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 제자' 표훈, 공중부양 탑돌이 기도로 천제와 소통했다

 

 

낭산 북쪽 끝자락 동쪽에 있는 황복사지 전경. 진평왕릉과 마주 보고 있다.

표훈대덕은 의상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진정 상원 양원과 함께 네 손가락 안에 드는 상족(上足)제자였다. 흥륜사 법당 10성에 이름이 오를 정도로 신라 불교에서 위대한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각종 기록이 문무왕대에서 경덕왕대까지 거의 100년에 걸쳐 흩어져 있어 의상의 직제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낳고 있기도 하다.

표훈의 말년은 조금 괴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경문왕 때문이다. 경문왕은 아들에 대한 열망이 집요했다. 삼국유사 기록에 옥경의 길이가 8치(약 24㎝)나 되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첫 번째 왕비를 폐하고 만월부인을 후비로 들였다. ‘물건’이 실하므로 불임의 책임을 모두 왕비에게 물은 것이다. 후비를 얻고도 자식이 생겨나지 않자 마음이 급해진 경덕왕이 표훈을 찾았다. 표훈이 천궁을 제 안방처럼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삼국유사』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편이다.

왕이 표훈을 불러 말했다.
“짐이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덕께서 상제를 찾아가 아들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표훈이 천제를 찾아가 이 말 전하고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었다.
“천제가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아들은 마땅하지 않다고 합니다.”

다급해진 왕이 한 번 더 부탁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 바랍니다.”

표훈이 다시 올라가 그 말을 전했다.

천제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아들이 태어나면 나라가 위태롭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할 때 천제가 표훈을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는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는 천궁을 이웃마을처럼 왕래하며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 다시는 내왕을 말라.”

표훈이 내려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며 달랬다. 그러나 왕은 나라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이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며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으니 이름은 건운, 혜공왕이다.

표훈이 경덕왕을 만나 후사를 논할 때는 대략 757년(경덕왕 16)쯤이다. 태자가 8살 때 경덕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태자가 태어나기 8년 전으로 역추산하면 그런 계산이 나온다. 그때 표훈은 황복사에 주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계도기총수록’은 고려시대에 간행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인데 여기에 표훈이 그 당시 황복사에서 강의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복사는 경주 낭산의 북쪽 끝머리의 동쪽에 있다. 원삼국시대 신라 왕경오악 중 중악으로 왕경의 진산이다. 또 산신에게 제사를 받드는 대중소 3사중 대사를 받드는 성스러운 산이다. 실성왕 때는 이곳이 신이 노니는 곳이라 하여 ‘신유림(神遊林)’이라 하고 벌목을 금지시켰다.

낭산 서쪽 능선의 능지탑.

세계 최초의 그린벨트였을 것이다. 나당전쟁이 일어났을 때 신라군의 총사령부 역할을 했던 ‘사천왕사’가 있고 선덕여왕릉이 있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화장터 능지탑이 있는 곳이다.

황복사는 선덕여왕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왕은 당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 받은 뒤 영묘사를 창건한 이래 분황사와 황복사를 잇따라 세웠는데 ‘황(皇)’자는 여성으로서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의 존호 ‘성조황고(聖祖皇姑)’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낭산동쪽에 있는 신문왕릉. 황복사는 신문왕의 원찰이었다.

황복사는 신라 중대에 이르러 신문왕을 위한 원탑이 조성되고 낭산 동쪽에 신문왕릉이 들어서면서 신문왕의 원찰로 기능했다. 그 뒤에 신문왕의 둘째 부인인 신목태후와 아들 효소왕을 함께 추복해 왕실의 원찰로 기능을 확대했다.
 

황복사삼층석탑. 의상과 제자들이 공중에서 탑돌이를 했다고 한다.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목태후와 효소왕이 건립했다. 신문왕이 죽었을 때 태자 이홍은 7살이었다. 따라서 신목태후가 섭정을 펼쳤고 석탑도 신목태후가 건립을 주도했을 것이다. 이후 성덕왕 대에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추복을 위해 삼층석탑의 2층 몸돌을 들어내고 불사리 4과와 6촌의 순금제 미타상 1구, ‘무후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했다.
 

발굴공사가 진행중인 황복사지. 황복사지 동쪽에서 고분이 발굴됐다

황복사는 의상이 29세에 출가한 사찰이다.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주석하던 절이기도 하고 낭산이라는 성지에 들어선 왕실의 원찰이었다. 경덕왕이 표훈을 불러 아들을 점지하도록 천제에게 부탁을 해달라고 하던 시점이 표훈이 황복사에 있던 때이기도 하다. 이때 표훈이 아들을 낳게 부탁해달라는 경문왕의 청탁을 받는다. 왕실원찰에다 이곳의 사주는 국통(國統)이었다.
 

이 탑의 2층 탑신에서 성덕왕때 안치한 금동사리함 들이 발견됐다.

표훈은 어떻게 천궁을 마음대로 들락거렸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를 『삼국유사』 ‘의상전교’편에서 찾았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있으면서 항상 천궁에 왕래하였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와 함께 탑을 돌며 매양 허공을 밝고 올라가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와 돌층대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가 또한 3척이나 층계를 떠나서 허공을 밟고 돌았으므로 의상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니 세상에는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이제 천궁의 비밀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정리해보자 △표훈은 불국사에 있으면서 천궁을 왕래했다. △의상은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들을 이끌고 탑돌이를 하면서 공중부양을 했다. △세상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비밀로 하라.

이때는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와 낙산사를 거쳐 황복사에 머물며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으로 보인다. 황복사에 머물 때 제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면서 뭔가 특별한 수행방법, 기도방식을 가르쳤을 것이다. 물론 표훈도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허공을 밟으며 탑돌이를 했다는 대목에서 천궁의 자물쇠가 풀렸다. 표훈이 불국사에서 천궁을 다니는 비장의 기술은 의상이 황복사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벌인 탑돌이와 무관치 않다. 표훈이 마음대로 들락거렸다는 천궁은 어디일까.

김복순 전 동국대국사학과 교수는 석탑의 구조에서 해답을 찾았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탑의 상륜부를 천궁이라 하고 지하 부분을 지궁이라고 하는데 법문사의 경우 지궁이 유명하고 소림사탑은 천궁이 유명하다. 이 부분에 불사리를 안치해 놓는 까닭에 이렇게 부르고 있다”

결국 표훈의 천궁 왕래는 탑의 상륜부까지 뛰어오르는 방식의 탑돌이였을 것이다. 일반인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기도 방식으로 천궁을 오르내렸고 기도를 통해 천제와 소통했을 것이다. 때문에 의상이 ‘세상 사람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니 세상에는 가르칠 것이 못 된다’고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콜롬부스의 계란세우기’처럼 별 것도 아닌 기술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을까? 중국 소림사가 탑의 상륜부를 천궁이라고 부른 까닭이 그곳의 승려들이 무예가 뛰어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표훈이 천궁에 몇 번이나 다녀온 끝에 세상에 나온 혜공왕은 8세에 왕위에 올라 성 정체성으로 신뢰를 얻지 못했다. 유사는 “소제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를 차기를 좋아했다”고 전했다. 혜공왕은 결국 김경신과 김양상에게 시해(삼국사기는 시해범을 김지정이로 지목하고 있다)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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