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경북의 재발견 - 37.문경 관산지관(冠山之館)

문경 관산지관(冠山之館)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리에 있는 조선시대 객사 중 하나인 '관산지관'의 모습. 현재 우익사(오른쪽 건물)이 소실돼 정당(가운데 건물)과 좌익사만 남아 있다.

객사(客舍)는 고려와 조선시대 현단위의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이다. 달리 '객관'이라고도 했는데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전패는 왕의 초상을 대신했으며, '전'(殿)자가 새겨져 있어 전패라고 불렀다. 한양에 중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둔 것처럼 지방에 왕을 상징해 봉안했다. 지방으로 출장간 관원이나 수령이 동지, 설, 왕의 생일날, 하례의식 등이 있을 때 아래 관원들과 함께 배례했다.

엄원식 문경시 학예연구사

건물의 구조는 가운데 정당(正堂·가운데 건물)을 두고, 그 좌우에 익실(翼室·좌우날개 건물)이 있으며 전면에는 중문과 외문, 측면에 행랑채 등이 딸려 있다.

현재 전국에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건물로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객사 건축은 앞서 거론 했듯이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정청에 모시고 삭망으로 수령이 향궐망배를 행하던 곳으로 그 중요성에 있어 남다른 건물이었다. 그러나 국권상실 이후 객사는 대부분 지역에서 학교로 전용됐다.

이 후 100여년 동안 이들 건물은 대부분 파괴됐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담장이 철거되고 기능은 상실한 채, 옛 자리만 보전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문경지역도 마찬가지여서 관아의 건물이 우체국으로 활용되거나 이후 개인에게 매각돼 그 원형을 알기가 매우 어렵게 됐다.

다행히 안동을 위시한 경주, 청도, 청송 등 경북지역에도 몇 곳의 객사가 남아 있는데 다행히 문경지역에도 이러한 객사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1987년 1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2호로 지정된 관산지관(冠山之館)이 그것인데 문경읍 상리 문경서중학교 운동장 우측 모서리 약간 높은 곳에 남향을 하고 있다.

원래는 중앙부의 주관(主館)과 부속관인 좌·우익사가 있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주관과 좌익사만 남아있다. 우익사의 철거연대와 그 연유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다.

옛 지도에도 객사의 좌우익사 건물형태가 또렷하다.

객사는 현재 문경서중학교내 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관리도 학교에서 전담하고 있다. 객사의 우측편은 담장과 도로로 연결돼 있으며 민가가 함께 위치하고 있어 향후 관리상 주변과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객사 뒤편에 위치한 민가는 과거 관아의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으며 부지도 과거 관아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은 없으나 다만 1990년 보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서 1648년(인조 26)과 1735년(영조 11)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군청사(郡廳舍)로 사용되어 오다가 1950년께 문경서중학교 교사·교무실 등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주관(정청·政廳)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좌익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인데 두 건물이 반칸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주관은 내부를 통칸 마루로 꾸미고 정면에는 3칸 모두에 4분합 여닫이문을, 좌·우측면에는 건물 앞쪽칸에만 쌍여닫이 굽널띠살문을 달고 배면과 나머지는 회벽을 시설했다.

가장자리를 화강암 장대석으로 마감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워 5량가로 꾸민 홑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기둥 상부는 정면을 초익공으로, 배면을 무익공을 처리하였으며, 5량가의 종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게 했다.

좌익사는 왼쪽에 1칸 마루를 두고 그 오른쪽에 반칸 규모의 툇마루를 들인 1칸 온돌방을 앉혔다. 마루는 개방돼 있고 온돌방은 정면과 좌측면에 쌍여닫이 굽널 띠살문이 나있다. 주관과 동일한 기단 위에 방주를 세운 5량가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기둥 상부는 주관처럼 정면은 초익공으로, 배면을 무익공으로 하였는데, 주두 아래를 주관과 달리 창방을 두지 않고 두공 첨차로 장혀를 받도록 했다. 마루 상부에는 대량에 충량을 걸고 그 위에 외기틀을 짜놓고 추녀를 걸쳤다.

한편 주관의 지붕을 좌익사보다 높게 하고 용마루의 양단에 취두를 얹어 그 위용을 갖추게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문경의 구심점 '관산지관' 복원됐으면…

엄원식 문경시 학예연구사의 견해

조선의 개국 이념은 유교(儒敎)이다. 고려시대까지 불교(佛敎)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오직 불교의, 불교에 의한 불교를 위한 이념이 시대를 지배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출범시키는 결과를 초래 했으니 유교를 이념으로 삼은 이상 새로운 국가에서는 더 이상 불교와 가까울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갑자기 새로운 이념과 나라가 바뀐 상황을 어떻게 하면 백성들에게 빠르고 쉽게 홍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 초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의해 제일 먼저 추진된 것은 백성들이 조선의 대표 정치이념이자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숭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유교의 거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전국에 두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향교의 중심건물인 대성전이다.

임지(任地)에 도착한 고을 수령이 맨 먼저 하는 일은 향교 대성전에 모신 공자와 성인들을 찾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유교에 통치 이념이 전국적으로 빠른 시간에 퍼져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향교에서 공자를 알현 하는 것 외에 또 하나의 유교국가 기틀과 중앙집권체제 강화 및 유지는 관아의 객사 건물과 분명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고려시대까지 객사는 관아의 부속건물로서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이 됐지만 조선시대에 오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도록 했다.

이런 기능 속에 전국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가 빠르게 진행됐으며 건물의 위격 또한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조선 500년의 힘이 각 지방에 설치된 객사 건물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위상이 높고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 건물이니 국권상실이후 일제는 조선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파괴했을 것이다.

객사와 함께 없어진 건물은 관아, 역관련 건물, 향교의 대성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문경의 객사인 관산지관은 우익사가 없어 균형의 미를 잃은 지 오래됐다. 복원을 하고 싶어도 우익사가 들어갈 부지가 비좁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문경의 구심점이 됐던 관산지관을 오늘날에 새롭게 복원,지역의 구심점을 되찾는 일은 문경지역의 정체성을 바로세우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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