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라역사과학관 관장 석우일 석굴암·첨성대·해시계 등 과학문화재 심층 접근

석우일 관장

"과거의 역사문화 속에는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도 있으며 내일을 살아 갈 미래의 문화도 함께 내재돼 있습니다."

해 새아침 7시 27분에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동해의 햇살이 대불의 이마에 박힌 백호에 와 닿는다. 이 순간 캄캄한 어둠으로 짙게 깔린 토함산천이 그 정상으로부터 아래로 점점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40개의 석조로 가득 찬 미명의 석굴은 서서히 광명의 석굴로 극미(極美)를 연출한다.

"평생을 자신의 전부를 걸고 신라역사과학관을 만들어 경주민속공예촌 안에 세운 석우일(사진) 관장.

신라역사과학관 외부.

석 관장은 지난 85년 전통과학기술사 박물관 하나 없는 황량한 이 땅에 나무 심는 맘으로 박물관을 개관하고자 했다. 1986년 경주 민속 공예촌은 17개 업체로 개촌 되고도 마지막 한 부지가 비어있었다.

"바로 여기에 말뚝을 박고 역사미술관 하나 지을 것이다." 석관장은 마지막 남은 경지 1천여평에 86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500여평의 건물이 들어설 위치에 자그마치 대형트럭으로 수백 대분의 흙을 파내야만 했다. 그 작업은 무모하고 어리석을 만치 아슬아슬한 고역이었다. 그리고 1988년 10월 , 경주 민속공예촌에 신라역사과학관 개관과 함께 '석굴암의 신비, 그 실체는 무엇인가?' 모형 8기를 만들어 '학계의 오랜 쟁점을 밝힌다'란 현수막을 걸고 전시를 시작했다.

신라역사과학관 내부.

이 전시는 관람자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석굴암을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쉽고, 재미있게,즐기며 관람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신라역사과학관이 담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는 150만부 이상이 팔렸다. 답사기가 팔려 나가는 것과 비례해 방학을 맞은 선생님들의 답사도 늘어났고 수학여행 학교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신라역사과학관이 교육의 장으로 알려지자 각 방송과 신문, 잡지사에 연달아 특집으로 나갔다. 이에 힘을 얻은 석관장은 과학기술부에 신라역사과학관의 과학관 허가를 신청했고 과학기술부장관으로 부터 육성법에 의해 입장권도 받을 수있는 승인통지를 받았다.

"건물을 짓는 2년여의 기간에 석굴암 모형전을 위한 문헌자료 수집 등의 일련의 준비 작업이 끝나고 지하 120평에 테이프를 끊을 날이 하루 앞에 다가왔지요"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MBC '출발 새아침'팀이 현장 소개를 위한 야간 촬영을 했고, 당일 아침 20분가량 전국 전파를 탔다. 전파는 삽시간에 거센 바람을 일으키듯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신라역사과학관이 드디어 일본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NHK가 1시간 분량의 '석불에 깃든 미소, 석굴암'을 7시간에 걸쳐 촬영 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고무되고 분주한 상황 속에서도 석관장은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운영하던 서울의 목불상 수출 공방이 중국의 저 품질, 저 가격에 밀려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25년간 생계수단이었던 수출 공방마저 "밥이라도 먹으라"고 공장장에게 넘겼다. 경주 일에 본격적으로 매달려야 할 운명적 삶이 다가오고 있었고 밑천이 없으니 공장 대지라도 팔아야 했다. 평생을 절약해 한강변에 마련한 대지 120평은 공예촌 입주금과 석굴 모형전의 비용으로 이미 날려 버렸다. 또 다시 시작한 '하늘에는 천문도 땅에는 왕경도'란 핵심 문화 콘텐츠는 무엇으로 완성할까?

이미 주물계약으로 건넨 '종은 때린 자의 아픈만큼 소리 나느니'란 상원사 동종 1:1 복원과 '신라의 누각'이란 물시계 연구 용역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 저질러 버린 이런저런 주문 계약 조건에 어쩔 수 없이 서울 공장과 공장 대지 340평도 팔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목졸림으로 헐떡거렸다. 그 대지를 팔아 이미 담보하여 대출받은 은행돈 갚고 나머지 돈은 아내 몰래 경주로 가져왔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내도 자식도 버린 비정한 남자" 라 말 안해도 그 고통은 밤마다 가위눌림으로 자신을 괴롭혔다.

이 때부터 가족은 서울에 자신은 홀로 경주에 살고 있다고 한다. 48살에 저질러 10년 넘게 버티어 온 그를 두고 주위에선 무모한 간 큰 남자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아픔은 가족들이 외면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서운함도 세월과 함께 서서히 녹아들었다.

문화 사업도 사업이다. 감동을 주는 것에는 사람이 모인다는 1차 경험을 이미 하지 않았던가. 어렵게 2차 전시도 마무리 했다.

"과거의 역사문화 속에는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도 있으며 내일을 살아 갈 미래의 문화도 함께 내재돼 있습니다."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과학문화재 속에도 그 시대의 하이테크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을 캐내어 갈고 닦는 일에는 무관심했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멸시하고 천대하지는 않았는가?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어두운 우리들의 눈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는 석우일관장.

봄·가을이면 전국 1천500여개교가 수학여행지로 이곳을 찾는다. 선생님의 설명과 아이들의 토론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밖에 나와서는 심층적인 질의 응답이 이루지고 있었다.

"소풍철이나 주말이면 100~200m씩 줄이 늘어설 때가 많습니다. 고대 과학기술서에 관심이 많은 부분들이지요."

우리 세대, 특히 경주시에서는 신라역사과학관이 불국사나 석굴암 에 식상한 외지인들이 이곳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경주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경주시는 알고 있을까?

"오늘의 한국 과학문화라는 나무가 내일에는 더 큰 나무가 되고 세계 속에서 특수성을 가진 울창한 가지와 잎으로 뻗어나기 위해선 과거의 역사과학문화란 토양의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통감해야 합니다."

경주를 찾아오는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민족 과학의 뿌리를 알리고 심어주는 교육현장. '해시계는 무엇을 표시하여 읽었을까.'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하이테크 문화라 여기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묵은 것이 되고 묵은 것은 또 골동품이돼 어차피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만 매달려 살고 있으면 우리라는 흔적도 어느사이에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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