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마을

벽산 김도현 선생이 사비들 들여 쌓은 검산성.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군 입암 시내를 벗어나면 반변천을 중심으로 영양읍과 청기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우측 방향으로 911번 지방도로를 타고 입암면 연당리 남이포와 서석지를 지나 2㎞쯤 가다 보면 항일 의병 운동의 선봉장이 됐던 항일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선생이 태어난 청기면 상청리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상청리는 본래 영양군 청초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소청·소사·장평동의 일부를 떼어다 합해 청기면에 들게 했으며, 소청(小靑)은 옛날 소청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신라 때 오늘의 청기면 일대가 대청 부곡이라 불렸고, 소청 일대를 소청부곡이라 하였는데, 일제가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윗마을을 상청, 그 후 윗마을·아랫마을을 합해 소청동으로 불렀다.

벽산 김도현 선생의 생가를 알리는 출입문 현판.

신당(新塘)은 상청의 윗마을에 있어서 소상동(小上洞)이라고 했는데, 새 못이 생겨나고서 신당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마을에서 1km 정도 떨어진 뒷산 꼭대기에 자연석에 음각된 '영봉대'라는 비석이 서 있는데, 옛날 이 곳에서 백일장을 열기도 하고 기우제도 지냈다고 전해지, 또 이곳은 청기면 13개 마을이 보이는 높은 곳으로, 그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생가와 그가 개인 재산을 털어서 항일투쟁을 위해 구축한 검산성을 들 수 있으며, 상청리 마을 앞에 있는 마을의 수호신 당나무는 느티나무로 그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며, 매년 정월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나무에 제를 올린다.

이 비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852~1914)의 관향은 김녕(金寧)이요. 자는 명옥(明玉)이며 호는 벽산(碧山)으로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도모(圖謀)하다가 순절(殉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인 충의공(忠毅公 工曺判書 白材 金文起)의 15세손이며 김성하(金性河) 참봉의 아들로서 1852년(哲宗3年) 청기면(靑記面) 상청동(上靑洞)에서 태어났다.

김도현의 생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의병 활동시로 김도현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결심하게 되는 것은 을미년 11월에 사촌 아우 김한현(金漢鉉)으로부터 일제가 단발을 강요한다는 급보를 받고 1895년 12월 친구인 권한모(權翰模)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것을 의론하였지만, 권한모가 급박한 형세를 들어 어려운 상황에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표명함에 따라 벽산은 동년 12월 9일에 읍으로 나아가 글을 띄우고 이튿날 고을 선비들과 한자리에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론하였다.

그는 조영기(趙永基)와 함께 안동과 예안의 의병 대열을 살펴보았으며 이후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의 의병대는 조직을 정비한 후, 먼저 봉화군을 점령하고 군수의 지원을 받아 동헌에 진을 쳐 3월 16일에 1차 공격이 있었으나 이에는 패전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고을을 순회하면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잠시 집에 들렀다.

그러나 일본의 방화로 인해 괴암서당(槐巖書堂)과 주위의 민가가 소각 당하였고, 부친은 아우의 집으로 피신하는 등 가족과 마을의 암담한 상황을 목격한 후 후일을 기약하는 강한 의지를 남긴 채 의병을 해산하게 된다.

1906년에는 고종의 비밀명령을 받아 활동했으나 이듬해 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그의 구국활동은 무력항쟁에 그치지 않고 상소운동을 벌이거나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만국공법론에 의거해 포고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론적 방법을 병행했다.

벽산은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가 모두 마무리되기를 기다려 1914년 영덕군 영해읍 대진 앞바다에서 순국한다. 동포들에게 충의로서 일제에 복수할 것을 강조하고 자신은 죽어서라도 기어이 왜를 멸망시키겠다는 내용의 글 '우리동포에게(與國內同胞)'는 순사 전날인 11월6일 새벽 반송정에서 남긴 것으로 죽어서도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겠다며 경주 감포 앞바다에 대왕암 수중릉에 묻혔다는 신라 문무왕의 염원과 닮은꼴이다.

벽산이 순국한 대진 산수암(汕水巖)에는 1971년 도해단(蹈海壇)이 세워졌고, 해마다 선생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국민장)이 추서했다.

△ 벽산생가(碧山生家)와 검산성(劍山城)

이 가옥은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5대손인 순국선열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선생의 생가로 임진왜란 때 군자감정으로 호위하였던 그의 10대조인 김응상(金應祥)이 1580년경 건축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0년대 이후에 건립되어진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자형 건물인데, 정침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초가 대문채를 세웠고,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외양간을 두고 좌측에는 사랑공간을 배치했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했으며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 64호로 지정 되었다.

검산성은 애국지사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이 개인 재산을 털어서 항일투쟁을 위해 구축한 산성으로 1894년(고종31) 김도현은 생가 뒤편에 검산성을 쌓아서 다른 의진과는 달리, 더욱 조직적인 의병대열을 이루어 대규모의 석성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경제력과 축성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능력을 볼 수 있다.

1985년도 조사보고서에서 "검산성의 규모가 작고, 축벽의 상태도 조잡하고 많이 무너졌으나, 한말에 항일을 위해 개인 재산을 들여 구축했고, 또 항일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의 축성인 만큼 비록 축성연대가 얼마 되지 않고, 또 조잡하다 할지라도 지정해 보존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검산성(劍山城)이 있는 청기면은 대체로 500m 이상의 높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동으로는 동천이 남으로 흘러 신사리에서 반변천과 합류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동천이 흘러가는 동쪽은 절벽을 이루고 남으로는 하천(霞川)과 구매천(九梅川)이 갈라지는 곳으로 경사가 완만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검산성은 검산의 유리한 지형을 잘 이용하여 산 정상의 서남쪽에 성벽을 쌓아 올렸고, 급경사를 이루는 동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성벽으로 삼았고, 성의 전체 둘레는 약 500m 정도로 작은 규모이나 입암면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축조된 산성으로서 규모가 작고 보존상태도 좋지 않지만 구한말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곳이라 점에서 의미 있는 유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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