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家를 찾아서 - 30.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바위마을 귀암공 종택

귀암종택 전경.

귀암공 종택은 호가 귀암(歸巖)인 이원정(李元禎)의 고택이다.

왜관읍 석전리(石田里·돌밭마을) 귀바위(속칭 귀바우라고도 함)마을로 들어서면 350년 된 광주이씨 귀암종택(석전리 625번지)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왜관읍에서 국도 903호선의 반계리 방면으로 500m쯤 가다 우측 골목으로 100여m들어가면 작은 능선 전체가 귀암공 종택이다.

마을이름의 유래에 따르면 이 곳에는 원래 10개의 귀바위가 있었으나, 6·25전쟁 이후 1개의 바위가 소실돼 현재 9개 바위만 동네 한 가운데 남아 구암(九岩) 또는 '구바위(속칭 귀바위라고도 함)' 마을이라 전해진다.

귀암종택 대문

옛사람들은 한결같이 종택을 이처럼 좋은 장소에, 건물배치 또한 멋을 담뿍 담아낼 수 있었을까? 옛선비들이 풍수에도 능하다는 말이 허튼말은 아닌 듯 하다.

귀암종택 안에는 350여년 인고의 세월을 지키며 서 있는 향나무, 백일홍, 회나무가 있다. 이 고목 3그루는 경상북도지정 보호수로 등록됐다.

또 경북도문화재 제 503호로 지정된 귀암종택 '동산재'는 낙촌정(李道長 선생), 경암재(李元幀 선생), 소암재(李聃命 선생) 등 3대 재사(齋舍)가 한 울타리에 위치하고 있다.

350년간 귀암종택을 지킨 향나무

동산재 담밖에는 이원정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정조 때 재상을 지낸 채제공(1811∼1884)이 비문을 찬하였고, 귀암종택 사당에는 불천위 이원정 위패와 4대조를 합해 5위가 모셔져 있다.

칠곡을 빛낸 학자 중 광주이씨 문중 매원마을 朴谷 이원록 선생 , 관터마을 이만운선생, 신리 웃갓마을 石潭 이윤우선생은 당대에 학술문화를 주도한 영남학맥과 퇴계학맥을 계승했다.

광주이씨는 15세기 말 칠곡으로 낙향해 명사들을 배출하면서 오늘날까지 칠곡을 대표하는 명가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귀암공 종택은 1670년(현종 11) 이원종이 양주목사 재임 때 돌밭(현 석전리)에 신기제택을 세워 매원에서 귀바우로 이거했다고 전한다.

사당·대문채는 1670년대 건물이다. 현재의 정침과 사랑채는 1937년 3월 6일 입주(立柱), 18일 상량 재건됐다고 상량문에 적혀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이다. 평면 구성은 중앙의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부엌, 2칸 안방을 연접시키고 우측에는 2칸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 마루를 설치하고 2짝 유리 미닫이문을 달았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이었다. 평면 구성은 좌로부터 2칸 대청마루를 두고 온돌방 3칸을 연접시켰는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칸마루를 설치하고 2짝 유리 미닫이문을 달았다.

귀암(歸巖)이원정(李元幀.1622∼80)은 조선 현종·숙종대에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도장(李道張) 선생의 장자로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이 집안은 신 3리 웃갓 석담 이윤우 선생으로부터 시작해 석전리 광주이씨 4대 한림(翰林)집안으로 유명하다.

이원정은 효종3년(1652년)문과에 합격해 1677년(숙종3)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판서(刑曹判書), 1679년(숙종5년) 이조판서(吏曹判書) 관직을 두루 거쳐 지냈다.

경상도 사람으로 드물게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듬해 향년 59세에 세상을 떠난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귀암은 글을 읽을 때 한 눈에 여덟 줄씩 읽고 배우는 대로 외웠다고 전한다.

전주판관(全州判官) 재임 시절, 전임자의 미결문서와 송사를 처리하면서 눈으로는 문서를 읽으며, 귀로는 송사를 듣고, 입으로는 판결문을 부르며, 한편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네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 조금도 소홀하거나 잘못되는 점이 없어 보는 이들을 탄복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송사를 처리한 판결문이 2권의 책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공정한 판정과 문장이 뛰어나 문화재로 지정됐다.

164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 문과에 급제한 이원정은 동래부사, 도승지, 대사헌, 병조참판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숙종 5년에 이조판서에 오른다.

서인 집권기였지만 승진을 거듭하고 요직에 오르던 그는 정쟁의 와중에서 결국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펼치지 못했다. 뿐만아니라 사후에도 오랜 기간 부침을 거듭하다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올바른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극심한 당쟁 속에서 한 인물의 굴곡진 인생 역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귀암종택 소장 고문서 3천여점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됐으며 유품, 공예품 30여점 등 3대에 이르는 문집목판 499점도 함께 기증했다.

저술(귀암선생 문집)은 12권 6책이 남아 있다. 재임시 영남지방의 대동법을 실시한 것은 도민들의 생활에 크나큰 혜택을 주었다. 1670년 청나라에 갔을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서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수행했다. 귀암공은 공은 당대의 명신이요, 시문에 뛰어난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귀암종택 현13대 종손인 이필주(李弼柱)씨가 살고 있다.

그는 "종손으로서 예(禮)를 그대로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편리한대로 고쳐서 지키는 예는 예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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