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못 참고 세상을 등진 방랑자의 '마지막 안식처'

용장사지 삼층석탑. 해발 400m지점에 위치한 이 탑은 기단석없이 자연석바위 위에 세워져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았다.

용장계곡은 50여 개나 되는 경주 남산에서 가장 큰 골짜기다. 길이가 무려 3㎞나 돼 남산에서 가장 길고 수량도 풍부한 데다 계곡 전체가 암반으로 이뤄져 경관이 뛰어나다. 게다가 남산의 양대 봉우리인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을 가르는 경계선이어서 남산대표계곡이라는 말에 이견이 없다. 계곡물은 형산강의 상류인 기린내에서 울주에서 내려오는 큰물과 합류한다. 강은 북쪽으로 흐르면서 서악동에서 장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서천, 동국대 앞에서 예기소 등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포항 영일만에서 강으로서의 생명을 다한다.

2월인데 벌써 봄날이다. 겨울 계곡에 들어섰는데도 상큼하고 시원하다. 소나무가 주종인 숲은 푸르고 푸르러 눈이 부시고 계곡은 겨우내 얼어붙은 물을 풀어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길을 내며 흘러간다. 중국 송나라 종경선사가 읊었다는 시 한 수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푸른 산 붓질 없어도 천 년 묵은 옛 그림/ 맑은 물 줄 없어도 만년 우는 거문고”(청산불묵천추화 유수무현만고금 靑山不墨千秋畵流水無絃萬古琴)

설잠교 아래에는 등산객들이 소원을 빌면 쌓아둔 돌탑이 지천이다.

들머리에서 설잠교까지는 계곡을 끼고 가벼운 소풍길이다. 설잠교에서 갈림길을 맞는다. 설잠은 김시습의 법명이다. 김시습이 이 계곡에 들어와 용장사에 집을 짓고 이 길을 오갔다는 증거로 경주시가 설치한 다리다. 설잠교에서 계곡을 건너가면 용장사지로 오르는 탑상골이다. 여기서부터는 금오봉 구역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곧장 걸어가면 은적골, 김시습이 왕명을 받고 자신을 찾으러 온 관리를 피해 숨었던 골짜기다. 이 길을 곧장 가면 아담한 규모의 산정호수를 지나 고위봉 정상이다. 설잠교 아래 계곡에는 등산객들이 쌓아놓은 돌탑이 지천이다. 크고 작은 돌을 쌓아 올린 소망탑이다. 돌 하나하나가 마음을 담아 쌓은 연등이다. 천 년 전 신라인들이 바위를 쪼아 부처님을 새기고 소망을 빌었던 그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잠교. 김시습의 법명을 따서 지은 교량이름이다. 다리를 건너면 용장사로 가는 탑상골이다.

다리를 지나 탑상골로 접어들면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계곡 옆에 돌을 파서 절구모양으로 만든 돌확이 놓여 있다. 돌확이 있는 계곡 건너편 평지가 용장사지 건물지다. 석축이 있고 민묘가 있는데 인근 계곡에 치석재가 5매나 발견돼 이 일대부터 용장사역으로 추정된다. 이곳이 등산길에서 만나는 첫 번째 사역이다.

남산은 돌과 소나무가 주인인데 탑상골에서는 키 작은 대나무, 신우대가 주인이다. 가파른 길에 신우대 숲길이 듬성듬성 이어진다. 대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비 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 같기도 하다. 한때 용장사에 살았던 김시습의 시에도 신우대가 나오는 거로 봐서 김시습의 길이라고 해도 좋겠다.

바리게이트 쳐놓은 것 같이 빽빽한 대나무 숲을 지나면 시야가 탁 트이는 평지가 나온다. 광명천지가 펼쳐진다. 사방이 탁 트인 평지에 탑재가 모여 있고 빛이 들어오는 평지의 끝에 아슬한 절벽이 펼쳐진다. 절벽 앞 세 그루의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맞은편 산, 탑봉과 이무기 능선, 고위봉이 장관이다.

용장사지 석탑부재. 평지가끝나는 곳에서 보는 건너편 고위산의 탑봉 이무기 능선이 장관이다.

용장사지의 2번째 사역이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면 삼륜대좌불이 나온다. 넓적한 바위 위에 작은 원반석과 큰 원반석을 차례로 올려 삼층을 쌓고 그 위에 여래좌상을 앉혔다. 높이는 약 4m. 불상은 서방정토를 지향하는 듯 서쪽 내남들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두가 없다. 이 불상이 『삼국유사』 ‘현유가해화엄’편에 나오는 미륵석불장육상이다. ‘장육’은 1장6척의 준말이다.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1척을 30㎝로 치면 4m 80cm이다. 과거의 1척 길이가 22㎝에서 35㎝까지 허용 범위가 넓었고 현재 대좌 위에 불두가 없으므로 불두 크기까지 계산하면 얼추 비슷한 크기가 나온다.

탑상골에 있는 돌확. 이 일대부터 용장사역이 시작된다.

법상종의 조사였던 대현스님이 이 절에 거주했다. 스님이 불상 주변을 돌면 불상 역시 스님을 따라 돌았다고 한다. 대현스님은 경덕왕 12년에 크게 가물자 왕의 초청을 받아 기근을 해결하러 왕궁에 갔다. 그는 법력으로 마른 궁궐우물을 솟아오르게 했는데 그 높이가 7장이나 됐다고 한다. 그 우물을 금광정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말이다.

대현스님은 원효 경흥과 함께 신라의 3대 저술가로 꼽히는 이다. ‘기신론내의약탐기’, ‘성유식론고적기’ 등 52종의 저술을 남겼지만, 인품과 학식이 뛰어나 500년 만에 나타난 성인이라고도 한다. 그의 저술은 중국과 일본 불교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중국의 도봉은 ‘태현법사의기서’에서 “말은 우아하고 뜻은 깊었으며 글월은 간략하고 의미는 풍부하였다. 글을 뿜어내는 지혜의 빛이 더욱 환해졌고 빛이 뻗어내는 깨침의 산은 더욱 눈부셨다”고 적었다.

삼륜대좌불.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장육상으로 추정된다.

삼륜대좌불 동쪽 바위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돼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부처는 한 겹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공중부양한 것처럼 보인다. 여래좌상 바위벽을 돌아 올라가면 삼층석탑이다. 석탑은 별도의 기단 없이 자연석 바위 위에 세워졌다. 때문에 해발 400m나 되는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탑의 높이는 4.5m에 불과하지만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았으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인 셈이다. 이렇게 용장사지는 탑상골 입구의 평지 건물지와 석탑부재가 있는 산위 하단, 삼륜대좌가 있는 중단, 석탑이 있는 상단 등 모두 4개 구역으로 조성돼 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절터인 셈이다.

대현 스님이 떠나고 난 뒤 700여 년쯤 지나 김시습이 용장사에 왔다. 김시습은 ‘금오신화’와 ‘매월당문집’ 등 5권의 문집 2200편의 시를 남긴 천재시인이다. 5살에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이 친히 불러 시를 짓게 한 뒤 상으로 비단 50필을 주었다고 한다. 김시습이 19세가 되던 때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책을 모두 불태우고 은둔하다가 30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경주 남산 용장사에 들어와 ‘금오산실’을 짓고 7년간 정착했다. 김시습은 용장사에 머무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썼다. ‘금오산에서 쓴 새로운 이야기’다. 그는 용장사에 머무는 동안 경주에 있는 신라유적지를 거의 다 돌아보고 시를 남겼다. 그 책이 ‘유금오록’이다.

김시습은 왜 하고많은 절들을 두고 용장사지를 택했을까? 신라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며 대저술가인 대현스님이 주석하던 절이었다는 점이 입지선정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는 이곳에서 달에 비친 매화를 보고 자신의 ‘매월당’이라는 짓고 용장사에 살았던 흔적을 시로 남겼다.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없네 /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돋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는데/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네/ 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는데 깰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