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대가 초정 권창륜선생

"초정서예연구소는 후배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자신이 건립한 초정서예연구소가 서예교육·체험은 물론, 문방, 지필묵 전시 등 박물관과 유사한 기능이 될 것 같다는 대한민국 서예대가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64).

국내 처음으로 고향 예천에 서예연구소 겸 서예 체험관을 연 그는 현재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이자 한국전각학회 회장이며 중국 항저우(杭州)의 서화·전각 연구단체 서령인사(西 印社)의 명예이사이기도 하다.

서예가 초정 권창륜선생이 서예 저변확대와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한 초정서예연구소 전경

수령 100년 된 느티나무, '일품목'이 자신과 함께 할 주인을 만나기 위해 100년 세월을 묵묵히 기다려 온 곳, 경북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 초정은 고향인 이곳에서 오랜 준비끝에 연구소를 짓고 지난 6월 개관식을 가졌다. 얼른봐도 추사 김정희 글씨 세 점이 현판과 함께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그가 고향에 서예연구소를 세운 뜻은 "세예의 본질적 문제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연구(이론), 체험(실기), 감상(전시)기능을 고루 갖춘 이곳에서 한글, 한문, 사군자 실기와 서예 이론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서예의 전당을 만들고 싶어서다.

유교문화의 보고인 예천에서 후배들과 함께 한문·한글·사군자를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그는 자신의 연구소가 새로운 예술의 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고 있다. 서예이론 강의, 서예사 계론 등 대학에서 못하는 분야를 위탁받는, 교육기능도 병행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내비친다. 또 김숙자, 전필재로 이어지는 명성 드높은 영남 학파 유물을 발굴, 육필전시와 탁본 전시하는 등 이를 안동과 연계하면 값어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 강조한다.

초정 선생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5서를 두루 섭렵하고 사군자, 전각, 문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때문에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서예인들 중 초청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옛날 반가의 며느리가 서른 여섯가지 장을 담가 세밀하게 분류한 후 삭은 맛을 보듯 이미 5서를 두루 섭렵한 초정 권창륜의 글씨에는 잘 숙성된 장맛, 막걸리 같은 맛, 대한민국의 맛이 묻어난다.

한 술항아리에서 태어난 동질의 술이면서도 약주와 막걸리의 효능이 다르듯 한 사람의 글씨이면서도 5서가 모두 다른 그의 글씨는 때로는 기백이 넘치고 때로는 순응하듯 반귀족 반 반계급 지향의 성깔을 지녔다.

"붓글씨에는 인생의 진한 향기가 배어 있습니다 "

서예의 매력을 가장 알기쉽게 소개하는 초정은 어린시절 명심보감을 공부하면서 스승의 어깨너머로 글씨를 익혔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뒤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선생을 만나면서 정식 서예가의 길을 걷게 된다.

흰 구레나룻을 기른 이 예인은 "예술은 시대사상의 반증"이라 한다. 지금은 설치 비디오 ART등이 보편화되면서 붓을 안쓰기 때문에 동양화가 발전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 하는 초청. 그의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는 활화산 같다.

"서예를 단순 예술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글씨 한 자 한 자에는 그 사람의 희로애락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초정은 20세기 한국 서예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던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형제의 학맥을 계승한 서예가다. 6·25가 끝날 무렵 시골에서 병풍 글씨를 써 주는 노인들의 글씨를 어깨너머로 무작정 따라 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른들의 찬사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85세 생일 기념 작품전 응모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중앙대 국문학과 재학 때 우연히 접한 신문의 문화면 1단 기사가 그를 서단으로 불러들였다. 동방연서회가 마련한 서화 특별강습회.

그곳에서 마주친 두 스승이 김응현과 김충현으로 초정의 서예는 그렇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1960년 초.

그의 글씨를 본 두 스승은 혼부터 냈다. 왕희지(王羲之)나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에서 비롯된 정통 서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승들은 "좋은 책들을 많이 임모(臨摸·글씨를 보고 그대로 옮겨 씀)해야 속태를 벗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초정은 매일 아침 열 시부터 오후 여덟 시까지 책 한 권 분량을 쓰고 또 썼다. 그렇게 2~3년이 지난 후 스승들은 채본을 주었다. "이렇게 써 보아라" 한 줄씩 쓱쓱 쓴 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눈이 번쩍 띄었다"고 한다. 좋은 글씨를 보고 겉모습만 열심히 따라 섰는데 선생님들의 글씨에는 골격이 있었던 것이다. 글씨에도 뼈가 있다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권창륜은 경인에너지에 다니던 1977년 마침내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서예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의 선택이 옳았음을 지금도 말하는 초정. 인생살이란 모름지기 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서예관을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까? 그는 "서여기인(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이라고 했다.

"기가 충만한 이곳에서 서예 개인전, 그룹전, 국제전을 열어주고, 학술세미나등을 개최해 각국의 운필법 등을 소개하면 견문이 상당히넓어질 것"이라는 초정은 사경, 현판, 고승대덕의 비석, 탱화, 건축 등 어느 것 하나 산교육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앞으로 국내·국제 템플스테이도 할 계획이다. 지금도 20여명이 하루 일과대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40여명은 유치할 생각이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점은 예산이다.

현재 초정서예연구실에는 대작 40여점이 상설전시 되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작품을 걸어두고 싶지만 예산부족으로 인한 관리 부재가 가장 난점이다. 일주일이면 3일은 예천에서, 4일은 서울에서 후학을 지도하는데 관리인이 없어 늘 걱정이다.

청와대 춘추관과 연무대, 인수문과 운현궁의 현판도 쓴 그는 자기가 아는 만큼, 생긴 것만큼 나오는 게 글씨라고 한다. 서예도 궁극의 경지에 오르면 선과의 만남이라는 그는 마음으로 쓴 글씨는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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