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전 선박 수중작업 전문가

구룡포 최고의 작살 명수이자 선박 수중 작업 전문가인 성평전 씨가 바닷물 속 선박 청소 작업을 마치고 뭍으로 나오고 있다. 김우수기자 woosoo@kyongbuk.co.kr

한 평생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 온 사람들. 조그만 고깃배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어부, 어선(어업)과 관련된 일을 해오고 있는 그 분야 기술자…. 이들의 삶과 애환은 벌써 동화 속 이야기가 되고 있다. 문전옥답인 동해안 연안은 각종 오염과 어자원 감소로 신음하고 있는 지 오래다. 삶의 터전을 잃은 어민(또 어업 관련 종사자)들은 하나 둘씩 정든 고향(일터)을 떠나고 있다. 연안 어장(어업권)은 차츰 돈 있는 사람들의 차지가 됐다. 남은 집과 밭뙈기는 외지인에게 팔려 횟집, 레스토랑, 펜션, 러브호텔 등으로 바뀌고 있다. 본지는 창간 특집 '동해안은 지금' 시리즈를 통해 동해안 어민(어업종사자)들의 삶의 모습과 동해안의 변모 상황 등을살펴본다.

편집자 주

"고깃배 부리는 후배들로부터 '형님 죽고 나면(자맥질 은퇴) 아쉬워하는 선주들 많을 겁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하죠. 아마 구룡포에서 저 보다 나은 선박 수중 작업 전문가가 없다는 뜻에서 그렇게들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이와 체력이 옛날 같지 않아 이제 정말 그만 둬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70년대까지만해도 구룡포는 동해안 최대의 어업전진 기지 중 한군데였다. 그 때 유행했던 말이 '구룡포 가면 천원짜리 지폐는 개도 안물고 간다'였다. 그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고, 구룡포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대도시 못지 않게 괜찮았다. 당연히 어업 관련 사업(일) 또한 돈벌이가 좋았다.

50여년을 구룡포 앞 바다에서 자맥질 하나로 살아 온 선박 수중 작업 전문가 성평전(成坪佺·70·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씨. 작달막한 키, 바닷물과 햇빛에 탄 까무잡잡한 얼굴, 깊이 패인 주름살은 한평생 물질로 힘들게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20여년전만해도 구룡포 바닥에서는 '작살의 명수' '성 도사'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덕에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작살의 명수였던 그는 늘 도회지에서 놀러온 사람들의 부탁을 자주 받았다. 잠수복을 입고 물 속에 들어가 작살로 씨알 좋은 횟감만을 골라 잡아줬다. 수고비가 쏠쏠했다. 고기 종류마다 성질을 훤히 꿰뚫고 있는 그는 산소호흡기 없이 한두 시간만에 돔, 우럭, 망상어, 농어, 노래미 등을 한 꿰미 가득 잡았다.

"물고기는 종류마다 성질이 다릅니다. 숭어·농어·돔·방어 같은 놈은 동작이 빠르고, 노래미·망상어 같은 놈은 동작이 느리지요. 잡을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고기가 돌 틈속으로 들어갈 때 같이 따라 들어가 고기가 천천히 움직일 때나 방향을 틀 때, 사람을 쳐다 볼 때, 돌 틈을 벗어날 때, 찬스를 놓치지 않고 찔러야 합니다. 요즘 스쿠버하는 초보자들은 물고기 가까이 가면 물고기가 도망가버립니다. 하지만 고수는 물고기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옆에 가도 물고기가 도망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작살도 시중의 일반 작살이 아니다. 일반 작살은 철공소에서 불에 달궈 나오기 때문에 강하지 않다고 했다. 바위 등에 몇번 부딪치면 촉이 휘거나 날이 무디어져 오래 쓸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직접 연장을 사용해 생철(쇠)로 삼지창 작살을 만든다. 그의 작살 촉 안쪽에는 고기가 빠져 나올 수 없도록 갈고리 모양의 가는 촉이 별도로 붙어 있다.하지만 그에게 붙은 '작살 명수'란 이름도 이젠 세월의 뒤안길에 묻어 두어야 할 것 같다. 마을 어촌계에서 전복 등 공동어장 관리를 위해 작살 어로 행위를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집 창고에 걸려 있는 작살은 몇해전부터 사용하지 않아 녹슬고 있다.

이때문에 오래전부터 주위에서는 그를 '작살 명수'에서 '선박 수중 작업 전문가'로 부르고 있다. 주 일터가 바뀐 것이다.

그의 일터는 주로 구룡포항에 정박해 있는 바닷물 속 배 밑이다. 스크루우에 감긴 그물, 밧줄 등의 각종 이물질 제거, 물이 스며드는 배 밑창 땜질하기, 어군탐지기 청소, 스크루우 교체, 심지어 바닷물 속 사람 시신을 건져 올릴 때도 왕왕 있다.

지금껏 가장 후한 일당을 받은 것이 바닷물속 시신을 건져주고 50만원을 받은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한마디로 그는 응급조치를 필요로 하는 뱃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신속히 해결해 주는 응급 선박(사고) 외과 의사(구조대원)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달리 하루하루 생활하기가 힘들다. 일감이 많이 줄어든데다 나이까지 많아 종전 만큼 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이다. 그의 수중 작업 주 고객은 목선아니면 철선이다. 하지만 목선과 철선은 FRP 선박 세력에 밀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그의 일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거기다 체력도 옛날 같지 않아 힘든 일은 몸에 부대낀다고 했다.

요즘 그는 팔다리가 저리고, 쑤시는 잠수병으로 밤잠 설치기가 일쑤다. 매일 잠수병 약과 전립선 약을 먹어야 버틸 수 있다.

구룡포 갯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군 생활 3년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구룡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지금껏 결혼을 하지 않은 노총각으로, 10년전 바닷가 오두막 집에서 함께 살던 노모가 돌아가신 후 부터는 더욱 생활하기가 힘들다.

생활보호대상자(1급)인 그는 매달 포항시로부터 40여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 받는다. 일감이 없는 날이면 그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빈병, 고철 등 폐품을 모아 팔아 용돈으로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처자식 없이 혼자 사는 팔자다보니 자다 조용히 죽는 것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자살하려고 마음먹고 방파제 주위를 수없이 서성거려 봤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남에게 지고 있는 빚 40여만원이 눈에 아른거려서요. 돌아가신 부모님께도 불효를 짓는 것 같고요. 잠이 안 올 때면 반야심경, 천수경을 외우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혼자 살고 있는 낡은 집은 일본인이 살다 해방과 함께 떠난 오래된 집이다. 비만 오면 큰 고무통을 방안에 갖다놓고 빗물을 받아 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전 포항시가 처마 등 몇군데 손을 봐 준 덕분에 이제 비는 새지 않는다"며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한때 경북 동해안 최고의 작살 명수이자 선박 수중 작업 전문가였던 그 역시 목선과 철선이 사라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삶의 터전을 잃고 있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