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29. 영양읍 하원리 사월종택·월담헌

영양읍 하원리에 위치한 사월종택과 월담헌. 조광조를 탄핵했던 기묘사화를 피해 낙향한 사월공(沙月公) 조임(趙任)이 선조(宣祖) 35년(1602)에 세운 것이라 전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겨 평생을 경계하는 삶을 살았던 사월공(沙月公) 조임(趙任).

영양에는 조광조를 탄핵했던 기묘사화를 피해 입향한 한양조씨들이 4개의 파(派)를 이룬 집성촌이 있다.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의 수월공, 일월면 가곡리의 약산공, 일월면 주곡리의 호은공, 영양읍 하원리의 사월공이 그 맥이다.

이들은 일찌기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웠고 그 중 수월공과 사월공 형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대고 전쟁터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면서 정 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됐다.

그러나 음모와 술수로 점철됐던 벼슬살이에 염증을 느낀 사월공은 기묘사화때 낙향했다. 그리고 경북 영양 하원리에 터를 잡았으며 1602년 월담헌(月潭軒)을 짓고 당호를 대청에 걸었다.

벼슬살이의 덧없음을 깨닫고 입향(入鄕) 삼대만에 영양조문 세거의 기틀을 마련했고 그 자손들이 500여 년을 영양에서 살고 있다.

조임(趙任·1573~1644),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 본관은 한양이다.

월담헌은 영양 하원리 산비탈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큰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이 집은 1974년 12월 10일 경북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다. 전형적인 안동지방 뜰집(ㅁ자집) 형태의 가옥으로 사랑채에 누마루를 만들어 건물을 한층 높인 것이 이 가옥의 특징이다.

동쪽 담장 밖에는 사당이 있고, 성화(成化) 17년(1481)이라 새겨진 와당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조임은 10세때 부친을 여의고, 영해면 원구2리 옷금 안동 권씨 종가에 장가를 든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 백씨 백장단(白長湍)댁의 재산을 천석 넘게 얻었다. 이 재물을 가지고 이름난 승려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곳에 종택을 세웠다. 종택은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상류의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에 자리 잡았다. 임란 등의 전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아 영양에서 제일가는 명지로 꼽히는 곳이다.

조임은 광해군(光海君) 5년(1613년 계축)에 사헌부감찰, 광해군 12년(1620년 경신)에 선교랑 군자감판관, 광해군 13년(1621년 신유)에 통정대부에 재수됐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윽한 곳에 숨어사는 사람이 궁한 곳 즐겨서/산골짜기에 작은 정자 지었네/맑고 깨끗한 물은 면경같이 트여있고/겹겹이 쌓인 험한 바위는 병풍을 둘러놓은 듯 하도다'

'월담헌'이란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가져왔고, 현판의 글씨는 창석 이준(李埈)이 섰다.

종택은 자연 지형을 이용해 누각을 주 건물로, 사각형으로 배치된 주택이다. 이는 옛 고택 중 매우 희귀한 예라고 말한다. 개인 주택으로 정남향(正南向)인 집은 궁중 건물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방이 셋이고, 마루가 4칸으로 규모가 크고 건축 양식이 특이하다. 이 종택은 지은 지 400년 이상 지났으며 누마루의 각 문에는 중간설주를 문짝 사이에 배치했다. 누각형 재청(齋廳)은 사당 앞쪽에 있었으나 소실됐다.

월담헌 대청에 오르면 길고 짧은 제목으로 오묘하게 교차시킨 우물천정이 이채롭다. 우물마루는 흔했지만 우물천정은 귀한 건축물이라고 종손 조준길씨는 말한다.

누마루는 자연풍광을 그대로 끌어 들일 수 있도록 조성한 멋이 이채롭다. 벽에는 '월담헌기' '축천단기' 등의 편액이 걸려있어 선현들의 채취도 느껴볼 수 있다. 수 백년 동안 쓸고 닦고 걸레질한 마루는 지금도 반들반들하다. 마루에 앉아보면 아래가 훤하게 보이는 것이 그 옛날 선비들의 안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월 종택'은 주위에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정침 왼쪽에는 3칸 규모의 초가 방앗간채를 두었고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잘 보존돼 있다. 담장 밖 오른쪽 언덕 위에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원래 일자형(日字形)에 가까운 배치형태로 지어졌으나, 제청과 문간채는 철거되고 없다. 현재는 ㄷ자형의 안채 오른쪽에 ㄱ자형이 연접된 형태로 축소됐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가구는 오량가 홑처마집인데, 대청 주위 문틀의 모습은 모두 중간 설주를 세운 고식(古式)의 영쌍창으로 구성돼 있다.

1627년(인조 5), 후금이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나라에서는 군량미가 부족해 모속령(募粟令)을 내렸다.

그러자 사월공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곳간을 열어 양곡을 나라에 헌납했다.

1636년(인조 14)에는 청나라가 다시 침입했으나 이미 70가까운 고령이라 몸소 싸움터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집 뒤에 단을 세우고 매일 밤 목욕재계한 후 단에 올라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에 올라 통곡하니 이 단을 향리 사람들이 '축천단'이라 불렀다고 한다. 축천단 비각은 현재,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심의 단계에 있다

사월공 조임 사후 약 200년, 이조참판을 지낸 김추산 유헌선생은 축천단 기문에 '어진 사람이 죽으면 서원을 짓고 빛나는 현판을 내거는 것을 보았으나 평지 한 조각 땅에 축천단이라 이름하여 백대의 청풍을 일으키는 것을 누가 보았는가'라며 그의 고절을 기렸다.

평소 조임은 전답을 나누어 조상을 받드는 제수를 넉넉히 하고 조카들 중 어려운 사람에게 전장을 나누어 주니 영해부사 유대일이 감탄해 "류시가훈이요 범씨의장이라 해동의 대노요 산남의 유일이로다" 했다.

이처럼 일생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 죽은 스승의 사손을 죄수에서 빼내 주었으며 의를 숭상하되 재물을 가벼이 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 병자년에 비록 상주(上奏 : 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던 일)되지는 못했으나 이때 사월공이 쓴 척화소는 문사의 취지가 명료하고 적절해 신총(임금님의 귀)을 깨우칠만 했다고 전한다.

이후 사월공은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거처하는 집의 당호를 '월담헌'이라 하고 모정을 지어 숙운정(宿雲亭)이란 편액을 걸어 산수를 벗하며 시가를 짓고 지기들과 울분을 삭이고 시사를 논했다. 숙운정은 200여년의 세월을 견디며 퇴락했으나 1829~1893년 중건했다.

종가의 자녀들은 무엇보다 어렸을적부터 반듯한 행동거지를 몸에 익혔다.

현재 포스코 강판 대표이사로 재직하는 한양조씨 사월공파 종손 조준길씨는 종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종가의 가정교육은 일찍부터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배운다"며 "특히 인간으로써 지켜야할 원칙만은 철처히 강조했다"고 한다. 때문에 선조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처신에 각별히 신경 쓴다는 그는 종손으로서의 위엄 못지않게 사회생활에서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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