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규 문학평론가
한정규 문학평론가

‘개밥에 도토리’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 ‘개도 밥 먹을 때는 발로 차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개피 본다.’ ‘개보기 싫으면 낙지 사 먹는다.’ ‘못된 사람을 가리켜 개새끼, 개 같은 X, 개 같은 Y’ ‘개 눈깔’ ‘개판’ ‘개털’ 등 개에 빗대 말이 참 많다. 왜? 하필이면 개와 연관 그런 말들이 있을까?

그런 말들을 음미해 보면 개라는 동물은 천한 동물로, 못된 동물로, 쓸모없는 동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개, 요즘 팔자가 늘어져 부모 자식 못지않게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안방을 차지하고, 귀한 음식에 화장을 하고, 게다가 계절에 맞게 고운 옷에 액세서리는 물론 조금만 이상 증상이 보이면 병원을 찾아 치료해 준다. 뿐만 아니다. 부잣집 개는 주치의까지 있다.

지난날 가축에 끼지도 못하고 따돌림받던 그런 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니 개 신세도 변했다. 축에 끼지 못한 개밥에 도토리가 아니라 비록 가축이기는 해도 부모 자식보다 때로는 남편보다, 또는 부인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됐다. 허리 굽어 절뚝이는 어머니는 힘들게 걸어가는데 개는 품 안에 않고 더울까 봐 부채질까지 해 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 간에 개밥에 도토리가 있다. 특히 국민을 위한다는 사람들, 그들 중에서도 권력께나 주무른다는 사람들이 특정 지역 출신이 아니거나 정치적 이념이 다른 무리를 통틀어 개밥에 도토리 그렇게 대하는 것이 가끔 눈에 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 개가 고양이를 내쫓고 안방을 차지하고 주인마님의, 주인 생원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귀한 몸으로 살 줄 고양이는 물론 개인들 알았을까?

세상일이란 모른다. 세상일 분명한 것은 들고 나는 것이다. 만물 중 어느 것 하나도 나오고 들어가는 것 생사가 아닌 것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다. 권력을 잡았으면 그 권력에서 언젠가는 벗어난다.

돈을 벌었으면 그 돈이 언젠가는 수중에서 이탈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 도지동 도의 법칙이다. 그걸 모르고 항상 개밥에 도토리로 생각하고 그러다 언젠가 개피 본다. 개처럼 밥 먹다 발길에 채 인다. 낙지 사 먹는 꼴 보인다. 개 같은 XY 말 듣는다. 결국 개판이 되고 개털이 된다. 그런 세상이 돼서는 안 된다.

일부가 모여 전부가 되고 전부가 흩어져 일부가 된다. 는 것 알아야 한다. 일부를 무시하면 전부가 무시 받고 전부가 무시 받으면 일부 또한 무시 받는다. 는 것 알아야 한다. 현명하다면? 현명치 못하면 어쩔 수 없고!

그래서 분열 비방은 안 된다는 것이며 화합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밥에 도토리 시켜서는 안 되고 개밥에 도토리 당해서도 안 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 곧게 새워 보고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릇이 큰 사람은 누구와도 화합하려 하면 하지 개밥에 도토리 시키는 그런 처신하지 않는다,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1960년대 이후 줄곧 그런 행태를 늘 듣고 볼 수 있으니 안타깝다.

자신이 최고란 생각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세상에는 작은 것 아래 또 작은 것이 있는가 하면 큰 것 위에 더 큰 것이 있다. 고양이가 쥐와 함께 있으면 쥐가 움츠리고 벌벌 떤다. 고양이는 그걸 보면서 세상에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벌벌 떠는 쥐를 보며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다 생각하고 우쭐하겠지만 개가 고양이 앞에 나타나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면 고양이 또한 도망치지도 못하고 몸을 숨기느라 허둥거린다. 개 또한 늑대를 만나면 고양이나 쥐 꼴 난다. 개 네가 왜 늑대 나를 닮았어? 하고 물고 뜯고 죽인다. 그게 세상 이치다. 중요한 것은 언제 누구라도 도토리 넣은 개밥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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