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은 포항 호미수회 회장

서상은 호미수회 회장은 23년째 호미곶 나무심기 운동을 벌이며 호미곶에 흑구문학관을 건립하는 등 고향 사랑 운동이 남다르다.

16세기 풍수지리학자이며 예언가인 격암 남사고 선생이 한반도를 호랑이로 표현하면서, 백두산을 호랑이 코로, 영일만을 호랑이 꼬리 부분이라 했고, 육당 최남선은 이곳을 정식으로 호미곶이라 명명하면서, 조선 십경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비하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호랑이 꼬리 부분에 쇠못을 박았으며, 의도적으로 우리 지도를 토끼 모양이라 했고, 그 호미곶을 토끼 꼬리라 부른 것이, 해방이 되고도 그대로 불려졌다.

이를 분하고 안타깝게 여겨 일본인들이 만든 토끼 꼬리를 호랑이 꼬리(호미곶)로 되돌리는 운동을 처음 일으킨 이가 바로 서상은(76) 호미수회 회장이다.

일찍이 공직에 몸을 담아 경북지역의 시장·군수를 두루 거친 서 회장은 문화를 사랑해 문화예술 시장, 군수 문화예술운동가로 불리우고, 수필가로도 입지를 세웠지만, 그의 모든 삶은 결국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대보면 구만 2리에 귀착한다. 그는 영일군수 재직시 고향을 위해 등대박물관, 흥해 민속박물관을 건립했고 호미곶에 일월문화제를 만들고, 호랑이 꼬리에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고향을 추억한다면.

"지난 1982년 호미곶은 참 척박한 땅이었지요. 먹을 것이 있나, 물이 있나, 나무가 있나. 있는 것이라곤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람 밖에 없는 땅이었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그 척박한 땅에서 고생하며 사셨던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는 늘 바다를 향해 기도를 하셨지요. 처음 선산군수로 발령받아 갔는데 사람들이 갯가 사람이 왔다고 수군거려요. 당시는 갯가 사람들을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거든요. 그때 갯가인 내 고향을 품위 있는 곳으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죽는 날까지 어찌 고향땅을 잊겠습니까."

-나무는 언제부터 심었나.

"선산군수 임기를 마치고, 원래 고향땅에는 잘 안보내주는 데 사정을 해서 영일군수로 와서, 먼저 토끼 꼬리를 호미곶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고, 호랑이 꼬리에 털을 심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했지요. 국토의 정기를 일으키고, 꼬리 부분에 힘을 주기 위해 나무를 심자고 했지만, 그것은 대의명분이고, 개인적으로 고향을 가꾸고 고향에 힘을 실어주자는 게 내 욕심이었지요. 뜻있는 사람들과 호미수회를 만들어 나무심기를 계속한 것이 벌써 23년째입니다."

-수필가 한흑구 선생의 문학비를 세우고, 흑구문학상도 만들었는데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

"흑구가 이곳에 영구 정착한 수필계의 태두니까, 그를 축으로 해서 호미곶 보리밭을 한국수필의 메카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문화의 불모지인 내 고향에 문화의 텃밭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이제 경제는 많이 발전했고,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게하는데 일조를 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흑구문학관 현판식을 했지요, 거기에서 순수수필 중심의 교육의 장을 열어 문학세미나를 하고, 문단에 많은 수필가를 배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강연도 다니던데 어떤 내용을 얘기하는지.

"주로 영일만 르네상스에 대한 자부심이나, 정신적으로 시민의식을 깨워주는 그런 것들이지요. 올해 내 나이 76세인데, 그래도 불러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늙어서도 일을 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싶어 열심히 준비해서 합니다.

서 회장의 표정에서 자연스럽게 고향에 대한 사랑과 걱정스러움이 배어나온다.

그는 고향의 일 이외에도 에이즈퇴치연맹 대구경북회장, 평화대사 경북도협의회장을 맡고 있고, 수필가일 뿐 아니라 72세 때 현대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조금도 지쳐보이거나 노인같은 느낌이 들지않는 것은, 샘솟는 고향사랑의 힘이 선생을 떠받쳐주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함께했던 고향 사랑, 선생이 사랑한 만큼 그의 고향, 호미곶도 함께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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