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구 태전동 '효자' 이영호 씨

10년간 노모 간병한 이영호 씨

"어머님 병환 중에 장가를 가다니요!"

노모 간병 10년에 노총각이 되어 버린 효자의 단호한 첫 마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노모를 지극정성으로 간병해 어머님은 10년을 더 사셨고 아버지도 없는 가정에서 1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모친을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돌봤다. 설상가상으로 노모의 병 중에 형이 사업에 실패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해 가정이 파탄나자 어린 조카들을 친아들처럼 거두었고 이젠 그 조카들이 장성해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혼사 걱정을 하고 있으니 형제간 우애나 가족애가 사회에 귀감이 될 만한 사례라 하겠다.

-참 대단한 효자입니다. 아들이 어머님을 간병하기엔 목욕, 배변 등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아들이 어머님 간병하는데 뭐가 불편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식이 노모의 병고를 조금 덜어드리는 일을 가지고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까마귀도 제 어미가 늙고 병들면 먹이를 날라 은혜를 갚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모의 간병 이야기를 하는데 이씨가 부담을 느끼자 옆에 있던 친구가 거들었다.

"영호는 정말 효자입니다. 어머님은 병 중에 변비가 매우 심하셨는데 매번 배변 시에는 아들이 약물이나 도구도 쓰지 않고 10년 동안 직접 손으로 다 처리했으며 꼼꼼히 병상일지를 쓰고 연구하고 애쓰면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아들이 마치 주치의 같고 한편으로는 엄마가 갓난 애기 돌보듯 하였습니다."

-간병 10년이면 누구라도 지칠만한데 어머님이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는지.

"어머님을 목욕시켜 드릴 때는 잘 먹지를 못해 여윈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애처로워 눈물만 쏟아질 뿐 아무런 생각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형이 갑자기 별세했고 그 충격으로 조카마저 집을 나가 방황하고 있었으니 그 당시는 막막했지요. 그때마다 저는 각별하셨던 어머님의 사랑을 떠올리고 형제간 우애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 심정은.

"저는 어머님을 간병하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는 훗날 후회하는 일 없도록 하자고 다짐했지요. 그래서 모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수도 없이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불안하고 긴장된 나날을 보낼 때가 많았지만 어머님이 불편하실까 시설에 모시고 가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1999-2009년 12월 26일) 어머님 앞에서는 힘들어 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람이 있었던 일은 집을 나가 방황하던 조카가 제가 할머니한테 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집에 돌아와 지금은 가정과 사회에 아주 모범 청년이 된 것입니다."

-이젠 장가를 가는 것이 효도가 아닐는지….

"사실은 제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오랫동안 사귀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어머님 병환으로 자꾸 미루다가 그만 혼기를 놓쳤지요. 저는 운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어머님 병환 때문에 새 색시를 처음부터 고생시키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이 친구는 건강하고 잘 생겼고 마음이 착하고 도량이 넓으며 직장도 안정되고 특히 여자를 이해하는 마음이 남다르다고 하면서 좋은 신랑감으로 자랑한다. 부디 좋은 색시 만나 행복하길 빈다"고 말했다.

-끝으로 노부모님을 모시거나 간병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길어야 20년입니다. 20년 후면 지금 간병 받는 노부모님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가 됩니다. 부모님 간병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잠깐 하는 사이에 간병하던 아들이 간병 받는 부모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부모님 은혜를 예사로 저버리고 심지어는 돌아가실 때 마지막 간병하는 일마저 남의 일처럼 부담스러워 하는 자식들이 늘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장차 우리는 누굴 믿고 무엇을 위해 배우고 가르칠 수 있을는지요. 당장 남은 고사하고 자식들은 무슨 명분으로 바르게 하라 가르치며 아내나 남편에게도 바른 도리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님은 부친이 위독하실 때 자신의 허벅지 살점을 떼어내어 살은 불에 굽고 생혈은 받아서 약이라 아뢰고 드시게 하였는데 아버님이 드시는 것을 보고는 양이 좀 적은 듯하여 두 번째는 다리에 살을 떼어내기로 하였으나 너무나 고통이 심해 칼로 베기만 해 놓고 떼어 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일을 두고 자신의 효심이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두고두고 탄식했다고 합니다.(백범일지) 김구 선생님은 지금도 우리 후손들에게 효는 애국과 바른 삶의 근본원리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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