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안동 만휴정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만휴정. 바위와 계곡물소리, 아름다운 정자가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린 만휴정은 경북 북부지역에서 발달한 정자문화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만휴정(晩休亭)은 정자 자체도 멋있지만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 곳곳에 이룬 파란 물색의 소(沼)가 일품이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정자가 자리한 산 중턱까지 오르다보면 제법 땀이 맺히는데, 정자 부근 푸른 소를 내려다보면 그 푸른 물색의 청량함에 더위가 싹 가신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한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러하리라. 바위와 계곡물소리, 아름다운 정자가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린 만휴정은 경북 북부지역에서 유달리 발달한 정자문화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정자 문화의 백미 만휴정

정자에 걸린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유훈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이 구절은 "내 집에는 보물이 없고, 보물이란 오직 청렴결백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만휴정은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정자로 잘 알려져 있다. 김계행은 조선 전기의 청렴결백한 관리로 뽑혔던 안동 지역 대표적 청백리로,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렴결백"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앞면을 마루 형식으로 개방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 공간으로 활용했으며 손님이 묵기도 했을 터이다.

16세기 초에 지은 이 정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차경기법을 활용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정자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는 장관을 이뤄 여름철 휴식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정자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 등 선인들의 풍류와 멋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소리가 계곡의 물소리라는 한 연구결과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만휴정은 더 없이 좋은 휴식장소다.

곳에 따라 졸졸졸 흐르는 나직한 계곡물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조금만 장소를 옮기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콰아아 소리로 호쾌하게 쏟아지는 폭포 소리를 감상할 수도 있다. 대자연이 빚어내는 장엄한 음악 속에서 보백당 선생의 청백리 정신을 떠올려보면 느끼는 바가 새삼스러울 것이다.

△물소리 들으며 청백리 정신 떠올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김계행 선생의 유훈인 이 구절은 "내 집에는 보물이 없고, 보물이란 오직 청렴결백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호를 여기서 따 '보백당(寶白當)'이라 명명한 사실만 보더라도 청백리(淸白吏) 정신을 평생 실천한 선생의 고고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보백당은 고려 개국공신인 3태사 중 김선평(金宣平)의 10세손으로 세종 13년(1431) 안동 풍산에서 태어났다. 조선 초기인 성종, 연산조에 걸쳐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강직하고 청빈한 행적으로 청백리의 칭호를 얻었다. 그의 강직함은 거친 관직만 일별해도 금세 드러난다.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 교리, 응교, 전한에 이어 부제학을 지냈다.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과 대사간을 역임했다. 또 사헌부 장령과 승정원 동부승지 및 성균관 대사성을 두루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국정에 대해 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소신으로 보백당은 당대 척신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임금에 대한 충심에서 나온 간언은 성군에게 통했을지 몰라도 연산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임금은 그의 충심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서슴없는 직간은 계속됐다.

이처럼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는 수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했고, 낙향 후 후학양성으로 말년을 보냈다. 시대의 폭정을 끊임없이 지적하던 그는 현실이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임을 거듭했다. 그는 김종직과 오래 교유했는데 무오, 갑자사화 때는 이 교유가 빌미가 돼 모함을 받기도 했다. 조호문 등 10여 명과 함께 투옥돼 태형을 치른 뒤 풀려난 것도 이 때였다. 피바람이 휘몰아친 두 번의 사화에서 그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이처럼 척신과 국왕으로부터 직접적, 간접적 탄압을 받은 보백당이지만, 낙향 후 76세 되던 해 연산군이 폐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하로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잘잘못을 떠나 군신간의 의리를 끝까지 보여준 것이다. 조정의 대계를 위해 불가피한 폐위지만, 10여년을 섬긴 임금의 퇴장이 그에게 쓸쓸함과 인간적 고뇌를 안겨준 것이었다.

이런 아픔을 안고 살아야 했던 그는 조정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청빈한 삶으로 말년을 보냈다. 혼자서 청렴결백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이 정신을 강조해 가풍으로 자리잡게 했다. 청렴결백이 이 집안의 가풍이 되기까지 선생의 가르침은 투철했다. 그는 자녀와 조카들에게 "청백을 가법으로 여기고, 교만이나 경박함으로 가성을 떨어뜨리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평생을 일관했다고 한다.

만휴정을 찾는 답사객들은 이 정자에 걸린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현판을 보며 보백당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경관은 세상의 욕심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새삼 돌아보게 한다.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좋은 만휴정

보백당의 청백정신이 깃든 만휴정은 특히 가족과 함께 하는 나들이 장소로도 적합하다. 자녀들에게 보백당 정신을 이야기해주고, 선조들의 풍류정신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도 이곳에서 설명하다보면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

특히 정자 부근의 맑은 계곡물은 조금만 발을 담가도 금방 얼얼해질 정도로 시원해서 한 여름 답사 및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또 너럭바위와 그늘이 좋아서 돗자리를 깔고 더운 오후를 가족과 함께 쉬어도 좋다. 다만, 폭포 인근 낭떠러지를 조심하고 명승지인 만큼 쓰레기나 소음 등을 조금만 주의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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