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20. 진성이씨 상계종택방문객들에 선비정신 일깨워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진성이씨 상계종택 전경.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이 벼슬살이를 끝내고 은거하면서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집이다.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된 건물을 퇴계의 13대 손인 하정공 이충호가 지금의 자리에 새로 지었다.

주자학에 몰두해 독자적인 영역을 넓힌 퇴계 이황. '동방의 주자'란 칭호를 받으면서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펼친 퇴계.

퇴계 이황은 진성(眞城) 이씨 상계파에 속한다.

50~60세에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고 '계몽전의', '주자소설요' 등 수많은 문집과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등의 대표작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있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진성이씨는 청송군 진보 이촌에서 안동시 풍산읍 마애로 이거한 후 안동시 와룡면 두루종택을 거쳐 퇴계조부인 5세 이계양때 도산면 온혜 노송정으로 정착했다.

대문 위에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문을 그대로 이용해 대문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현재의 토계리는 구한말 퇴계 이황의 생가가 있는 온혜와 가까운 곳으로 태백산의 지맥에서 온혜를 거쳐 흐르는 냇물이 낙동강에 흘러드는데, 종택 앞을 흘러가는 냇물을 퇴계(退溪)라 한다.

원래 냇물의 이름은 토계였으나 퇴계 이황이 냇가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냇물의 이름을 퇴계로 고친 후 아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안동댐 수몰로 마을이 재편되면서 지금은 양평, 삼계, 하계가 모두 토계리에 속해있고 원촌마을은 도산면 원천리로 편입됐다. 도산의 남쪽에는 도산서원, 북쪽에는 퇴계종택이 있다.

진성이씨는 이석(李碩)을 시조로 한다. 고려말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2세 이자수는 공민왕때 홍건적 토벌에 공이 있어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졌다. 왜구를 피해 안동군 풍산현으로 이거한 후 4세 이정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우양 계열에서 퇴계 이황과 같은 명현을 배출하면서 진성이씨의 명망을 높였다.

이황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로 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그들은 영남을 중심으로 학문적으로는 퇴계학파, 정치적으로는 남인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조선후기 사회의 한 축을 형성했다.

특히 이황의 후손들은 퇴계학을 가학으로 계승하면서 영남최고의 가문으로 위상을 유지해 왔다.

퇴계종택을 찾았을 때 우리의 시선이 미치기 전, 먼저 잡아끄는 것이 있다. 계상서당과 한서암 옛 터.

상계종택은 퇴계가 벼슬살이를 끝내고 은거하면서 머물러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집이다.

온계의 번잡스러움과 양 진암의 시야가 넓게 열림을 피해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을 택해 들어와 집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7년 일본군의 방화로 전소됐는데 사림(士林)의 지원으로 1929년 퇴계의 13대 손 하정공 이충호가 같은 규모로 지금의 자리에 새로 지었으며 추월한수정은 재건했다고 전한다.

종택은 토계촌을 바라보며 북동향으로 잡리잡고 있으며 퇴계탄신 500주년 기념 퇴계공원이 있어 특이하다. 문 앞에 서면 정문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문 위에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문을 그대로 이용해 대문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권두경이 창건한 추월한수정은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다 타버렸다.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단소에서 추월한수정을 복원하자는 도회가 열렸고 전국의 450여 문중이 성금을 내 2년여에 걸쳐 본채의 동쪽에 정자를 포함해 정침과 사당을 완성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의 도학을 기려 후학들이 세운 정자로 퇴계의 마음 또한 추월조한수와 같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추월한수정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바깥쪽 처마 밑에는 '퇴계선생구택'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향산 이만도의 손자이며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 이동흠이 해서체로 쓴 글씨다.

한서암은 퇴계 이황이 15년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와 49세에 지은 집이다. 풍기군수로 1년 남짓 재직한 다음이었다.

그가 돌아온 원래 집은 양진암인데 급조했던 양진암은 퇴락해 거처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낙강과도 가까웠다.

낙강은 관금이 미치는 곳으로, 관에서 어량을 놓아 고기를 잡는 곳이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매지 않는다는 군자의 처신의 방도를 염두에 둔다면 멀리 둘수록 좋은 곳이다.

아예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풍기군수를 그만두었으니 거처할 만한 땅을 골라 오래 머물 집을 지어야 했다. 이황의 시선이 안착한 곳이 상계, 바로 한서암 옛 터였다.

상계종택에서 보관하던 문헌자료는 도산서원 문헌자료와 함께 2003년 이후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중이다.

종택의 고서는 116종 792책이고 고문서는 258종이다. 퇴계선생문집신판(退溪先生文集新版),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문집 원집 49권, 별집, 외집, 연보 4권, 합 30책의 목판본이다. 퇴계연보(退溪年譜) 이황(李滉·1501∼1570)의 연보는 3권 1책의 목판본이다. 판본의 완결에 따라 여러 번 개간 및 중간됐다.

퇴계 이황을 불천위로 모시는 15대 종손 이동은 옹은 지난 해 101세로 작고했다. 후손인 16대 종손 이근필은 '예인조복(譽人造福)'의 정신을 강조한다. 때문에 밝은 사회를 만들고 싶은 염원이 간절하다. 이황의 불천위를 비롯, 4대봉사를 하고 있으며 1년 기제사만 총 15회를 지낸다.

엄격한 유교 집안의 종손이지만 누구보다도 열린 마음을 가진 그는 지금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사람 사는 밝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성교육에 힘쓰고 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선비정신을 일깨우며 언제나 예인조복을 강조한다. 종손이 강조하는 예인조복의 정신은 상계종택을 상징하는 선비정신의 21세기적 변용일 것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