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유리 덮개를 깐 회색 책상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봅니다. 조용한 한낮입니다. 책상엔 쓰고 남은 A4용지와 읽지 않은 자기계발서, 날짜를 넘긴 달력과 유행 지난 캐릭터 티슈, 물수건으로 채 닦이지 않은 먼지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 첫눈처럼, 빈 모니터가 하얗습니다. 워드프로세서 화면에 커서가 깜박입니다. 뭐라도 적고 싶지만, 적절한 첫문장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ㅏ’자와 ‘ㅣ’자를 썼다 지워 봅니다. 형광등 불빛이 시리게 내리쬡니다. 충혈된 눈을 껌벅거립니다. 방심했다가는 잠이 들기 십상입니다. 양손을 깍지 끼고 손가락 운동을 해 봅니다. 각질이 일어난 입술에 립밤을 발라 봅니다. 손바닥 크기 정도 되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 봅니다. 이어폰을 끼고 ‘잔잔한 감성 연주곡 메들리’ 같은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고도 시계는 멈춘 것처럼 쉽게 가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모니터 화면은 금세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가끔씩 엔터 키를 두드려 줘야 합니다.

글을 적고 싶습니다. 괜스레 머리를 긁어 봅니다. 알맞은 주제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반짝반짝한 아이디어 하나만 있다면, 그 뒤의 내용은 술술 풀려갈 텐데 말입니다. 한때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한 문장, 한 문장이 별처럼 모여 빛나는 기획안이 되던 때가요. 저는 웹기획자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핫한 직업이었죠. 미래의 유망 직업 Top30 안에 항상 들어가곤 했으니까요. 저는 준비된 커리어를 바탕으로 지금의 기업에 입사했고, 15년의 근속 년수를 꼬박 채웠습니다. 인바운드 센터로 배치된 지는 1년 정도 됐습니다. 본사에서는 경영상의 이유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남은 인력을 재배치했죠. 크리에이티브한 업무는 아닙니다.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고, 고객들의 불만을 들어 주는 일이지요. 얼핏 웹기획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부서로 발령이 나게 된 것은, 제 목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창일 때는 별명이 꾀꼬리일 정도로 목소리가 좋았거든요. 전화가 많이 걸려오지는 않습니다. 아니, 전화를 받을 사람이 콜 수보다 더 많다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전화기는 쉽게 제 차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낮이 되면 저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만 한 문장이라도 적게 되길 바라면서요.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획안을 제출하고 싶습니다. 언제나 그런 꿈을 꿉니다. 무대 위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도약하는 꿈, 무리를 선도하는 새처럼 비상하는 꿈을요.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 놓습니다. 건전지를 장착한 무선 마우스를 이리저리 굴려 봅니다. 이번에도 꿈을 꿉니다. 기획안이 나타납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아이템이 소개됩니다. 요즘 핫하다는 인공지능을 뛰어넘는, ‘초’인공지능이 장착된 그림책 시리즈입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립니다. 프리젠테이션이 성공적이었나 봅니다. 언제나 그런 꿈을 꿉니다. 언제나 그런 꿈, 꿈보다 더한 꿈을요…….

“홍 대리는 밤에 집에서 뭐하나?”

밤이 아닌 낮에 꾸는 꿈은 항상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적막을 깨는 목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팀장님이었습니다. 마르지 않는 유전처럼 기름기 가득한 얼굴에, 두꺼비처럼 툭 튀어나온 두 눈이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세 겹으로 접힌 목 주름이, 위에서부터 내려온 땀방울을 만나 작은 계곡을 이뤘습니다. 망치로 두들겨 맞은 두더지처럼 저는 목을 집어 넣었습니다. 사무실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했습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직원들이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저와 팀장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요즘 회사 분위기도 안 좋은데 조심 좀 하지.”

“넵.”

저는 요즘 유행하는 ‘넵체’로 짧게 대답하고, 구겨졌던 목을 조금씩 폈습니다. 사무실 공기는 차가웠습니다. 책상 위에 배달된 녹즙도 얼어붙는 한겨울이어서일까요, 사각지대에 위치한 제 자리까지 히터 열기가 닿지 않아서일까요. 저는 책상 위에 널린 A4 용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품 환불요구 응대 매뉴얼’, ‘고객의 마음을 읽는 법’ 같은 제목들이 쓰레기통 속으로 차례차례 사라졌습니다.

“택배 왔습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껑충한 키에 조금은 마른 듯한 몸매, 수세미처럼 짧게 깎은 스포츠 머리를 한 택배 기사가 다가왔습니다. 3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요. 언제나 제 시간에 택배를 배달하는 성실함은 있지만, 솔직히 말해 제 취향은 아닙니다. 어쨌든 택배 기사는 무심한 손길로 제 책상에 상자를 가볍게 내려놓았습니다. 뜯지 않아도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운동할 때 혈압도 측정해 주고 타이머 기능도 있다는 스마트밴드입니다. 팀장님이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통수가 따가웠습니다. 하지만 얼리어답터가 되려면 이런 것들을 사 줘야 합니다. 저는 그래도 한때 웹기획자였으니까요.

“팀장니-임, 이것 결재 좀 해 주세요.”

팀장님의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할 때, 양서희 사원이 결재판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20대 후반의 양 사원은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물들였고, 쌍꺼풀 진 큰 눈동자를 컬러렌즈로 덮었습니다. 콜라겐이 함유된 족발처럼 탱탱한 피부가,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도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양 사원이 저에게 눈을 찡긋, 해 보였습니다. 곤경에 처한 날 도와주기라도 했다는 걸까요, 저는 그 작위적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후불입니다.”

택배 기사의 말에, 솔기 터진 빨간 러브캣 지갑을 뒤졌습니다. 잔돈이 없었습니다. 이것 참 난감했습니다. 나는 눈을 찡긋, 해 볼 요량으로 택배 기사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소용 없었습니다. 감았는지 떴는지 모를 긴 눈이 흰자위를 드러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어찌 된 일인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3천원만 빌려 줘.”

어쩔 수 없이 양 사원의 도움을 한 번 더 받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순간 양 사원이 끼고 있는 컬러렌즈가 눈동자와 분리되는 듯해 보였던 건, 제 착각이었을까요. 양 사원이 입꼬리를 올린 채 애매하게 웃으며, 저에게 3천원을 건네 주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무사히 위기를 넘기게 돼서.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택배 기사는 나가 버렸습니다. 화가 났지만 참기로 했습니다. 자리에 앉았습니다. 시계를 쳐다보았습니다.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낮의 시간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낮 시간이 언제 닿을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힘겹게 걷는 순례라면, 밤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 한 정치인의 슬로건이었다고 하지요. 퇴근 후 저는 등을 다 덮는 백팩을 둘러메고 지하철 3호선에 몸을 맡겼습니다. 불광역까지 30분이 조금 넘는 거리를 이동한 후, 8번 출구에 위치한 실내 수영장으로 들어섰습니다. 퇴근 후 운동 하나쯤은 배워 주는 것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직장인의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라커 룸에서 오리발과 샤워용품 같은 것들을 챙긴 후 탈의실로 들어갔습니다.

69.5.

처음 보는 숫자였습니다. 얼른 체중계에서 내려왔습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꾸준히 수영을 해 왔는데, 이게 웬일일까요. 며칠 나오지 않은 동안 체중계가 고장 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평온했습니다. 혹시 몰라 다시 올라가 보았지만, 숫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더 벗을 옷도 없었습니다. 누가 보지나 않았나 주위를 둘러보게 되더군요. 체념하거나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운동해서 몸무게를 줄이는 수밖에는요. 적어도 70킬로를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마치 넘어서는 안 될 국경으로 진입하는 것처럼 불온하고 위험해 보였으니까요. 몇 년 전, 제가 30대에서 40대의 나이로 들어섰던 것처럼요. 한 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경계. 저는 그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샤워실에서 가볍게 샤워를 한 뒤, 수영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따라 수영복이 더 타이트하게 느껴졌습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글쎄요,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뭐랄까, 귀염성이 있는 얼굴이랄까요. 아직 얼굴은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미혼이라 관리에 신경을 쓴 탓도 있겠지요. 준비 체조를 하고 레인으로 건너갔습니다.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온 지는 세 달 정도 됐습니다. 남들은 6개월은 있어야 중급반으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저는 웬일인지 남들보다 빨리 승급이 되었습니다. 저를 맡았던 초급반 선생님이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중급반에서 순서는 맨 뒤입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기술은 좋지만 체력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 속에서는 아줌마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원피스 수영복을 꽉 끼게 입은, 아줌마들의 얼굴이 달떠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생기를 찾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귀를 쫑긋거렸습니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가 감지되었습니다. 앞 사람의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여자가 뒤돌아보며 인상을 썼습니다. 신경쓰지 않고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저희 반에 새로 수영 선생님이 왔다고 했습니다. 멸치대가리처럼 비쩍 곯은 수영 강사는 고향인 강릉으로 내려가고, 그의 대학 후배가 들어왔다고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휘슬이 울렸습니다. 아줌마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저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 쪽으로 걸어오는 수영 강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성난 숫사자처럼 발달한 어깨와, 이제 막 발이 돋아난 인어처럼 매끈한 다리, 지퍼를 반쯤 내린 검은색 전신 수영복과 대조적으로 하얀 피부, 짙은 눈썹과 서늘한 눈빛. 왼쪽 눈 밑에 위치한 검은 점이, 얼굴의 우수를 더욱 깊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키는 180 정도 되었을까요. 쓰고 있던 하얀색 수영 모자를 벗자,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귀 밑까지 내려왔습니다. 어쩌면 향기가 나는 듯도 했습니다. 익숙한 수영장의 소독약 대신, 프리지아 꽃잎이라도 물 위에 띄운 것처럼요. 수영 선생님이 중급반 수강생들을 향해, 특히 제 쪽을 보고 웃으며 인사하더군요. 차가운 얼음 양동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전신에 닭살이 돋았습니다. 선생님이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목록을 들고 수강생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수영장이라 그런지 소리가 울려서 잘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홍정희 님, 하고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저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저를 보는 선생님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습니다. 교과서에서 신물이 나도록 외웠던 어떤 시처럼, 그 순간만은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회사에서는 가지 않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습니다. 평소에는 길어 보이던 레인이 유난히 짧은 듯했습니다. 자세를 가르쳐 줄 때는 선생님이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늘 익숙했던 동물원을 떠나 새로운 바다로 항해하는 돌고래처럼, 힘차고 도전적인 몸짓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반대편 레인으로 갔다가 얼른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자유형을 할 때는 선생님이 자세를 잡아 주었는데, 바게뜨빵의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스치자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뛰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실수가 잦아 민망하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미소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관대해 보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딘지 모르게 특별했습니다. 늘 다니던 길이었지만 뭔가가 달라진 듯했습니다. 좁고 어둡던 골목은 가로등 조명에 은은한 불빛을 드리웠고, 얼어붙은 도로는 달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습니다. 제가 거주하는 14평 원룸 빌라에는, 아침에 켜 놓고 나갔던 전깃불이 방 안을 환히 밝혔습니다. 그 모든 불빛들이, 낮보다 더 환한 제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안방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습니다. 빨간색 떡볶이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였죠. 평소처럼 ‘성범죄 전담반 시즌13’을 볼 수도 있었지만, 저는 늘 보던 드라마 대신 음악을 틀었습니다.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흘러나왔습니다. 엎드린 채로 노랫말을 흥얼거렸습니다. 노래에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당신, 우린 참사랑……. 참 좋은 가사더군요. ‘참사랑’이라는 단어에선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야 말았습니다.



*

“홍 대리는 도대체 밤에 집에서 뭐하나?”

어김없이 또 하루가 돌아왔습니다. 평소보다 더 눈꺼풀이 무거웠습니다. 수영을 너무 열심히 한 탓일까요. 못들은 척 책상을 정리했습니다. 다 치우지 않은 책상 위로 해묵은 먼지가 날렸습니다. 옆에 앉은 직원이 기침을 해댔습니다. 감기라도 걸린 것일까요. 흔한 증상이긴 하지만 건강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요.

사무실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늘 좋은 적이 없긴 하지만, 요즘은 더욱 찬바람이 날렸습니다. 곧 있을 계열사 분리 작업 때문인지, 회사는 한창 바빴습니다. 회장 아들의 상속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꼼수라고는 하지만, 그 때문에 또 구조조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팀장과 1:1 면담이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는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때마침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오랜만에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책상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한, 저는 안전합니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이거 환불해 줘.”

전화기 너머 고객은 시작부터 반말이었습니다. 사이트에서 구입한 어린이용 전집을, 막상 아이들이 읽지 않으니 반품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회원 정보를 조회해 보니, 제품을 구입한 지 세 달도 넘은 것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매뉴얼대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회사의 규정을 앵무새처럼 읊었습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구입한 지 14일이 지나면 전액 환불이 불가합니다. 화가 난 고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책임자를 바꾸라는 소리와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호통이 전화선을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을 되뇌며, 그저 견디는 수밖에요. 저는 쏟아지는 말의 홍수 속에서, 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객의 화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지요. 빈 워드프로세서 화면이 까만 글자들로 뒤덮이고, 저는 스티브 잡스처럼 목폴라 티를 입고 글자 사이를 헤엄쳤습니다. 글자들이 파도를 이루었습니다. 누워 있던 글자들이 거대한 빌딩처럼 일어서자, 저는 건물주가 되어 임대료를 꼬박꼬박 받아 먹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습니다.

“홍 대리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나?”

팀장님의 물음에 잠시 수영 선생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후의 면담은 회의실에서 이뤄졌습니다. 사자 앞에서 초원의 풀을 뜯는 기린처럼, 팀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차례대로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제 순서는 가장 마지막이었습니다. 노크를 한 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팀장님은 온몸으로 땀을 분출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직원들의 이름과 정보가 적혀 있을 체크 리스트를 들고요. 툭 튀어나온 두 눈이 피로한 듯 충혈된 상태였습니다. 술이라도 진탕 마신 것처럼 쉰 목소리가 팀장님의 성대를 긁었습니다.

“소문 들었지?”

질문은 스트라이크로 치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목을 가다듬은 팀장님이 사설을 늘어 놓았습니다.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 위험을 극복하려는 사측의 노력, 불가피, 공정, 합리적 같은 단어들이 흘러 나왔습니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회장 아들의 상속세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지루함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봤습니다.

“상속세는 어떻게 된 거예요?”

물고 있던 막대사탕에 이빨이라도 들러붙은 것처럼, 팀장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기껏 한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말만 팀장님은 반복했습니다. 보는 눈이 많다고도요. 저는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팀장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이 끝날 때마다 ‘넵’ 하고 크게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고요.

택배 기사의 홍정희 씨 택배요, 하는 외침은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올 때 들려왔습니다. 얼리어답터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팀장님의 시야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택배 좀 그만 시키고…….”

팀장님의 한숨에, 저도 목 꺾인 기린처럼 고개를 숙였습니다.



낮 동안의 굴욕은 밤의 취미 생활로 상쇄되었습니다. 저는 물 속을 유영하는 한 마리 금붕어처럼 수영장을 떠 다녔습니다. 수영은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찬 운동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닮았다고나 할까요. 두 손을 뻗고 배영 발차기를 하면, 습기로 인해 대롱대롱 달린 천장의 물방울들을 볼 수 있지요. 저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는 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들이요.

참을성 없는 수강생 몇 명이 빨리 가라며 성을 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열대음료라도 마시는 듯한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가르침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는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종일관 눈을 마주쳤습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선생님이 제 시선을 피하더군요. 하지만 평영 자세를 바로잡아 준다며 제 발바닥을 만지는 순간, 저는 그의 진심 어린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와락, 선생님에게 안기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저는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수영장에서 선생님이 물기 묻은 출석부를 넘기며 이름을 불렀을 때, 저는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넵’하고 대답했습니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밤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대에 누워 팝콘을 집어먹고 있었습니다. 집을 벗어나지 않은 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수영 강습이 없는 날은 이렇게 이불 속에서 TV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한창 아이러브스쿨 같은 게 유행했을 때는 동창회니 뭐니 나가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군중 속의 고독보다는 혼자인 게 차라리 나았으니까요.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을 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TV 속 가상의 인물들이 저의 밤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성범죄 전담반 시즌13’ 2편이 방영되는 중이었습니다. 성폭행을 주장하는 여자와 부인하는 남자, NYPD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혈액 샘플을 조사하자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고 있었죠. 팝콘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손에 묻은 부스러기들이 이불 위로 눈처럼 떨어지는 중이었습니다.

날카로운 핸드폰 기본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의아했습니다. 평소에는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였으니까요. 기껏 해야 낮 시간대에 택배 호출이나 스팸 전화가 전부였는데요. 핸드폰 벨소리 설정도 해 놓지 않을 정도니 말 다 했죠. 게다가 전화는 발신자 제한 표시로 걸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상쩍은 기운을 느끼며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홍정희 씨?”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TV 속 가상 인물이 아닌, 실제 사람의 목소리가요. 날카로운 전화벨과는 대조적으로, 바리톤처럼 굵은 저음이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목소리에도 얼굴이 있다면, 한창 시절의 정우성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소하지만 그리운 목소리였습니다. 마치 떠나 온 고향에서 나지막이 저를 부르는 듯한, 아무리 멀어져도 절대 잊혀지지 않을 느낌이요. 저는 벽시계를 보았습니다. 시계는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전화 속 남자는 하아, 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누구세요?”

“이름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왜 전화하셨나요?”

“단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또 하아, 하는 한숨과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TV 볼륨을 줄였습니다. 방탄복을 입고 총을 든 NYPD들이 입을 벙긋거렸습니다. 쫓기던 범인의 최후에는 언제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지요. 경찰에 붙잡힌 범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저도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갑작스레 방문한 반가운 손님처럼, 낯선 남자에게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를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남자가 반문했습니다. 남자의 말대로,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물리적 공간을 넘어 서로가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니까요. 강물이 도도한 물결을 만나 바다로 향하듯이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저는 이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참 좋으시군요.”

마치 꾀꼬리처럼요, 남자가 말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이 남자는 저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통화는 길지 않았습니다. 또 전화해도 될까요, 남자의 물음에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화기 저 쪽에선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테지만요. 전화가 끊겼습니다. TV 볼륨을 높였습니다. 광고가 흘러 나왔습니다. 조건 없이 수익을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었죠. 조금 전의 대화가 제 호르몬을 촉진시켰습니다. 온몸이 화산에 데인 것처럼 달아올라, 저는 이리저리 몸을 꼬아야 했습니다.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핸드폰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했습니다. 안치환의 ‘내가 만일’이란 노래가 스피커를 타고 부드럽게 퍼졌습니다.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저는 뜨거워진 핸드폰에 볼을 부볐습니다. 새벽이 깊었습니다. 아침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새로운 사건을 의뢰 받은 NYPD처럼, 저는 며칠을 이 미스터리한 일에 대해 골몰했습니다. 저는 사적으로 아는 남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회사와 집만 반복해서 다녔고, 사무실엔 팀장님 외엔 다 여직원이었으며, (얼리어답터이긴 하지만) SNS도 그만둔 지 오래 됐고, 별다른 취미 생활도 없었습니다. 마케팅 동의에 체크도 하지 않고 길거리 설문조사도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에, 개인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도 낮았습니다.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남자,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새벽의 통화로 피곤해진 저는 잠시 화장실에서 눈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회의실 문을 잠그거나 복도에 앉아 조는 것은 위험 부담이 높았습니다. 동료 직원들에게 들킬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혹시나 팀장님에게 걸린다면 또 폭풍 잔소리를 피해갈 수 없겠죠. 가장 무난한 장소는 역시 화장실입니다. 직원들을 위한 휴게 공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요.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화장실 벽에 붙은 매너 벨을 눌렀습니다. 폭포수를 맞는 꾀꼬리 같은 벨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바깥에서 오해하지 않도록 소변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저는 화장실 벽에 지친 몸을 기댔습니다. 변기에 닿는 물소리가 조용한 화장실을 울렸습니다. 똑똑똑, 마치 수영장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요.

수영장. 물 묻은 출석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뒤이어 홍정희 씨, 하고 부르던 낮은 목소리도요. 넓은 어깨를 다 구겨넣지 못해 전신 수영복을 걸치듯이 입고 있던, 평영 할 때 발바닥을 잡아 주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프리지아 향기처럼 사방을 싱그럽게 만들어 주던, 수영 선생님. 그제서야 우수에 젖은 선생님의 두 눈이 왜 제 눈을 피했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화장실 문을 박차듯이 열고 나왔습니다. 길게 선 줄이 제 모습을 흘겨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찬물을 두 손에 가득 받아 세수를 했습니다. 동면하고 있던 온몸의 세포들이 깨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모니터를 켜고 빈 화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습니다. 써야 할 문장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무료하지 않았습니다. 눈을 깜박거렸습니다. 워드프로세서의 하얀 바탕이 파란 수영장 물로 뒤덮였습니다. 25M의 수영장 레인 위로 버들잎이 드리워졌습니다. 저는 꾀꼬리가 되어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삣 삐요코 삐요,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 멀리, 출석부를 손에 든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 석상처럼 넓고 반듯한 어깨에 내려 앉았습니다.

그 날 저녁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백화점 스포츠 코너에 들러 새 수영복을 샀습니다. 순수함을 강조하는 순백색 바탕에, 밤의 장미처럼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것이었죠. 10M 높이에서 첫 다이빙을 시도하는 선수처럼, 수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쩔 수 없이 떨렸습니다. 누가 눈치챌까 주위를 둘러볼 정도였으니까요. 시원스레 등이 파진 제 수영복을 보고 수강생들이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자 수강생들은 뇌쇄적인 제 모습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고, 여자들은 입을 삐죽거렸습니다. 글래머러스한 제 몸매에 질투라도 하는 것일까요. 저는 준비 운동을 하며 두근대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나타났습니다. 아줌마들이 우우, 원숭이처럼 환호하며 선생님을 반겼습니다. 언제 한 번 같이 회식을 하자는 뚱뚱한 여자, 집에 남아돈다며 상품권을 대령하겠다는 꺽다리, 영법을 가르쳐 달라며 팔을 잡아끄는 어린 학생……. 제 눈에는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이미 승부가 나 버린 게임처럼 싱거운 일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저 사이엔 누구도 알지 못할 비밀이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묘하게 웃고 있는 제가 이상한지, 선생님이 제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눈을 찡긋, 해 보였습니다. 비밀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자신을 밝혀 주기를 기다리기로 말이지요. 매끈한 윤곽을 가진 선생님의 얼굴이 햇사과처럼 붉어졌습니다.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나요?”

“비밀이 있는 게, 때로는 더 짜릿하지 않나요?”

“당신을 더 알고 싶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요. 속으로만 외칠 뿐, 남자에게 직접 털어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대화는 즐거웠습니다. 텅 비어 있던 방 안이, 헬륨가스를 가득 채운 하트 모양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는 느낌이었죠. 남자는 이것저것을 질문하고, 또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에서부터 입고 있는 속옷 색깔에 이르기까지 주제는 다양했죠. 밤이 깊을수록 남자의 목소리는 꿀 한 사발을 들이켠 것처럼 끈적해졌습니다.

남자와의 전화 통화를 마친 밤, 저는 비로소 꿈다운 꿈을 꿨습니다. 저는 20대 한창 나이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주름 하나 없는 제 모습이 신기해, 거울을 계속 들여다보았죠. 봄날의 넓은 캠퍼스가 아름다웠습니다. 호수에는 백조와 청둥오리들이 헤엄쳐 다녔고, 길 양옆으로 들어선 나뭇가지에선 벚꽃이 흩날렸습니다. 드라마틱한 풍경이었습니다.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을 연기하듯이, 저는 샤랄라한 원피스에 머리띠를 하고 캠퍼스를 걸었습니다. 꽃피지 못한 기획안 따위 까맣게 잊은 채로 말이죠. 저 쪽에서부터 키 큰 실루엣이 걸어왔습니다. 백마를 탄 저만의 히어로, 제목 없는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남자였습니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림자만으로도 잘 생김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한창 시절의 정우성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요. 벚꽃나무 아래서 우리는 키스를 했습니다. 입술에 머금은 촉촉한 수분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지요.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제 아랫도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은 즐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제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죠. 현실이 마법처럼 짠, 하고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사 생활은 여전히 지루했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쓸쓸했죠. 가끔씩 걸려오는 고객의 전화는 제 신경을 온통 할퀴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저는 그 모든 일에 초연해져 갔습니다. 텅 빈 모니터는 상상의 캔버스가 되었고, 팀장님의 잔소리는 달콤한 자장가로 변했습니다. 밤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회사에서 조는 날이 많아졌지만, 모자란 잠은 화장실에서 충전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습니다. 진한 카페인이 든 커피라도 마신 것처럼, 밤만 되면 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남자는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쯤 되면 정체를 고백할 만도 하건만, 남자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큰 소리로 비밀을 외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저는 가까스로 참았습니다. 남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그런 게 여자의 덕목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적이고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때로 은밀한 농담마저 어느 철학자의 위대한 사유처럼 느껴질 만큼이요.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에 관한 남자의 소회는, 엄동설한에 눈밭을 헤치고 나온 산딸기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밤에 피어나는 장미처럼 저는 더욱 더 젊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하다 거울을 보게 되면, 볼이 발그레한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노골적인 구애의 말짓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끄러우면서도 완전히 튕기지는 않았는데, 눈을 감으면 수영장을 가로지르는 선생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장벽을 걷어치우고 진실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날, 저는 그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큰소리로 인사하며 출근했습니다. 사무실 분위기가 묘했습니다. 한차례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유난히 조용했으니까요. 평소에는 믹스 커피를 손에 쥐고 재잘거리던 직원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인사를 받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것처럼 굴던 팀장님도 얌전했습니다. 사무실 공기는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관리실에서 난방을 틀어주지 않은 것일까요. 아무리 코트를 껴 입어도 따뜻해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오전 9시가 넘어 있었고,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홍 대리, 나 좀 보지.”

팀장님의 호출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자마자 코트도 벗지 못한 채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의아했습니다.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팀장님을 따라 회의실로 향할 때, 저는 자리에 앉아 울고 있는 양서희 사원을 보았습니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라도 한 것일까요. 눈치 없이 울어대는 모습에 직원들이 난처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도, 회의실로 걸어가는 내내 뒷덜미가 서늘했습니다.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말하기 곤란할 때 시작하는 팀장님의 어투였습니다. 저는 ‘넵’ 하고 대답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습니다. 팀장님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 위험을 극복하려는 사측의 노력, 불가피, 공정, 합리적 같은 단어들이 흘러 나왔습니다. 저는 꿈을 꾸듯이 한 귀로 팀장님의 말씀을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붙은 정리해고라는 단어.

“알아들었지?”

반사적으로 ‘넵’이라는 대답이 튀어나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습니다.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팀장님이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회장 아들의 상속세며 계열사 분리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번처럼, 물어도 답은 해 주지 않겠지요. 저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팀장님이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인데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40대의 커리어우먼으로 인생을 잘 설계하고, 일과 취미 생활을 병행하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이제는 비밀스러운 연애 한 번 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 너무 원망하지 말고.”

팀장님이 제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내 목구멍도 포도청이야,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팀장님의 얼굴이 상한 가자미처럼 보여, 순간 안쓰러울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 목구멍은요, 임파선염 때문에 늘 화난 복어처럼 부어 있는 제 목구멍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화가 끝났습니다. 저는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이름이 불린 사람들이 차례대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가지치기 당한 병든 나뭇가지처럼, 사람들이 조용히 짐을 싸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퇴근 시간은 여섯 시였지만 아무도 상관하는 직원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양 사원은 살아남았습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눈을 찡긋, 하며 비위를 맞추는 것밖에 없었는데도요. 양 사원의 눈동자는 토끼처럼 빨개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 울어준 것이었을까요. 대단한 박애주의자라도 된 것처럼. 그녀가 가진 것은 무엇이고, 제가 갖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관용? 공감능력? 눈치? 커피 타는 실력?

젊음. 무의식중에 떠오른 그 단어에, 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그건 너무 잔인했습니다. 그건 다시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퇴근 후 저는 수영장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일까, 선생님은 보이지 않고 수강생들만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힘은 없었습니다. 오전의 일이 아직도 저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내버려둔 채로, 저는 레인의 출발점 위에 힘없이 서 있었습니다.

저녁 8시 정각이 되자 어김없이 휘슬이 울렸습니다. 어서 빨리 선생님이 나타나 저를 위로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복잡한 방정식 같은 저의 처지에 대해, 선생님이라면 해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자 탈의실 문이 열렸습니다. 선생님은 보이지 않고, 마른 북어처럼 비쩍 곯은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휘슬은 그의 입에 물려져 있었습니다. 4/4박자로 울리는 휘슬에 맞춰, 올챙이 같은 배가 규칙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습니다. 벌떼처럼 웅웅거리던 아줌마들이 체념한 듯 준비 체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앞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여자가 인상을 쓰며 뒤돌아봤습니다.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한동안 못나오겠다고 했대요.”

그러고는 끝입니다. 여자는 고개를 홱, 돌렸습니다. 저는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수영장 천장을 올려다 봤습니다.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귀에 밀어를 속삭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다니요.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요. 발버둥칠수록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것만 같았습니다. 밀당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처사였습니다. 저는 준비 운동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질서정연한 휘슬 소리에 따라, 손과 발이 제 의지와 무관하게 허우적거렸습니다.

마른 북어 같은 남자가 출석을 불렀습니다. 그러더니 몇 명을 따로 불러냈습니다.

“박혜영 님, 홍정희 님, 이슬기 님…….

이름이 불린 사람들이 한쪽으로 섰습니다. 명명 여부에 따라 자연스럽게 경계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절반으로 나눠졌습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이 제 머리에 닿았습니다. 죽비라도 맞은 것처럼 온신경이 깨어났습니다. 저는 문득, 학창 시절에 외웠던 시를 떠올렸습니다. 그가 나에게로 와서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이 분들은 다음 달부터 상급반으로 올라갑니다.”

나는 상급반이 되었다, 가 아니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수영 실력도 늘지 않았는데 상급반이라니요. 절반의 수강생들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성난 목소리들이 수영장 공간을 타고 메아리처럼 울렸습니다. 저도 항의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명목은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올라오는 인원 때문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저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맡지 않은 상급반 따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결정된 일은 되돌릴 수 없고, 그 결과 파생된 현실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도하게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모두가 같은 결과에 불만을 표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부류도 있고, 오히려 상급반이 되었다며 좋아하는 부류도 있으니까요.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수강생들이 자유형을 시작했고, 나머지 수강생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간 대신 영혼을 집에 두고 온 토끼처럼, 저도 그들을 따라 수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안경을 너무 헐렁하게 낀 것인지, 눈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따가웠습니다. 저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눈물이 소독약 때문인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시련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전화가 끊긴 것은 그 날부터였습니다.

저는 다시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고, ‘성범죄 전담반 시즌14’를 시청했습니다. 마리스카 하지테이는 왜 이렇게 멋진지, TV 속에서 그가 총을 꺼내 들 때마다 범죄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죠. 하지만 더 이상 제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끔씩 그 때의 일이 꿈이었나, 생각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TV채널이 끝나고 안치환의 노래가 마지막 트랙에서 멈추어도, 정우성을 닮았던 그 목소리만은 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짐을 찾으러 나오라는 전화는 며칠 뒤에 걸려왔습니다. 양서희 사원이었습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목소리가 전화선 바깥에서 주저주저했습니다. 미처 가져오지 못했던 물건들이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떠난 사람의 물건들은 누군가 치워주지 않는 한,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화장도 꼼꼼히 하고, 옷도 차려 입기로 했습니다. 듬성듬성한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고, 각질이 일어나 건조한 입술에 컬러 립밤을 발랐습니다. 옷장에 모셔 두기만 했던 캐시미어 코트를 걸쳤습니다. 늘 신던 패딩 부츠 대신 검정색 단화를 챙겨 신었습니다. 현관을 나섰습니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습니다.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은 탓일까요. 평소보다 따뜻하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체감 온도는 훨씬 낮은 것 같았습니다.

아침 10시의 지하철은 한산했고, 강남 테헤란로는 여전히 복잡했습니다. 저는 10여분을 걸어 회사 앞에 도착했습니다. 15층 높이의 회색 빌딩이, 비죽 솟은 다른 빌딩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습니다. 안내 데스크에 들러 목적을 얘기하고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사무실이 위치한 9층을 눌렀습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낯설었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았습니다. 눈가에는 주름이 선명하게 졌고, 짧은 목에 살이 붙었습니다. 두텁게 바른 파운데이션이 주름 결을 따라 하얀 계곡을 이뤘습니다. 핸드백에서 파우더 팩트를 꺼내 화장을 고쳤습니다. 입가에 생긴 팔자 주름이, 지나버린 15년의 세월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일했던 곳입니다. 매일 다니던 사무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습니다. 회로도처럼 빈틈없이 차 있던 사무실에 군데군데 빈 책상이 보였기 때문일까요. 저와 눈이 마주친 직원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들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것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학창 시절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천장이 막힌 사무실은 하늘을 볼 수 없기에, 가슴 속에 부끄러움이 쌓여가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 자리였던 자리로 다가갔습니다.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늘 사무실에 붙어 있던 팀장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와 주겠다며 양 사원이 다가왔지만 사양했습니다. 돌려주지 않은 3천원처럼, 갚을 길 없는 도움을 더 이상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택배박스 안에 짐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근속 년수에 비해 짐은 단촐했습니다. 날짜 지난 달력과 더 이상 읽지 않을 자기계발서, 중간 정도 쓴 제트스트림 펜과 출근길에 샘플로 받았던 마스크팩, 시간이 지나 고물이 된 스마트밴드 등. 처치곤란한 그것들은 책상 위에 주인도 없이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식당에서 슬쩍 했던 물수건을 서랍에서 꺼냈습니다. 더러워진 책상을 습관처럼 닦으려다 관두기로 했습니다. 모니터와 PC가 사라진 휑한 책상에 먼지가 피어올랐습니다. 앉은 자리가 움푹 파인 사무용 의자는 새 주인을 기다리는 듯해 보였습니다. 저 빈 의자엔 누가 앉게 될까요. 아니 어쩌면 의자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폐기 처분될지도 모릅니다. 의자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든, 이제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복부를 꽉 조이는 스커트를 입었기 때문일까요,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인 현상일까요. 저는 짐을 싸다 말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평소 찜해 두었던 두 번째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습니다.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처럼 거대한 덩어리가, 대장에서부터 힘겨운 여정을 떠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꽤 고상했습니다. 저는 습관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을 나름대로 견디던, 회사원이었던 며칠 전의 저처럼요. 엉덩이를 힘겹게 감싼 변기는 푹신한 침대가 되었고, 지루한 클래식 음악은 제가 좋아하는 안치환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자유, 자유

땀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저는 쪼그려앉은 채로 노랫말을 흥얼거렸습니다. 김남주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는, 노동이 자유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노랫말대로라면 저는 자유인인 것일까요, 아닐까요. 일하던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자유롭지 않은가요. 억지로 출근할 필요도 없고 거짓으로 상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습니다.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고객의 전화도 없죠.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이 휴지로 닦지 않은 엉덩이처럼 찝찝한 것일까요. 뻐꾸기에겐 둥지가 필요하고 배출 직전의 엉덩이엔 변기가 필요하듯이, 40대의 여성에게는 번듯한 직장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죽는 게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듯이, 회사원도 입사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퇴사하게 되지요. 남들이 겪을 퇴사를 좀 더 일찍 겪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얼리어답터의 특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한때, 잘 나가던 웹기획자였으니까요. 쉽사리 나오지 않는 덩어리를 기다리며, 저는 거짓말 같은 지금의 현실을 곰곰이 곱씹었습니다.

화장실로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오래 된 습관대로 숨을 죽였습니다. 양 사원이었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발랄하고 어린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분위기 다 흐리고, 재수없어 죽겠어.”

험한 말이라면 질색할 것 같은 양 사원의 입에서 변태, 최악, 본때를 보여줘야,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습니다. 역시나 박애주의자의 이면에는 이렇게 심술궂은 심보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저에 대한 험담인지도 모릅니다. 3천원을 돌려주지 않은 데 대한 앙심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인지도요. 양 사원의 고상하지 않은 어휘 선택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렇다니까. 택배 기사가 고객정보를 빼돌려서…….”

양 사원의 수다가 이어졌습니다. 저는 진실을 밝히려는 NYPD처럼 바깥을 향해 귀를 쫑긋거렸습니다. 이야기는 꿈에도 생각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평범하던 택배 기사가 고객 정보를 몰래 빼내어, 밤마다 여직원들에게 전화를 해 댔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무슨 카사노바라도 된 것처럼, 지속적으로 애인인 척 굴었다고요. 게다가 여자 화장실에서 몰카까지 발견되어, 사무실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수사 과정에서 과거 전력까지 드러난 택배 기사는 이례적으로 구속 수감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택배 기사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했지만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홍정희 씨 택배요, 하며 다가오던 길쭉한 키에 수세미처럼 짧은 머리,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반반이던 째진 눈 등이 희미하게 떠올랐을 뿐입니다.

제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안녕이란 말도 없이 떠난 수영 선생님일까요. 아니면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킨 택배 기사였을까요. 저도 택배 기사의 통화 리스트에 들어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변태였을까요.

아니면, 그도 외로웠을까요.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전화는 걸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댕, 하고 묵직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습니다. 기나긴 여정을 끝낸 덩어리가 변기 안쪽에 무사히 착지했습니다. 황급히 매너 벨을 눌렀습니다. 삣 삐요코 삐요, 꾀꼬리 같은 벨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통화를 하던 양 사원이 말을 멈췄습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저는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양 사원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이제 막 지는 저녁 노을처럼, 참 예뻤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애써 돋보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빛나는 청춘이 거기 있었습니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는 양 사원에게 마지막으로 눈을 찡긋, 해 보였습니다.

택배 상자에 대충 싼 짐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짐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습니다. 양 사원이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피차 인사는 생략했습니다. 인사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자유인에게는 있는 것이니까요. 팀장님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추위를 타는 두꺼비처럼 어디 가서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일까요. 띵동,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9층에 와서 섰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첫 스텝을 밟는 발레리나처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언제나 그런 꿈을 꿨습니다. 무대 위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도약하는 꿈, 무리를 선도하는 새처럼 비상하는 꿈을요.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1층을 향해 하강했습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직원들이, 떠나는 제 모습을 마지막까지 주시했습니다.

강남 테헤란로는 여전히 복잡하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은 황량했습니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람이 폐부를 찔러, 저는 걸어가는 내내 옷깃을 여몄습니다. 잎을 털어버린 은행나무가 앙상하게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변변한 옷도 없이 겨울을 나는 나무는 추워 보였습니다. 저는 잠시 서서, 나무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차가웠습니다. 고개를 들어 은행나무를 바라봤습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도 없이요. 저는 두 손을 동그랗게 만들어 나무를 안았습니다. 제 체온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랐습니다. 말라버린 나뭇가지에도 언젠가 새순이 피게 될까요? 한낮의 어딘가, 새들도 떠나버린 추운 겨울에 꾀꼬리는 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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