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희(위덕대 학생생활상담실장·심리학 박사)

학교다닐 때 1년에 한 두번씩 부모님께 거짓말을 해가며 책값을 타내서 여기저기에 요긴하게(?) 썼던 기억이 있다. 학생 때는 사고 싶은 물건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데 용돈은 제한되어 있으니 좀 고전적인 수법이긴 해도 가장 성공률이 높은 것이 '책값 불리기'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 말이 적은 편인데 언제부턴가 술을 드시면 동생과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전쟁 때 얘기며 어릴 때 성장스토리를 다리에 쥐가 나도록 오랜 시간 말씀하셨다. 얘기 중간부터는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했는데 아버지 얘기가 지겹고 따분하여 내 머리 속은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가고 내 몸 만이 아버지 앞에 공손하게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느 날 얘기의 마무리가 "아빠는 우리 딸을 믿는다. 잘해라"였는데 이 순간 이탈했던 내 정신이 급하게 돌아오면서 갖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도대체 갑자기 뭘 믿는다는 거지?', '내가 책값 거짓말 한 걸 들켰나?', '잘하라는 건 이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인가?'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하고 불안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나의 미숙한 거짓말을 눈치 채고 있었고 그런 나의 거짓말에는 미동도 하지 않을 만큼 아니 어쩌면 그것과 상관없이 나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갖지 못해 부부간에 의심하는 '의처증', '의부증'으로 자신과 배우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바람피운 적 없다는 데도 의심스럽다는 배우자는 관계를 파멸로 이끈다. 부모가 자식을 감시하고 감독해야하고 고용주는 직원이 일을 제대로 안 할 까봐 갖가지 처벌규정을 만들어 놓는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람이나 조직은 건강하지 않으며 건강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을 신뢰감을 형성할 수 있는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까.

에릭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은 태어나서부터 18개월에 이르는 아주 어린 시기의 유아들의 심리적과제는 기본 신뢰감인데 이 시기에 과제수행에 실패하면 '기본불신'을 형성하게 된다고 하였다. 기본신뢰감의 형성에는 주양육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안전하고 따뜻한 엄마자궁 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와 외부자극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엄마가 매일 아침 따뜻하게 미소 띤 얼굴로 젖을 물려주고 따스한 햇살을 쬐며 산책도 시켜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포근한 엄마 품에서 잠도 재워준다. 오늘도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으니까 아마 내일도 그렇게 해 줄 것이다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아기가 타인을 신뢰하게 되며 성장해서의 신뢰감형성과 대인관계의 기초가 된다. 그래서 아이를 양육할 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일관성과 민감성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만약에 엄마가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건강하지 못해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아이 입장에서 보자면 어제는 엄마가 젖도 주고 안아주고 잘 해 줬는데 오늘은 안아달라고 울어봐도 놀아달라고 울어봐도 엄마가 전혀 반응이 없거나 화를 내는 것이다. 어제 그렇게 잘 해주던 엄마가 오늘은 돌변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군다. 그러다가 엄마가 기분이 좋아지면 또 잘해준다. 이런 엄마는 신뢰하기가 어렵다. 아기가 처음 맺은 대인관계는 엄마인 경우가 많다. 엄마는 이 시기에 특히나 온 몸의 민감성을 일깨워 아기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일관성있게 아기의 요구를 들어주자. 우리 아기가 첫 대인관계에서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성장해서는 사람을 믿어 줄 수 있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고백하건데 그 이후로는 책값불리기는 그만뒀다. 만약 아버지가 "네가 거짓말한 거 다 알고 있다. 어디서 그런 나쁜 짓을 배워서..."라며 노발대발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순간은 아버지에게 사죄했겠지만 내 자존감이 무척 상처받고 다음엔 더 정교한 거짓말로 돈을 타냈을 지도 모른다. 거짓말한 주제에 무슨 자존심이냐고 말하겠지만 거짓말한 주제에도 자존심은 있다. "너를 믿는다"고 말해 준 아버지가 있어서 다행(多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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