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7.경주 불국사 석가탑 (慶州 佛國寺 釋迦塔)

신라 천년의 왕경(王京) 경북 경주는 한국 불교문화가 집대성된 성지로 불린다, 경주 서라벌은 곳곳에 불교문화 유적으로 가득차 있어 불교 노천 박물관이다.

경주 불교유적의 백미(白眉)는 단연 불국사(佛國寺)다. 신라인들이 불교의 이상세계를 지상에 실현해 놓은 불국사 금당(金堂) 앞에는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이 나란히 천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교의 세계에 있어서 탑(塔)은 뭇 중생들이 깨달음의 해탈을 추구하는 이상향을 향한 숭배(崇拜)의 대상이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종교적인 열정과 신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탑을 조성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래서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경주를 넘어 한국 불교 유적의 상징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에는 불교 신도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은 물론 외국인들도 즐겨찾는 불교유적 제1호로 꼽히고 있다.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사진과 함께 실린 석가탑과 다보탑을 수학여행 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아련한 추억이 누구에게나 가슴속 한편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들 탑 주위를 돌며 소원을 빌거나 깨달음을 향한 불심(佛心)을 불태우는 행렬이 지금도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있다.

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

이처럼 만인들에게 숭배의 대상인 석가탑의 역사가 잘못 알려져 있다면 믿을 수가 있을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0일 오후, '진리는 둘이 아니다'는 뜻에서 유래한 불국사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석가탑과 다보탑을 찾았다.

불이문을 사찰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즉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生)과 사(死),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라는 뜻으로 이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동행한 박임관(48) 경주학연구원장은 차가운 겨울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못 알려진 석가탑 조성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했다.

"원래 이름이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인 석가탑(국보 제21호)은 백제의 장인 '아사달(阿斯達)'이 만들었고 이 탑에는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와의 슬픈 사랑이 얽힌 설화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책은 물론 심지어 국가 문화재를 관리하는 문화재 홈페이지에도 석가탑 소개에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서려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역사 기록을 잘못한 것입니다. 역사서 어디에도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경주에서 신라학을 연구하고 있는 박임관 원장은 "하루 빨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석가탑에 얽힌 설화 이야기는 빙허(憑虛) 현진건이 지난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석가탑 건립 뒤안길에 서린 전설을 다룬 역사 소설인 '무영탑(無影塔)'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전설이 마치 실재 존재한 설화로 미화된 것이지요. '소설적 허구'가 '역사적 진실'로 둔갑한 것입니다. 이 소설이 발표된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는 마치 1천여년도 넘는 신라시대 때 있었던 이야기로 인식돼 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책임있는 역사학자나 향토사학자들이 나서서 우리 문화역사 바로 알리기에 나서야 할 때라고 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때 허구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문화재에 대한 역사왜곡은 후손들에게 잘못된 문화유산을 물려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박 원장은 이 전설에 대한 오류를 문헌의 기록을 찾아 조목조목 설명했다.

"소설 무영탑에는 '김대성이 얻은 천하의 명공 아사달은 부여 사람이다. 백제에서 가장 이름 높던 석수 명장인 부석의 수제자로 등장한다. 원로 부석의 딸 아사녀와 신혼가정을 이루고 나서 사랑의 생활을 맛볼 겨를도 없이 백제의 명예를 짊어지고 아사달은 서라벌에 파견된다. 그 후 아사녀는 남편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갔으나 남편을 만나보지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진다'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원래 무영탑 얘기는 일본 동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불국사 고금창기의 설화가 바탕입니다.

불국사 고금창기의 원 이름은 '경상도강좌대도호부 경주동령토함산 대화엄종불국사고금 역대제현계창기(慶尙道江左大都護府 慶州東嶺吐含山 大華嚴宗佛國寺古今 歷代諸賢繼創記)이며 영조 16년(1740) 5월에 동은(東隱) 화상이 지었습니다.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 건축물과 유물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적어서 현재로서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사적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고금창기에는 석가탑에 대해 '일명 무영탑이라고 한다. 불국사 건축때 장공(匠工)이 당(唐)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한 누이동생이 있어 아사녀(阿斯女)라고 했다. 아사녀가 그 장공을 찾아왔으나 대공(大功)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 안되니 이튿날 아침 서방십리쯤 된 곳에 가면 천연의 못이 있을 터이니 그 못에 가면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했다. 그녀는 이말을 따라 거기에 가보니 탑의 그림자가 없더라, 그래서 이 탑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영탑 소설에서 고금창기 아사녀 이름에서 '아사달'이라는 가상인물을 등장시켜 아사녀의 남편으로 만든 것입니다. 원문에 나온 '매(妹)'자는 '누이'를 뜻하는 것이지 소설에서처럼 '아내'는 아닙니다"

"석가탑 속 다라니경은 세계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박임관 경주학연구원장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신라인들이 부처님 세계를 표현한 최고의 걸작입니다. 이 탑들이 있는 불국사는 삼국유사에 보각국사가 사적기를 보고 기록한 천보(天寶) 10년(경덕왕 10년, 751)에 대상(大相) 대성(大城)이 처음으로 창건했다는 기록이 믿을만 하다고 봅니다. 김대성이 대력(大歷) 9년(혜공왕 10년, 774)에 죽자 국가가 맡아 완공했고 초대 주지는 대덕(大德) 항마(降魔)를 모셨다고 전합니다."

경주에서 신라문화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박임관(48·사진) 경주학연구원장은 "역사는 기록에 의해 정확히 서술돼야 한다"며 불국사 창건 연대는 주장이 많지만 삼국유사 기록이 지금까지 공식창건연대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불국사삼층석탑이라고 불리는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이 대웅전 앞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하는 '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입니다.

석가탑은 8세기 중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박 원장은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신라인들의 종교적 열정이 담긴 신성한 걸작이라고 강조했다.

"석가탑 2층 탑신부에 안치한 사리함 속에서 1966년 10월 13일 목판인쇄물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은 닥종이에 먹으로 인쇄한 목판본 두루마리로 발견됐습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 다라니경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 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은 770년에 인출(印出)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었다.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가탑을 조성한 751년(경덕왕 10)에 인쇄해 안치한 것으로 보아 이의 인출시기는 최저 751년이라 볼 수 있어 19년이나 앞선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중국에서 인출된 목판인쇄물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868년에 인출된 금강반야바라밀경인데 이것보다도 석가탑 다라니경은 118년이나 앞서고 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나라며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을 가진 나라이며, 세계 최고(最高)의 진선미한 거대한 목판인쇄물의 보유한 나라임이 입증됐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