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16.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연복군 인동장씨 종택

인동장씨 연복군 종택 근경.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가문을 지킨다는 것은 힘든 일인 동시에 자부심이다.

가문의 뿌리를 지켜내고 있는 종가(宗家), 그 종가를 품은 종택에는 역사 만큼이나 깊은 사연을 담은 보물들도 자리한다. 아름다운 조각과 조상의 손길이 남아있는 벼루,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담긴 옥피리, 신비한 빛을 내뿜는 옥병, 왕이 하사한 칼….

하지만 종가가 수백 년 세월을 견디며 지켜온 최고의 보물은 뭐니뭐니 해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마음,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었다.

인동장씨 연복군 종택 원경

영주 인터체인지에서 장수면 방향으로 내려서면 바로 영주도로공사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그 진입로에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98호 '장말손유물각' 표지판이 눈에 뜨인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한 자연경관이 펼쳐지면서 몇 호 안 되는 가구와 달리 고풍스러운 건물 몇 채가 눈길을 끈다. 바로 장말손 유물각이자 연복군 인동장씨 종택.

종택의 동쪽 200미터 아래에는 정자 송설헌이 자리 잡고 있다.

인동장씨가 영주지역에 정착한 것은 조선 중종 때 장응신(張應臣) 형제에서 비롯됐다. 장응신은 연복군 장말손의 손자.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때 문과에 급제, 이시애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 51세 되던 해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사임 후 미리 봐 두었던 예천 화장에 내려와 송설헌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다 56세로 생을 마쳤다.

인동 장씨들이 영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장맹우의 아들인 장응신 때 부터다. 장말손의 장남 장맹우는 황해도 도사(都事)로 나가 있던 중 41세로 병사, 그 아들 장응신이 12세 어린 나이에 갈 곳 없이 됐다. 그 재주를 가상히 여긴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에서 데릴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영주지방에 정착하게 됐다.

그러나 장응신마저 31세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그의 후손들에게는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여 지내며 남 앞에 나서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말 한 마디가 후손들에게는 유훈처럼 내려와 그 이후로 벼슬에 나가는 이도 없었고 남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4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

화기리 인동장씨종택이 위치한 꽃계마을은 동쪽으로 연화산, 서쪽으로 주마산·황구산, 남쪽으로 멀리 학가산의 연봉이 나지막이 늘어서 있고, 마을 앞에는 동서로 길게 펼쳐진 들판과 반두들, 그 가운데로 옥계천이 관통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는 동네다.

이 집은 口자형 정침과 왼쪽 뒤편 언덕 위에 사당이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다.

정침은 안채와 사랑채가 평면 및 구조가 별도로 계획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5칸 중 대청 3칸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 안상방 2칸, 안상방 정지 1칸을 두었다. 안상방은 뒤쪽 칸에 4짝 미서기문을 달아 놓았고, 안상방 정지 위에는 다락과 반침이 설치돼 있다.

사랑채는 진달래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뜰에는 돌로 된 떡판이 놓여 있어 이채롭다.

인동장씨 종택 안의 장말손 유물각에는 연복군 장말손이 받은 704년된 고려 홍패, 연복군유물, 고려시대의 고문서 등 많은 보물(지정보물 5점 등)등이 보존돼있다. 고려 홍패는 보물 제 501호로 1305년 문과에 급제한 인동장씨 직제학공파 시조인 장계(張桂)에게 내린 합격증서다. 이는 국내서 오래된 홍패 중 하나다.

장말손의 유물로는 1453년 (단종 1)에 내려진 '백패'와 1459년(세조 5)에 받은 홍패가 있다. 연복군 영정은 1968년 보물 제 502호로 지정됐다. 이 영정은 장말손이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성종의 명으로 충훈부에서 그려 1489년 (성종 20)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종택의 정자인 송설헌은 꽃계마을 뒤편 나즈막한 야산 산록에 터를 잡고 전방의 꽃계들과 마주하고 있다.

이 정자의 기문(記文)은 봉화 닭실의 권세연(1836~1899)이 썼다. 또한 지평(持平)은 김흥락(1827~1899)의 이건기가 있다.

종손 장덕필씨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예들을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시묘는 못했지만,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산소를 찾았다. 산소를 찾을 때는 굴건제복을 갖춰 입고 하루종일 산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전통에 대한 종손의 생각은 그대로 자식들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진다.

그는 차종부가 될 맏며느리를 맞을 때 시집 오기 전 먼저 시댁을 방문토록 했다. 그 자리에서 종가의 예법이나 해야 할 일을 설명하면서 종가에 올 때는 반드시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당부했다는 것이다.

종가의 살림살이를 거의 혼자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한 종손에게는 근검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 사랑채에서 종손은 그의 손자가 3살이 될 때까지 함께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종손의 대를 이어야 할 아이니 예절교육을 시켜야겠다 싶어 처음에는 손자를 데리고 있었지만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요즘 아이들 교육을 시키려면 시골에서 제대로 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서울로 올려보냈다고 . 그렇지만 대신 서울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꼭 전화로 종손교육을 시키고 있을만큼 종손으로 키워가고 있다.

불천위를 모시며 끈끈하고 변함없이 보존되는 연복군 종택. 이 종택을 지키는 종손은 선조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 종손으로서의 소임에 열심인 그를 보며 종손은 종가가 특별히 내린 제목이 아닌가 싶다.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조상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기고, 종손을 숙명으로 느낀다는 말에서 큰 자긍심을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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