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 <포항강변교회 목사>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가을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이미 가을은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이 가을이 지나면 세월의 흐름 앞에 반항하고 싶어질까 해서 가을만은 쉬엄쉬엄 가기를 원했는데 어언 가을은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서재 창가로 바라보이는 먼 산의 색채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이른 아침, 늦은 오후면 더 심각하게 나의 시야로 스며들어온다.

때론 울컥 솟아나는 속눈물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마냥 가을의 세상으로 빠져들곤 한다. 일상을 벗어나 가을 산행도 소망해 보고, 하다못해 가을 빛 머금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을 강변이라도 거닐고 싶은 유혹이 있다. 호젓한 산장 카페에 들러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면서 깊어가는 가을 세상, 그리고 가을빛을 호흡하고 싶다. 산다는 것, 돌아서면 늘 ‘이것이 아니지 않을까?’ 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리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삶의 책임일 수 있다. 모두가 일탈을 꿈꾸면서 꿈으로만 멈춰야 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산다는 것, ‘모든 것 접어놓고 잠시 어디라고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의 연속이다.

하지만 떠날 수 없는 것은 삶이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아마 이 가을에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이런 유혹의 손길은 뻗어 오리라. 그리고 단념하고....자리로 돌아가 태연하게 또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하지만 떠날 수 없는 삶이란 곧 책임 있는 삶을 산다는 것 일진데 그 책임 있는 삶이 우리네 삶을 짓누르는 짐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대인들은 책임보다는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무게와 가치를 두는 경향이 역력해 보인다. 구태여 수많은 통계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회 주변들이 어수선하다.

일탈을 꿈꾼다는 것은 자기 발전을 위한 재충전의 기회가 되지만, 일탈이 아닌 파탄을 꿈꾸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인생의 가치는 “더불어”에서 오는 것이다. 세상에 나 혼자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본다면 무엇에 기준하여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내 인생의 존재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나 외에 또 다른 누군가 내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네가 없는 나’ 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을빛으로 세상이 물들어 가고 있다.

‘너’ 가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계절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너’라는 존재 때문에 우리의 삶에 책임감도 주어지는 것이고, 자리도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는 바로‘너’가 없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다.

책임질 일도 없고, 머물러 있어야 할 자리도 없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가을 속에서 더 아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가족들이 곁에 있다는 것,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것, 동료들이 곁에 있다는 것....감사할 일들이다.

가을 빛 쏟아져 내리는 이 계절에, 가을빛으로 세상이 물들어가는 이 심연의 계절에 ‘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다. ‘너’로 인해 더 열심히 살고, ‘너’로 인해 더 힘 있게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로의 표현이 깊어가는 가을 세상에 편만해졌으면 좋겠다. 주말이다. 잠시 추수하기에 여념이 없는 들판으로 나가봐야 하겠다.

익은 벼 추수에 바빠 있을 농촌 풍경을 가슴에 담고 와야 하겠다. 그리고 가을빛 내 마음에 가득 담고 돌아와 ‘너’를 위해 더 열심히 주어진 삶의 길을 노래 부르며 가야 하겠다.

김현성 시인의 작품 한 편 옮겨본다. “ 어제는 창문에 구름이 한 떼 지나가고/ 오늘은 창문에 빗방울이 왔다/ 구름이 있을 땐 나 구름이었고/ 빗방울이 왔을 땐 나 눈물이 났다/ 사는 게 뭔지 모르던 스무 살이 가고/ 사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은 나이 되었을 땐/ 굽은 은행나무가 되어/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가슴만 태웠었다./ 가끔은 인사동 골목길에 어울려/ 항아리나 돌기둥 쓰다듬으며/ 좋았던 시절 얘기 했었다./ 잎 지기 전에/ 창문에 바람이 오는 날/ 온 잎사귀들을 날려야지/ 땅에 떨어져 다 부서지도록/ 노래를 불러야지.(창가에서2,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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