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기적 일으킨 불상…한반도 불교예술 시작을 알리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중생사 관음보살 입상.

낭산(狼山)은 경주 배반동에 있는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산이다. 동서로 폭이 좁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나간 산세가 이리를 닮아 낭산이다. 작은 산이지만 신라에서는 상당히 중량감 있는 숭배대상이었다. 삼산오악(三山五嶽) 중 삼산의 나력이었고 왕경 오악 중 중악이다. 남산은 남악, 서악은 선도산, 동악은 토함산(또는 명활산), 북악은 금강산이다. 신라는 삼산에서는 국가 단위의 제사를, 오악에서는 지방 단위의 제사를 지내며 산신에 대한 각별한 예우를 갖추던 나라다.
 

전 도림사지에서 본 낭산 전경.

△ 1600년 전의 ‘그린벨트’ 신유림, 낭산

낭산을 ‘신선이 내려와 노는 숲’ 신유림(神遊林)이라고도 했다. 413년(실성왕 12년) 가을에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났는데 멀리서 보면 누각같이 생겼고 향기가 자욱하여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왕이 이 현상을 보고 이것은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니 응당 복 받은 땅이다’라며 벌목을 금했다. 약 1600년 전의 일이니 세계 최초의 ‘그린벨트’였을 것이다. 신유림은 전불칠처가람터 중 하나였으며 문무왕이 나당 전쟁의 승리를 위해 사천왕사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선덕여왕이 도리천이라며 자신의 무덤을 예언한 곳이기도 하다. 낭산 하나에 씐 관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타이틀로만 4관왕, 5관왕이다.

당대 거문고의 대가 백결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전까지 공부하던 독서당이 있다. 학계 한쪽에서는 이곳이 최치원의 생가라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이 산의 북동쪽 끝자락에는 왕실기도처인 황복사가 한창 발굴조사 중이다.

중생사지(衆生寺址)로 가는 길, 낭산의 들머리는 사천왕사다.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사천왕사를 지나면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나온다. 햇살이 차단돼 어둑어둑하고 음기가 가득하다.

낭산의 가장 높은 곳, 중생사 남서쪽에 있는 선덕여왕릉.

숲 사이에 선덕여왕릉이 있다. 이곳이 선덕여왕 삼사지기 중 하나다. 여왕은 자신의 무덤이 도리천에 들어서게 될 거라는 예언했는데 적중했다. 불교에서 도리천은 사천왕천 위에 있다. 문무왕이 선덕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건립하면 결과적으로 왕릉이 도리천이 됐다.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삼사지기를 완성한 셈이다.

중생사 길목에 능지탑이 있다. 능지탑에서 보는 일몰.

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릉을 넘어 왼쪽으로 내려가면 능지탑이다. 문무왕 화장터다. 능지탑 언덕에서 바라보는 서산 일몰이 참 아름답다.
 

중생사 마당에 흩어져 있는 신라시대 석재.

△중생사 관음보살의 세 가지 영험

중생사는 능지탑 옆으로 난 작은 길의 북쪽 끝에 있다. 제법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그 끝, 산언덕 아래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마당 오른쪽에 신라시대의 석재를 모아놓았고 팔각원당형 불좌대, 석탑 옥개석 등이 남아 있다.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은 사찰 측이 인근의 신라시대 석재들을 모아 세운 것이다. 절 마당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전각이 지장전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새긴 마애보살 삼존좌상이다. 본존은 지장보살이고 좌우 협시는 신장상이다.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있는 경우가 희귀하다. 때문에 이 조각은 ‘마애보살삼존좌상’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얻었다. 선각으로 조각된 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본존은 형상이 뚜렷하나 좌우 협시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됐다. 기록에 따르면 왼쪽 신장상은 갑옷차림에 오른손에 칼을 짚고 있으며 유희좌를 했다.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악귀를 몰아내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불상에 대한 기록은 ‘동경통지’에 나온다. 보물 제665호이다.

중생사에 있는 마애삼존보살좌상의 본존인 지장보살.

『삼국유사』는 ‘삼소관음 중생사’라는 제목으로 중생사를 소개한다. ‘중생사 관세음보살의 세 가지 영험사례’쯤 되겠다. 유사는 먼저 관세음보살을 그린 이의 프로필과 신라로 망명을 오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화가는 중국 황제의 명으로 황제의 여자를 그리게 됐는데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혔다. 이게 문제가 됐다. 황제가 배꼽의 붉은 점을 보고 화가와 여자의 관계를 의심해 벌을 주려 했다. 승상의 중재로 황제가 꿈속에 본 십일면관음보살을 그려주고 풀려났다. 화가는 곧장 신라로 망명해왔다. 중생사에서 이 절의 관음보살상을 완성했다. 삼국유사는 이 화가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장승요라는 설도 있다고 기록했다. 장승요는 중국 양나라의 화가로 사찰의 장식화를 주로 그렸다. 양무제의 명을 받아 장식화는 물론 여러 왕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실제 그 얼굴을 보는 듯했다고 한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성어가 그에게서 비롯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낭산 십일면관음보살상.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화가가 완성한 관음상은 세 가지 영험을 나타냈다. 첫 번째 영험이 아기 점지다. 최은함은 대를 이을 자식이 태어나지 않자 중생사 관음보살에 매달려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돼 견훤이 서라벌로 쳐들어왔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죽고 나라가 절단이 났다. 최은함은 갓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보살상 아래 두고 피난을 갔다. 적들이 물러간 뒤 절에 돌아와 보니 아기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이 아이가 최승로다. 최승로가 10살이 되던 해에 나라가 고려로 넘어갔다. 아버지를 따라 개경으로 왔던 최승로는 왕건의 눈에 띄었다. 12살에 왕건 앞에서 논어를 줄줄 외었다고 한다. 그 후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는데 성종에게 올린 시무28조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제안이 많았다. 두 번째 영험은 이 절의 주지스님 성태이 보시를 받지 못해 절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를 해결해준 사례이고 세 번째는 점숭이라는 승려가 절을 빼앗길 뻔한 위기에 몰렸을 때 지켜준 사례다.

△ 중생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신라 석불의 클레오파트라

한 가지 의문. 중생사는 관음사찰인데 왜 중생사지에는 지장보살상만 남아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중생사 근처에서 2기의 관음보살상을 발굴했다. 하나는 박물관 남동쪽 옥외전시장에 있다. 중생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유난히 눈에 띄는 조각이다. 두상이 상당히 길고 키가 큰 이 보살상은 언뜻 보면 그리스 여신 같기도 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불상으로 표현되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독특하다. 일제 강점기 발굴 당시 머리만 찾아 박물관 마당 한켠에 전시됐다. 그러던 중 1970년에 땅속에 하반신이 파묻혀 있던 석불신체를 발견하고 이 석불이 박물관에 있는 두상의 주인임을 확인했다. 1997년 머리와 석불신체를 합체하는 완전한 입상을 복원했다. 박물관의 외과수술과 심폐소생술을 거쳐 죽었던 보살상이 부활했다. 관음보살이 박물관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가.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보관 아래에는 화문으로 된 테를 둘렀다. 삼도와 영락의 장식이 뚜렷하며 천의를 걸쳤으며 왼손에 정병을 들었다. 왼팔을 자세를 왼쪽으로 약간 틀어 마치 모델 포즈를 취하는 것 같다.

박물관 실내 전시관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은 이 보살상은 삼존불의 오른쪽 협시보살이다. 본존불은 좌상이었는데 본존불과 왼쪽 협시보살의 행방이 묘연하다. 11면 보살은 발굴 당시 좌대와 배광이 없이 불신만 남았다. 게다가 목과 하체가 단절됐다. 이를 복원해 입상으로 만들었다.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보관 윗부분 정면에 3구, 좌우 각각 3구 뒷면 1구등 11구의 화불을 표현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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