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내 경인사(사당)에서 열린 왕산 허위 선생 순국 113주기 추모제 참석자들이 왕산의 숭고한 나라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구미시 제공

왕산 허위 선생 순국 113주기 추모제가 21일 오전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내 경인사(사당)에서 열렸다.

(사)왕산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추모제(향사)는 장세용 구미시장과 김재상 구미시의회 의장, 우연식 대구지방보훈청 보훈과장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각각 맡았다.

왕산 선생의 유족 등 20여 명도 자리를 함께했다.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한 왕산(1855~1908)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국 의병장과 연합한 13도 창의군을 결성, 의병 총대장으로 서울로 진격하였으나 실패,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제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유학자이자 대한제국 시기 평리원 수반 판사, 재판장(오늘날 대법원장), 비서원 승(대통령비서실장) 등의 관직에 재직하기도 했다.

서울시는 이를 기려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를 “왕산로”라 명명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은 왕산 허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제1호)을 추서했다.

왕산뿐 아니라 왕산 가문은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다.

왕산 허위 선생의 큰형(허훈 선생)은 진보에서 일으킨 의병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허겸 선생)은 왕산 선생의 김산(김천) 의병과 방산 선생의 진보 의병 때 참여한 것을 비롯해 신민회 회원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학교 설립,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왕산 선생의 순국 이후 일가는 일제의 감시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구미에서는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자 허겸 선생은 유족과 사촌 형제인 허형, 허필 선생 등의 일가를 데리고 만주(서간도)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회영, 이시영 선생 등의 신민회가 추진 중이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합류했다.

왕산 선생의 장남(허학 선생)은 21세의 나이로 경기도 연천에서 왕산 선생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했다. 1913년 독립의군부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둘째 아들(허영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광복군으로 활약했고, 셋째 아들 (허준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총무와 경리부장을 맡았다.

허준 선생은 한때 김좌진 장군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청산리전투에서도 활약했다. 넷째 아들 (허국 선생)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왕산 선생의 사촌 형제인 허형 선생은 1906년 오적 암살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인 허발 선생은 이상룡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일창 한약방’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연락처로 사용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허형 선생의 동생인 허필 선생의 아들은 허형식 장군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하며 ‘만주 최후의 파르티잔’으로 불렸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왕산 허위 선생의 숭고한 나라 사랑과 희생정신을 실천하신, 왕산 선생뿐만 아니라 왕산가의 모든 분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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