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국가가 어느 날 갑자기 망하는 것이 아니다. 짧게는 십수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걸린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영원한 국가는 없다. 어느 땐가는 망한다. 어떻게 망하느냐가 중요하다.

조선이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패망한 것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시작 30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본이 수시로 침략 국력이 약화되기도 했지만 역대 조선왕들이 보여 준 잘 못된 행태 때문이었다.

왕이 국민과 국가안위보다는 주색잡기에 몰두 왕비와 많은 후궁들을 두고 여인들의 치마폭 그 속에서 놀아나며 눈은 감고 귀는 막고 간신들의 놀이에 놀아났는가 하면, 대왕 또는 대비가 세도정치를 그 때문에 조정 신하들이 두 쪽 세 쪽으로 갈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기도, 왕비와 후궁이 서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시기 질투 음해 중상모략을…. 그런 가운데 왕실 내 권력다툼으로 왕이 왕 답지 않고 피비린내 그 틈새에 끼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느라 들끓는 민심도 모르고 있다 그사이 주변국들이 때때로 침범 국민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잡아가고 재물을 착취해 갔다.

냉정하게 한국의 역사를 들어다 보면 조선이 500여 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었다. 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3대 임금 태종은 원경왕후를 비롯한 후궁 처첩 등 20명을 두고 원경왕후에게 아들 일곱 명 딸 네 명을 포함 아들 열다섯 명에 딸 열여덟 명 총 서른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성종은 부인 열두 명, 중종 열 명, 정종 선조 철종 각 여덟 명, 고종 일곱 명 세종, 영조 각 여섯 명 그토록 왕비와 후궁을 두었다. 그리고 많은 아들딸을 두었다. 그 여인들 간에 그 자식들 간에 세자자리를 두고 왕실 내 파벌이 형성 왕실이 늘 편하지 않았다. 조선의 역대 왕 중 후궁을 두지 않은 왕으로 헌종 경종 순종 세 명뿐이었다. 왕비와 후궁 간에 세자 자리를 놓고 벌인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세자자리를 두고 발생한 남인과 북인 간 사건이다.

1592년 서인 정철이 세자책봉을 거론했다. 임금의 신임을 받던 이산해 류성룡 등 동인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의인왕후에게 자식이 없자 이산해가 인빈 김씨 둘째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내세우자 서인 정철이 의인왕후와 논의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워 서인과 동인이 합의 광해군을 세자로 추대 선조에게 건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런 일련의 일들로 다툼 끝에 결국 정철 등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득세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 1910년 8월 29일 패망하기까지 518년 왕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국력이 쇠퇴 해 지자 이웃 일본 중국 러시아는 물론 멀리 미국 영국 프랑스까지 거문도 강화도를 비롯한 한반도 곳곳에 출몰 국민을 괴롭히고 재물을 갈취해 갔다. 결국 일본이 강압 국권을 빼앗아 가 식민통치를 했다.

지금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독립이 돼 휴전선을 두고 남과 북으로 갈려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북쪽에는 공산주의정권이 세워져 1950년 6월 25일 남북 간에 전쟁을 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쪽의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지닌 좌와 우 또는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 두 축을 중심으로 정치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문제는 보수가 보는 진보 우가 보는 좌다. 보수 또는 우가 보는 진보 또는 좌를 북한의 공산주의와 동일선상에 두고 보려는데 있다. 북한 또한 자기들이 추구하는 공산주의로 생각하고 한국의 진보 또는 좌를 동일시한다. 1945년 8월 독립 후 계속 그래 왔다. 그것이 최근 정치가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자 일부 국민들 중에는 집권자를 중심 주변 위정자들이 북한 공산주의와 가까이하는 것 아닌가 우려를 한 가운데 망국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망국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위정자들은 우려스러운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건국 당시 남북으로 나눠진 정부 그것이 불씨가 돼 결국 국가를 쇠하게 그리고 망국으로 치닫는 그런 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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