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일전에 독서그룹에서 김승옥님의 ‘무진기행’ 읽기로 했다. 책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들을 둘러봤으나 결국 권수를 채우지 못하고 말았다. 잔뜩 ‘무진기행’ 에 들떠있던 아줌마 학생들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이 들었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더라면 인원수에 맞도록 책 권수를 구해 올 수도 있었을 터인데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한 몫을 하는 통에....

그러나 몇 해 전에 읽었던 ‘무진기행’에 대한 남다른 나만의 감동을 그대로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 게으름과 나태함이 오히려 나의 위로함이 되었다. 시내 세 군데의 서점을 둘러보면서 점원들에게 “무진기행 좀 찾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할 때는 마치 내 자신이 ‘무진’이라는 곳을 마치 여행이라도 하고 온 듯, 그래서 무진의 홍보대사가 된 듯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점원들은 “무진기행이요?”라고 되묻고서는 서점 진열대를 돌아보고서는 “없는데요” 아니면 “한 권 뿐인데요”라는 간단한 한 마디의 답으로 나의 ‘무진기행’에 대한 설렘에 도전을 해 왔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무진’에 대한 의미는 더 넓게 내 가슴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사실 김승옥님의 ‘무진기행’이라는 단편소설에서 나는 ‘안개’에 매력을 느꼈다. 안개가 주는 매력이 무엇인지를 보고 느끼게 해 주었던 책이다. 그래서 무진기행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는 안개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안개조차도 명산물도 볼 수 있었던 작가의 혜안(慧眼)이 마냥 존경스럽다. 안개는 무의미와 혼미의 대명사로 사용되어져 왔었고, 덧없음과 짧음에 대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던 단어였기 때문에, 그 시각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이 부분이 너무도 가슴에 와 닿았다. 그렇다. 안개는 해와 바람을 초청하는 존재다. 안개 자체로 사라지거나 상실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와 바람을 불러놓고 사라지는 존재다. 기꺼이 해와 바람 앞에 겸허해 할 줄 아는 존재다.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들 한다. 안개와 같은 혼미한 상태에 살아가고 있다고들 한다. 실직자들, 파산자들, 그리고 열악한 경제적인 상황들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하도록 만들어가고 있다. 모두가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오늘의 혼미함이 내일의 해와 바람을 초청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기다림이 되었으면 좋겠다. 보이는 것은 희뿌연 안개뿐인 것 같아도 안개는 우리의 삶의 내일을 보게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안개의 머무름은 잠깐이다. 그 자체로는 덧없는 존재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 우리에게 찾아온 삶의 어려움도, 역경도 오래 머물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동해바다에서 용틀임하며 떠오르는 해와 그리고 산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찾아들고 있다. 희뿌연 안개에만 몰입하거나 침잠해 들어가지 말고, 해와 바람을 바라볼 수 있는 기다림의 안목이 필요하다.

안개는 해와 바람을 불러놓고서는 사라진다. 잠깐 동안만 머무른다. 안개조차도 우리 삶에 명물이 되고, 안개조차도 우리 삶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해와 바람이 온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려니.

그러나 안개와 같은 혼미한 현실 속에서도 안개 건너편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해와 바람도 있음을 믿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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