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도 독도 주민

외로운 홀로섬 독도이장 김성도 씨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외로운 홀로섬 독도이장 김성도(70·울릉읍 독도리 산 22번지)씨.

독도가 지난 2005년 일본의 본격적인 독도침탈 야욕에 맞서 우리정부가 독도를 일반국민에게 개방했지만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이 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됐다.

동해의 외딴 작은섬, 우리나라 동쪽 영토의 끝 이라고만 알고 있을 때 김성도씨에게 독도는 집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독도가 우리나라 땅 이라는 것을 50여년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2명 밖에 없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리장 김성도씨. 독도주민이라곤 김성도 이장 본인과 부인 김신열씨 단 둘뿐.

현재 독도에는 경비대원과 등대지기들인 포항지방해양항만청 표지관리소 직원들이 있지만 이들은 근무기간이 지나면 전부 독도를 떠날 사람들이다.

지금은 독도에 본적을 옮긴 사람이 수천명이지만 그래도 독도가 사람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 우리나라 사람이 살고 있는 우리땅 이라는 유일한 증거를 국제법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김성도 씨다.

김씨가 독도에서 하는 일은 오징어도 잡고 부인 김신열씨와 물질도 하고 독도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다.

김성도 씨에게 독도는 10대 이후 지금까지 50년을 넘게 청춘을 묻고 꿈을 키우고 이뤄온 터전이다.

김성도 씨는 말한다. 무뚝뚝한 경상도 말로 "어느 놈이라도 독도가 저거땅 이라고 하면 확 죽이 삐겠다"고 하면서 걸쭉한 막걸리 냄새나는 말로 "미친놈들 독도에 멀쩡하게 주민이 살고 있는데 독도가 저거땅 이라고 하면 내가 일본 사람입니까? 턱도 없는 소리 말라고 하이소"라고 한다.

대한민국 최초 독도주민은 故 최종덕 씨다. 그는 지난 1965년부터 독도를 집처럼 여기고 드나들면서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하다가 지난 1981년 주민등록을 울릉도에서 독도로 옮겨 16년을 독도주민으로 살았다.

이후 1987년 최종덕씨가 세상을 등지기 두달전 그의 사위 조준기씨 일가 4명이 제2대 독도주민이 됐다가 조씨 일가가 울릉도를 떠나 육지로 이주하기 전인 1991년 11월, 김성도씨와 그의 아내 김신열씨가 주소를 독도로 옮겨 제3대 독도주민이 됐다.

이들이 바로 독도주민, 독도가 국제법상 암초가 아닌 자연섬이 되는데 꼭 필요한 사람사는 섬을 이룩한 주인공이다.

고 최종덕옹이 개척자였다면 김성도씨는 독도가 우리땅 이라는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도록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김성도씨는 20대때 군에 입대, 월남전에 참여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을 정도로 강건하고 책임감 강한 청년이었다. 제대후 1960년대말 그는 길성호를 타면서 8명의 해녀를 태우고 울릉도와 독도 인근 바다로 해산물을 채취하러 나녔다.

당시 지금의 부인인 김신열씨가 그배에 해녀로 타고 있었다.

결혼 후 김성도씨는 독도첫 주민 최종덕씨를 도와 1970년대 초반부터는 독도에서 살다시피 했다.

독도의 생명수인 물골에서 어민숙소까지 연결하는 998계단을 만들때도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고 최종덕씨와 함께 1천개에서 2개가 모자라는 계단을 만들때 부인 김신열씨도 독도바다 속에서 모래를 채취해 운반했다.

김성도씨에게 아픈 추억이 있다. 김씨는 "독도에서의 생활이 자기의 인생의 전부인데 울릉도에 두고온 자식이 보고싶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독도에서 휴대폰이나 인터넷도 되고 하지만 이것마저 없던 시절에 울릉도에 두고온 어린자식들 생각에 밤잠을 못이뤘다고 한다

지금은 다 성장해서 출가했지만 자식들이 어릴때 김성도 씨와 그의 부인은 낮에는 물질을 하면서 세상 시름을 잊고 지냈지만 밤만 되면 울릉도에 남겨 놓고 온 1남2녀의 자식들이 보고싶어 눈물을 훔치는 부인을 볼때 독도에서의 생활을 그만 접고 울릉도로 가서 자식들과 같이 생활하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힘든 생활이 아련하기만 하다.

또한, 독도에서의 외로운 사투로 인해 이제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어느 누구에게 보상을 받자고 홀로섬 독도를 지킨 것은 아니지만은 김성도 이장은 지난 1997년 쓸개를 완전히 다 도려 냈으며 아내 김신열씨도 1995년 뇌수술을 받았다.

이후 김성도씨의 독도생활 최대 위기는 지난 2008년 독도 서도 어업인 숙소에서 물을 마신 후 구토증세를 보이며 호흡 곤란을 겪다가 경북도소방본부 헬기가 출동해 김씨를 대구 동산의료원으로 후송해 부정맥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한 때다.

김성도 씨는 병원에서 퇴원한후 친지들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곧바로 독도로 단숨에 달려왔다. 병원에 있을 동안에도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마음은 항상 동해 한가운데 외롭게 홀로 떠 있는 독도를 향해 있었다.

김성도씨의 독도에 대한 굳은 의지와 강건한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람이 아프면 세상만사가 귀찮아져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데 김성도씨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아프나 오로지 독도생각으로 머릿속이 꽉차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지난 20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한 이후 독도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애국심과 영토심을 불러 일으키고 이와 더불어 독도에 대한 정부의 각종 지원책이 세워지고 실행되는 것을 볼때 이제는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고 말한다.

독도 주민 김성도씨는 전국구 스타다.

'독도하면 김성도, 김성도 하면 독도'라는 공식이 성립돼 있다. 방송과 언론에도 심심찮게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으며, 대한 당뇨병학회도 2010 당뇨병 섬사랑 수호 켐페인의 홍보대사로 유일한 독도주민이면서 당뇨병 환자인 김성도 이장을 위촉했다.

지난해에는 제61주년 제헌절을 맞아 국회가 선정한 국민대표 61명에 포함되는 등 정부차원의 각종 행사에서도 귀빈으로 초대 됐다.

프로야구 대구구장 시구, 전국체전 독도성화 채화, KBS 박중훈쇼 출연 등 스포츠행사, 방송출연도 한다.

그중 김성도씨는 지난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당시 독도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할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한다.

물론, 국회의원선거와 지방선거도 독도에서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17대 대선 때 독도에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택할 때가 이제는 독도가 영원한 대한민국 땅 이라는 것을 새삼 뼈져리게 느겼다고 말한다.

또한, 지난 1일에는 대한민국 인구통계조사 사상 처음으로 조사원이 독도 현지에 직접 들어가 대한민국 국민1호로 독도주민 김성도 독도리장 가족에 대한 인구통계조사를 실시했다.

현재 김성도씨는 독도 서도 어민숙소가 재건축을 시작해 독도에 상주하지 못하고 여객선이 들어갈 때면 새로운 건물 공사가 잘돼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독도에 들어간다. 그동안 김성도씨 부부가 거주하던 어민숙소는 지난 1997년부터 17억여원을 들여 완공한 3층 짜리 건물로 건축된지 15년이 돼 육지에서는 멀쩡할 수 있는 집이지만 동해의 거친바람과 파도를 맞아 훼손이 많아 경상북도와 울릉군이 독도의 실효적 지배와 대한민국 영토 공고화를 위해 30억원의 예산을 들여 지상 4층 전체면적 353.70㎡, 건축면적 121.81㎡, 높이 11.86㎡로 기존 건물보다 두 배 크기의 건물을 신축 중이다.

현재 공정률이 약 80%로 내년 봄부터는 새 건물에서 생활할 것으로 보인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독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김성도씨 부부는 "독도는 우리 부부가 죽을 때까지 열심히 지키고 있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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