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상에 대한 이해로 진정한 과학자 자질 갖춰야

Shell에서 근무 중인 여승민 Key account manager.

‘과학 기술’은 국가산업 경쟁력이자 국력 원천이다.

경북일보는 ‘실사구시(實事求是) 과학 정신’을 정립하고 기초과학이 국부 창출 원천이 되도록 각 분야 권위 있는 과학 인재와 대담을 통해 한국 과학이 나아갈 길을 지속 모색하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글로벌 에너지 기업 ‘Royal Dutch Shell’에서 근무하는 여승민(40) Key account manager이다.

그는 포항 소재 경북과학고등학교 6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이 회사는 석유 및 가스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 외에도 저탄소 바이오 연료 및 수소를 포함한 친환경 연료와 윤활제 등도 생산하는 기업이다.

여승민 매니저는 카이스트 학부 기계공학과 전공을 졸업했고, 일리노이 대학교 기계공학과에서 대학원·박사과정을 마쳤다.

석·박사 과정 당시 세부전공이었던 마찰학/윤활학 지식을 기반으로, 2012년 취직 후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 위치한 Shell 연구소에서 엔진오일 개발 연구원으로 6년간 근무했다.

이후 지난 2019년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 캠퍼스에서 MBA를 취득하면서 연구원에서 비즈니스 계열로 전향해 기업 전략에 가장 중요한 중요 고객사와의 관계 유지 및 계약 진행 등을 맡는 Key account manager로써 근무 중이다.
 

엔진오일 제품 실차량 필드테스팅 후 엔진 분해 작업 검사 중

다음은 여 매니저와의 1문 1답이다.

△경북 또는 포항과의 인연은.

-부모님 고향이 안동이며, 나 또한 자연스럽게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 수학 경시부를 하면서 친구들로부터 처음으로 과학고등학교와 카이스트라는 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부터 막연히 과학고·카이스트에 입학하겠다는 게 학창시절 목표가 됐다.

이에 따라 안동 경안중학교를 다닐 당시 과학고 입학에 유리한 과학경시부에 매달렸다.

여기서 운 좋게 과학경시 전국대회까지 나갈 수 있었고, 덕분에 경북과학고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대학교 박사 졸업식

△근무 중인 셸(Shell)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회사의 정식 명칭은 사실 Royal Dutch Shell인데, 통상 조개 모양의 회사 로고와 함께 적힌 ‘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Exxon Mobil·BP·Chevron 등과 함께 세계 5대 석유 메이저 회사 중 하나로,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영국에서 법인 인가를 받은 네덜란드-영국 합작 회사다.

오일-에너지 회사들의 규모는 상당하다. 특히, 셸은 처음 입사하던 2012·2013년 기준 연 매출 500조원 가량을 달성하며 상위 500대 기업에서 항상 1위를 차지했다.

최근에는 석유 가격하락으로 주춤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여러 석유 기업들은 항상 세계 기업 순위 10위권 안에 대부분 포진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셸은 석유회사가 아닌 ‘에너지’ 회사로 변화 중이며 고전적인 석유시추·석유화학·주유소·윤활유 사업뿐만이 아닌 각종 신재생에너지·천연가스·전기·디지털 사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본인이 셸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업무는.

-크게 보면 회사에서 윤활유 사업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다행히 석박사에서 연구한 윤활학 전공을 살려, 입사 초기에는 연구소에서 윤활유 제품 개발을 담당했다.

당시 대형 트럭·버스·중장비 등의 대형 엔진에 사용되는 ‘Heavy Duty Engine Oil’이란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엔진 오일을 개발하면서 자연스럽게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을 상대로 많은 프로젝트를 했었다.

물론 한국의 자동차 회사들과도 일을 많이 했는데, 서울 시내의 일부 버스들은 당시 신규 개발했던 엔진오일로 운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하는 일은 제품개발과는 많이 다르다.

현재는 Americas Regional Key Account Manager를 맡고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캐나다·미국·멕시코·브라질 등, 남북미 전 국가에서 Asia Auto OEM, 즉 현대·도요타·혼다 등과 같은 아시아 자동차 회사들을 상대로 윤활유 사업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연구소에 있을 당시 엔진오일 제품을 개발하였다면, 지금은 그 엔진오일 제품을 제가 담당하는 Key Accounts(중요 고객)을 상대로 사업을 진행하는 셈이다.
 

일리노이 대학교 박사과정 당시 연구실에서 실험 중

△지금의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사실 석박사 시절 전공했던 윤활학은 미국에서도 흔치가 않다. 어떻게 보면 정말 고전적인 학문이며, 인기도 없고 취업의 기회도 적은 편이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항상 관심이 많았던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고, 연관을 지을 수 있었던 윤활학 연구를 고집했다.

물론 그 대가로 취업문은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박사 졸업을 앞두고 1년 동안 약 100여개의 회사에 지원했었고, 그중 실제 면접까지 이뤄진 곳은 2~3곳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당시 셸과 같은 메이저 거대 기업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취업을 거의 포기한 채 ‘박사 후 과정’을 알아보던 중, 당시 지도교수님을 통해 셸 연구소 측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셸에서는 윤활학을 전공한 박사 졸업예정자를 찾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윤활학을 끝까지 고집했던 점과 때마침 셸에서 윤활학 전공자를 찾았던 점 등 모든 게 맞아 떨어져,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 메이저 기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설명과 연구 성과가 있다면.

-앞서 말했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를 너무나도 좋아했기 때문에 카이스트에서도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전공도 역시 자동차와 최대한 연관이 있는 윤활학을 전공했다.

엔진오일을 개발할 땐 자동차 엔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그를 둘러싼 자동차 산업·환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하다.

서울도 마찬가지이지만, 요즘은 세계 여러 나라의 대도시에서 CNG나 LNG 같은 천연가스로 주행하는 친환경 버스만이 운행이 가능하다.

이러한 친환경 차량에 전용으로 쓰일 수 있는 엔진오일 제품을 개발·출시했을 때가 연구소 재직 당시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석유,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는 언젠간 고갈되는 상황에 세계 곳곳에서 친환경 에너지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석유업계에는 어떤 영향이 미치고 있나.

-대체 에너지를 비롯한 친환경 에너지 연구사업은 사실 수 세기 전부터 해왔다고 본다.

한정된 매장량이 초기의 대체 에너지를 찾는 주원인이었던 반면, 요즘은 그보다 지구 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화석연료를 대체할 다양한 에너지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석유업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석유 회사가 아닌, 다양한 에너지원을 다루는 종합 에너지 회사로 탈바꿈하고 있다.

쉽게 말해 과거에 휘발유로만 자동차가 움직이던 시절, 석유 생산·공급·주유소 등이 오일회사의 주 사업이었던 것에 반해, 이제는 전기자동차가 언제 어디서든 충전할 수 있는 충전소를 마련하고, 여기에 쓰일 전기를 공급하는 게 에너지 회사의 큰 사업이 됐다.

물론 향후 20년은 고전적인 석유사업이 이런 회사들의 핵심 업무가 아닐 순 없을 것이다.

전기차와 같은 친환경 대체 에너지의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는 나라가 아직 전 세계의 대부분인 만큼 화석연료의 소비는 당분간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향후 20년가량은 고전적인 석유사업이 에너지 회사들의 핵심 업무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지금의 일을 계속하면서 이루고 싶은 업적 등 꿈이 있다면.

-어느덧 미국에서 생활한 지 15년째를 맞았고, 9년째 회사생활을 해오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국에서의 회사 생활은 여전히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모험이다.

어쩌면 이 큰 글로벌기업 안에서, 한국인으로서 다른 현지인들과 경쟁을 통해 지금보다 좀 더 영향력이 있는 위치에 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우선은 만족스러운 성과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서 쌓은 나의 지식과 경험을 언젠가는 한국에서 나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포항과 경북의 방사광가속기 등 풍부한 R&D 인프라를 어떻게 활용해야 4차 산업 혁명 시대 과학 기술을 더 꽃 피울 수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다면, 이젠 어떤 하드웨어적인 인프라보다는, 사람에 대한 투자·인재 활용 방안에 대한 절실한 고민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4차 산업은 결국 넘쳐나는 정보·지능,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의 방식과 아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경북·대구에는 경북과학고·포스텍·DGIST 등 우수한 교육 환경이 충분히 마련돼 있다.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떠나, 이공계·과학을 다루는 교육 기관일수록 우리 인간에 대한 교육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삶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한 교육이 이뤄진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우수한 인재들을 이 경북에서 더 많이 배출될 수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 경쟁력에는 과학 분야의 연구산업도 매우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석유화학 분야에서 산업기술을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나.

-대한민국엔 SK·S-Oil·GS 칼텍스 등 세계적으로도 이미 잘 알려진 여러 석유화학 회사들이 존재한다.

셸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업무 중 여러 번 입에 오르내리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유(Base Oil)라는 아주 국한된 분야에 한해서만 잘 알려져 있을 뿐, 사실 다른 여러 분야에서는 크게 두각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장기적으로는 결국 여러 분야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이뤄나가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 기업들 안에서도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 석유화학 분야엔 이미 충분한 인재와 기술력, 그리고 인프라가 존재한다.

국내에서 서로 경쟁에만 몰두하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기술 협약을 통해 함께 글로벌 시장을 두드려 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초과학 그리고 응용과학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더욱 발전하려면.

-이 질문은 정말 쉽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한국 주입식 교육에서의 탈피만이 기초과학 응용과학에서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생활 중인 미국을 보면, 한국 부모만큼 자녀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자세히 가르치려고 하는 부모는 없다.

올바른 교육은 스스로 알아가고 깨우쳐 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면 된다.

절대 답을 줘선 안 된다. 이 같은 올바른 교육 환경에서 자란 인재들이 이 세상의 궁금함·호기심으로부터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응용과학을 이끌 것이다.

물론 짧은 기간 동안 변화하긴 어렵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국 교육 방식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과학자를 꿈꾸는 과학고 등 이공계 후배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진정한 과학자는 절대 과학만 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학을 활용하는 우리 인간과 이 세상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과학자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대쪽같이 부러지지 않는 자세보다는 유연해지는 법도 배워야 하고, 과학을 배우고 연구를 하다 보면 윤리·도덕적으로도 충분히 성숙해져야 한다.

이공계 관련 지식 습득은 너무나도 당연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이 흐른 뒤 되돌아보면 어떤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영감은 전공 서적보다는 오히려 생활의 경험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물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좀 더 멀리, 좀 더 넓은 세상과 부딪히라고 조언한다.

경북에만 갇혀 있지 말고, 전국으로 나가야 한다.

또 한국에서만 갇혀 있지 말고, 넓은 세계로 나오길 바란다.

과학은 세계 공용이다. 결국 이 세계가 과학의 무대이고, 다양한 세상과 환경을 경험해야 한다.

세계 무대로의 진출을 위해선 영어와 같은 어학능력도 굉장히 중요하다.

열심히 공부하라. 어쩌면 수학·과학보다 더.



△공무원이 대세인 시대, 안정적인 직장에 모두 매몰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공무원은 정말 중요한 직업이다. 어쩌면 그 어떤 직업보다 더 중요하다.

재정·정책·복지 등 한 나라의 모든 살림살이를 돌보는 직업이라면 그 어떤 직업보다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공무원이라는 직장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자체에는 이미 구조적인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야 말로 정말 똑똑하고, 고도로 교육·훈련된 고급 인력이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랏일에 사명을 가진 고급인력만이 공무를 수행해 나가는 한편, 그 외에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고 더 잘 맞는 다른 직장에 집중하는 것이 좀 더 건강한 한국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6~2017 독일 함부르크 근무당시 부인과 함부르크 시청 광장 앞에서

△삶에 대한 조언이나 지혜, 자신이 가진 가치관이나 철학 자유롭게 말해보자면.

-셸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을 때, 당시 지도교수님께서 가장 먼저 해주신 말씀을 항상 잊을 수 없다.

‘Hard work is supposed to get paid off eventually’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는다는 말이다.

아주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이 말을 마음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세월이 흐른 후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에 집중하고 노력을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독자나 후배, 젊은이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이미 유명한 동문 선배님들께서 좋은 이야기들을 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들의 조언에 보태서 해외에서 오랜 생활을 한 나로서, 우리 후배·젊은이들에게 더 해줄 수 있는 말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이다.

머나먼 타국에 나와서 살아보면, 한국 사람만큼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한국 사람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경북 사람은 더더욱 없다.

우리 경북의 후배들이 좀 더 큰 세상으로 진출해서 꿈을 펼치고,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길 희망한다.

나 역시 그 작은 안동 시골에서 자랄 때만 해도, 30년 후 이렇게 해외에 살면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루에 많으면 각기 다른 6개 국가의 사람들과 미팅을 갖는다.

아직도 더 나아가야 할 세상이 멀고도 넓다.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 경북의 후배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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