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23.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경주 최씨 충의당

지방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충의당'.

경주 최부잣집이 워낙 유명해, 잠와 최진립장군이 이룬 업적이나 유업은 다소 파묻힌 듯 하지만 14대를 이어온 종가의 가성(家聲)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잠와 최진립(1568년~1636년).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정무(貞武).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하고 있는 충의당(忠義堂)은 경주 최부잣집의 파시조인 잠와 최진립이 살던 집으로 가옥의 사랑채에 해당된다.처음에는 흠흠당으로 불리었으나 1760년경 중수한 후 충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흠흠당'은 염근서흠:청렴하고 삼감을 흠모한다)과 경절예흠(勁節禮欽:꿋꿋하고 굴하지 않는 지조를 흠모하다)에서 나온 말로 정무공의 청렴과 지조를 흠모하는 뜻으로 인조임금이 친필로 내려준데서 유래한다.

사랑채 앞에 있는 최진립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

최진립 장군을 향사한 용산서원(龍山書院)을 둘러본 뒤 '이조교'를 건너 이조리(伊助里) 종가로 들어가면 종가 초입에는 격조 있게 가꾸어진 나무들마다 작은 돌 표지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오른쪽에는 제향공간이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배치방법을 알 수 있다.

종택은 마치 청와대 녹지원처럼 가꾸어져 있다.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돼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도 적혀 있다.

종가 사랑 대청에 오르면 충의당(忠義堂)이란 대형 현판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면암 최익현의 글씨다.

현재 용산서원은 지방문화재로, 충의당은 지방민속자료로 각각 지정돼 있다. 종가에는 장군이 심은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1905년 갑작스레 고사했다가 1945년 경 다시 소생했다. 이는 일제에 의한 국권 상실과 이후 광복과 연관돼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종가는 현 종손의 증조부인 최해일(崔海日)공이 살고 있었다. 일가이기도 한 면암은, 나라를 빼앗긴 현실을 뼈에 사무치게 슬퍼하며 최진립 장군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보여주었던 충의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글을 통해 역설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최진립 장군은 병조참판에 증직된 최신보(崔臣輔)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맏아들이 동윤(東尹, 龍巖), 셋째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이다.

최진립장군의 집은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후예로 사성공파(司成公派)에서 다시 마을 이름을 따 이조 종파(伊助宗派)에 속한다.

장군은 경주 현곡면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25세 때 임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찔렀다.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조직해 왜적을 토벌했다. 이같은 공적으로 난이 끝난 뒤 선무공신에 녹선됐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사, 마량진 첨절제사, 경원도호부사, 가덕진 수군첨절제사, 경흥도호부사, 경기 충청 황해 삼도수군통제사(인조11년) 직 등을 역임했으며 63세 때 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됐다.

충의당에는 지금도 충노 옥동·기별 불망비(忠奴 玉洞 奇別 不忘碑)가 있다. 이는 충성스런 종 옥동과 기별을 기리는 비로 충의당을 지키고 보존하는 후손 가암(佳巖) 최채량(崔埰亮(79)선생이 두 종의 사적(史籍)을 간추려 비문을 짓고 세운 것이다.

당시 최진립장군은 용인 험천 지역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몰리자 사람들을 둘러보고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라며 활을 쏘며 분전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수습할 때 바로 그곳에서 온몸이 화살로 맞은 채 발견됐다.

이 때 또 다른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온다. 전황이 불리하자 최진립은 자신을 평생 따르던 두 종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 이때 환갑을 넘긴 종들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며 함께 목숨을 바쳤다. 종가에서는 이들의 영령을 기려 장군의 불천위 제사 뒤 상을 물려 제사를 지내고 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지금도 이 제사의 전통은 이어오고 있다.

이를두고 일부 선비들은 "양반이 어찌 종의 제사를 지내며 종에게 절을 할 수 있느냐고들 했지만 이들은 신분이 종이기는 했으나 나라에 충성하고 주인에게 충성한 사람으로 그 충성을 기리는데 어찌 신분을 따지겠느냐"며 두 종을 기리는 뜻을 밝혔다.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조선사회에서 양반이 종의 제사를 지내고 게다가 절까지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무공 후손들은 그러지 않았다. 조선시대 엄격한 신분제도 사회에서도 주종을 떠나 끈끈한 인간관계를 견지한 정무공 집안의 이런 일은 깊이 새길일이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종가에는 현재 유물과 유품 다수가 전래되고 있다. 그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장군이 직접 사용했던 지휘도(칼 길이 85cm, 자루 길이 15cm)다. 임란 때 장군들이 직접 사용했던 칼 중 현존하는 것은 흔치 않다. 임란 당시의 것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칼, 최경회 장군의 칼, 그리고 학봉 김성일 선생의 칼 등이 손꼽힐 정도다. 고문서류, 목판류 등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모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종손 가암선생은 정무공이 보여준 청렴결백과 꿋꿋하고 곧은 지조, 즉 염근경절의 삶을 가훈 삼고 이를 자랑하며 그렇게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있다.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 집안사람들만이 조상을 기리고 칭송하는 뜻으로 지니고 살아가라는게 아니라 어느 시대든 우리네 삶의 근간이 돼야 하는 정신"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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