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산토기 배용석 명장

보산토기 배용석 명장

자연은 그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심성에 자연스레 배는가 보다. 자연의 기운을 온 몸에 받은 듯 맑은 심성으로 흙을 주물러 평생을 변치않는 검은 보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

경주시 하동 201-7 보산토기 배용석(裵容石) 명장(69).

경주 민속공예촌에서 토기 전시장 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체험단이 오면 장경호, 불기, 토우, 영락잔, 오리 모양의 압형 토기, 서수형 토기 등 전국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천300여 종의 토기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경주시 하동 보산토기 공방 전경.

4대째 가업을 계승하며 토기를 만들어 온 배용석씨는 1991년 10월 대한민국 토기 명장으로 선정됐다.

민속공예촌 조성 당시부터 입주해 작업하면서 기마인물 토기만 53년째 만들고 있으며 그동안 그의 손을 거쳐간 제자도 100여명은 족히 된다. 그가 돌리는 물레는 골동품이 되고도 남을 세월을 그와 동고동락해 왔다.

신라가 이 땅에 뿌리 내린 후 1천년, 그리고 다시 1천년이 흘렀지만 경주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로움과 풍요로움을 전해주는 땅이다. 풍요로움의 대표적인 상징은 땅만 파도 나오는 신라 유적·유물과 그 파편들.

명장 배용석 선생 작품.

역사는 흘렀어도 땅 속에 묻힌 검은 진주 신라토기는 그때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단서를 바탕으로 원형을 복원면서 다시 새로운 1천년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평생을 신라토기, 그것도 기마인물상 재현에 바쳐온 배명장은 오래 전 신라토기의 원형을 되찾았다. 단순 재현이 아니라 신라의 역사를 다시 이어나갈 수 있는 단서를 해독한 것이다.

몇 천도의 불을 다스려 까마득한 과거를 찾아낸 배용석 명장은 세상이 자신에게 명장이라는 칭호를 주었지만 명예는 있을지언정 생활은 나아진게 없다고 한다. "어렵게 재현한 신라토기가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현하기도 어렵고 만드는 과정도 까다로워지키려는 사람들도 자꾸만 줄어드는 추세다.

불가마에 토기를 굽고있는 명장.

안동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를 꿈꾸던 그에게 도공의 길은 너무 쉽게 열렸다. 2대째 옹기 가업을 잇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15세에가마 주인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옹기만드는 법을 몰랐던 그는 집에있는 기술자들에게 옹기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본격적인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옹기 만드는 일이 제법 익숙해지자 흥미가 생겼다. 남들은 돈내고 배워야 하는데 여건이 그만큼 좋았다는 그는 "남들은 5년 넘게 걸려 익히는 옹기 만드는 법을 3년만에 터득,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토기와의 운명을 정해준 계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열 아홉살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일을 못하게 되자 소일거리로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았고 그때 본 신라토기에 반했다.

"쇠로 만든 것인 줄 알았는데 흙으로 빚은 토기라니" 믿을 수 없었던 그는 매주 박물관에 들렀다. 그런 그를 박물관에서는 도둑인 줄 알고 경계했으나 자초지종 얘기를 들은 황수용 박물관장은 모든걸 구경시키면서 자료까지 줬다. 그는 박물관에서 본 대로 수없이 토기를 만들고 굽는 실험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혼자 독학을 하면서 그가 찾아낸 실패 원인은 흙과 불이 옹기와 다르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길로 전국 방방곡곡 토기 흙이 좋다는 곳을 찾아 나섰지만 10년만에 찾은 흙은 영천 봉정, 안강 노당, 내남 노곡 등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흙이었다.

흙을 찾으면서 불도 깨달았다. 불을 알면서 흙의 성정을 훤히 깨닫는데 20년이 걸렸다. 영천 봉정 흙은 1천300도에서 터지지 않으며 안강 노당 흙은 접착력이 뛰어나고 내남 노곡 흙은 산소와 탄소가 결합돼 색이 검다는 것도 알아냈다.

"흙을 찾아 다니던 10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부여와 진주, 공주, 마산 등 전국의 국립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신라토기는 물론 백제와 가야 토기에 대한 연구도 함께 했다는 그는 신라토기는 오직 소나무로만 불을 지피고 서서히 열을 가해 1천3백~1천7백도를 넘겨야 제대로 된 작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소나무의 높은 열로 생긴 재들이 자연유약 역할을 해 검은 색깔로 변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1천3백~1천9백도까지 올릴 수 있는 것은 소나무 밖에 없다는 것도 함께 터득 한 그는 행복했다.

"소나무 장작은 보배입니다."

토기를 소나무 장작으로 구우면 산소와 탄소가 배기 때문에 토기 옹기에 고추장, 된장 등을 넣어두면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커피 한잔을 마셔도 토기잔에만 마신다. 차맛이 월등히 좋다는 것과 토기가 얼마나 이로운지도 알기 때문이다.

배명장은 평생을 바쳐온 기마인물상이지만 하루에 1점밖에 못만든다고 한다. 신체부위 모든 걸 따로 따로 만들어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91년 명장으로 선정됐지만 그의 작품은 평생을 바친 보물치고는 의외로 값이 싸다. 그가 어렵게 재현한 기마인물상은 16~20만원 선. 그것도 제자 작품은 절반값이다. 다완 한 개에 10만원이 채 안되는데도 사람들은 비싸다고 한다.

막사발 등은 최하 몇십만원에서 1천만원까지 호가하는데 신라토기는 돈이 안된다. 때문에 배우러 오는 사람도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그냥 기술 정도로만 배우고는 도자기 쪽으로 전환한다.

"신라토기야 말로 대단한 그릇이지요. 요즘 웰빙 하면서 좋은 것만 찾는 사람들에게 신라토기는 딱 맞는 그릇입니다" 신라토기에 물을 담아놓으면 물맛이 좋아지고 음식을 담아놔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한 그는 "이는 흙과 불의 이로움 때문"이라고 한다.

토기의 맥이 끊어질까 염려하던 그는 며느리에게 만드는 법을 전수, 며느리와 아들이 공방을 차려놓고 만들고 있어 이제 든든하다.

2개월에 한 번 구우면 살아나오는 작품이 약 60%, 근래에는 1천개를 가마에 넣어 단 한 개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실패율도 많지만 신라토기를 만들면서 신라인들의 뛰어난 지혜에 새삼 감탄한다는 배용석 명장.

신라토기의 명맥 유지를 위해 그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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