왕’, ‘실향민’, ‘자연’, ‘아이들’, ‘주민’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꿈길을 이어 놓았다. 반도처럼 튀어나온 야트막한 산등성이 아래 호수를 끼고 돌아 다시 A코스와 만나 망향의 동산으로 나가는 탐방로 끝까지 호수와 함께 한다.

비단결 같은 호수면과 산그림자가 조용한 그림을 그린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어답산 아래 낮은 봉우리들이 겹쳐 횡성호 수면에서 반영(反映)되어 데칼코마니를 만들고 그 속에 하늘이 구름과 함께 노닌다.

푸른소나무 숲과 갈색전나무 숲이 함께 투영된 호숫가를 길손들이 무턱대고 끼어든다. 정적을 깨는 속삭임에도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산새들에게 미움을 사지나 않을지 마음이 졸린다. 코스 중간중간에 전망대가 있고 너른 호수와 얕은 산등성이가 느긋한 즐거움을 주고, 곧게 뻗은 수림에서 산림욕도 할 수 있어 자연을 만끽하기에 최적의 길이다.

‘타이타닉전망대’라고 이름 붙인 곳에는 배 선수(船首)처럼 뾰족하게 호수를 향해 만들어진 데크가 있어 양팔을 벌이고 심호흡하며 자연 속에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 전망대 아래 물속에 하늘이 있고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온다. 저만치 하늘에 산이 있고 집이 보인다. 타이타닉전망대를 지나 약간의 오르막을 올라 내리면 다시 평온한 호숫가 길이 나온다. ‘오솔길전망대’에서 횡성호수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조금 더 가면 출발점이 있는 매표소에 닿는다. ‘건강의 첫걸음은 걷기부터’라는 큼지막한 나무간판이 나오고 노천갤러리가 다시 일행을 맞는다.

물안개 핀 호수의 몽환적 풍경이 눈에 띄고 짙은 갈색 낙엽송이 호수에 투영된 아름다운 모습이 또다시 횡성호수를 뒤돌아보게 한다.

태기왕국의 꿈을 못다 이룬 태기왕이 ‘횡성의 신’이 되어 지키고 있다는 이곳의 아픈 역사와 수몰민들의 애환이 깃든 ‘횡성호수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것으로 ‘걸어서 자연 속으로’ 열일곱 번 째 ‘힐링 앤 트레킹’ 이야기를 접는다.

글·사진 =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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