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원 대구대 법학부 교수·전 한국헌법학회 회장

산하가 푸른 물결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피어나기 위하여 나무와 풀들이 기다린 것인지, 그 피어남을 영접하기 위하여 산과 들이 기다린 것인지, 한꺼번에 들불의 요원처럼 푸른 싹을 내밀고 있습니다. 산의 경사면에도 산의 능선 위에도 그 색깔의 선명과 경중을 따져볼 필요도 없이 푸름이 덮고 있습니다. 삼나무는 세세한 연초록의 색으로 단장을 시작하였고, 굴참나무는 여린 갈색의 잎을 내밀었고, 떼죽나무는 송편 크기의 녹색 잎을 주렁주렁 달고 있습니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어울려야 숲이 되는 것임을, 한 송이의 꽃으로는 꽃다발을 만들지 못하듯 나무 한 그루로는 숲을 만들지 못하는 것을 아는 듯 수종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의 피어남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크기가 다르다고 더 차지하려 다투지도 않습니다. 시기가 다르다고 서로가 먼저 피어나려 경쟁하지도 않습니다. 어울려 싹을 내밀고 군무처럼 함께하여 거대한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숲에 새와 곤충들이 날아들고 집을 짓는 것은 어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온을 감지하기 때문입니다. 배시시 잎을 내민 나뭇가지도 가녀린 움을 틔운 풀들도 그 피어 내는 순간에는 연약하지만 각기 자신만의 고유색을 내보입니다. 먼저 피어난 꽃의 붉음까지 더하면 총천연색의 향연이 됩니다. 나무와 풀에 잠잠한 마음을 툭 던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은 그 피어날 때에는 오로지 자신만의 고유색을 내보인다는 것입니다. 산의 한 면이 도화지라면 그 울타리 안에서 나무와 풀들은 각기 다른 고유색으로 구도를 잡은 듯합니다. 각양각색이 한꺼번에 다 녹아나 있는 것입니다. 그 풍경 앞에서 마음이 편안하여지는 이유는 전체로서의 조화로움 때문입니다. 조화로움이란 각기 다름을 헤치지 않고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숲은 수종이 다르다 하여 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나무와 풀이든 다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터를 내주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광경을 봅니다. 그 피어날 때에는 각기 다른 색의 나무와 풀이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잎을 다 피우고 나서는 그 고유색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하나의 거대한 초록색이 됩니다.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서는 오로지 한 가지의 색인 초록으로 융합을 하는 것입니다. 각기 흘러온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는 모습 같습니다. 숲의 그 융합은 인간이 눈여겨 배울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다투고 다른 주장이 난무하더라도 그 결론의 실행에 있어서는 하나로 결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였을 때에 인류의 문명은 발전을 구가하였고 국운은 융성하였던 것입니다. 숲의 의미와는 거꾸로 가는 세태입니다. 그 여린 때에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함께이다가 조금 성장을 이루고서는 다른 것을 배척하고서 빡빡 자기 것만 우기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편을 가르고서 다투는 것에는 온 힘을 쏟으면서도 뭉쳐서 같이 이루어내어야 하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참 잘못된 형태입니다. 골이 더 깊어지면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푸름의 산과 숲이 그런 인간에게 교훈을 주고 있건만, 저 홀로 똑똑한 양 인간은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는 것이 아니라 숲처럼 어울려 함께 이루어 내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나의 주장과 나의 것만의 챙김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남의 주장의 경청과 남의 것에 대한 배려는 결국에는 큰 이룸을 만들어 모두에게 이로움이 되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편을 나누어 아웅다웅하는 것은 하잘것없는 것임을 숲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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