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마을

회곡고택 모습.

청기면 소재지에서도 다시 차를 타고 20분을 들어가면 갯마을이 합쳐져 이룬 마을, 기포리(基浦里)가 나온다

기포리는 본래 영양군 청이면(靑二面)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골개머리·멧개울·안맷개울·탑생이·옥생이·포두 등을 합해 기포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 기포리란 이름의 시작이다.

이 동네는 마을 북쪽으로 재를 넘으면 당리(唐里)가 나오고, 마을의 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서 비교적으로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은 편으로 산 아래로 청기천을 따라 이어진 밭들이 마을 안의 경지 대부분을 차지하며, 마을은 청기천을 굽어보는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권용보 선생이 세운 경산정 모습.

마을 안에는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선생이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과 수양에 뜻을 둔 회곡고택(晦谷古宅)이 정자에서 남동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로 들어오는 사잇길 입구에는 권춘란의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6.25동란 때에는 난을 피하지 않고 선현들의 유적을 지킨 권오봉(權五鳳) 선생의 유적영모비(遺蹟永慕碑)가 위치해 엄숙함을 가져다준다.

또 이 마을의 영선사 비로정에는 조선시대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 안동권씨 회곡 권춘란(權春蘭, 1539~1617)과 회곡고택(晦谷古宅)

권춘란의 자는 언회(彦晦)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된 권석충(權錫忠)으로 1539년(중종34)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서 권석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고결한 인품을 숭상했다 하며, 그는 주위사람들이 장래에 그가 크게 빛날 것으로 기대했으며, 어린 나이에 감히 할 수 없는 주역(周易) 공부에 관심을 보여 틈만 나면 주역의 괘효(卦爻)를 본따서 그렸다.

한번은 이런 그의 행동을 부친이 보고는 "이것은 대인(大人)이 배우는 것이어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권춘란은 오히려 "저는 항상 대인의 뜻을 사모하고 있습니다"라고 해 부친이 학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구봉령(具鳳齡)에게 그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나선 권춘란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 일찍 서당 앞에 가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으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한결같았고 수업의 진도 또한, 남보다 빨랐으며, 스승인 구봉령에게 배운 뒤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이미 구봉령을 통해 선생의 총명과 인품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황은 찾아온 선생을 위해 윗자리를 피하면서 매우 정중히 대했다고 하며, 권춘란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대과에 급제해 검열, 대동찰방, 정언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갔다.

비록 관직생활을 짧게 했지만, 공직에 나아가면 그는 언제나 민심을 살펴 불쌍한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고,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군수 시절에 백성들이 미신을 좋아해서 음사(淫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는 단호히 철폐령을 내려 영주의 해괴한 풍속을 없앴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관직생활에는 별다른 뜻이 없고 오직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는 데에만 뜻이 있어 말년에 회곡고택에서 지낼 때 안동에 이름난 선비인 류성룡(柳成龍)과 의문 나는 점을 편지로 주고받기를 좋아했다.

또 권춘란의 효행과 우의가 아주 깊어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 때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 드려 한 달 만에 낫게 했고, 스승인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부모 모시듯 했으며,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상일에 나서기를 싫어했지만, 선생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돕는 한편 의병장 김윤명(金允命) 휘하에 들어가 맞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회곡고택은 백형(伯兄)인 회곡(晦谷)에게 장자를 입양해준 춘계(春桂)가 임란직전에 건축한 것으로 짐작되며, 1988년 9월 22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79호로 지정됐으며, 권춘란이 말년에 살던 곳으로, 이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이 있는 영양으로 입향했다고 하나 고택이 옮겨온 연대는 상세하지 않지만 사당은 원래 정침의 우측에 있었던 것을 1738년(영조14)에 현 위치로 이건했다는 기록이 사당의 상량목에 남아 있다.

정침(正寢)은 자연석을 쌓은 정면 5칸의 정침기단(正寢基壇)은 앞쪽은 1m 정도로 높이 쌓았으나 뒤쪽으로 갈수록 낮아졌고, 건물의 정면 어간(正面 御間)에 중문각(中문間)을 설치하고 앞쪽 마당에서 몇단의 잡석을 쌓은 계단으로 오르게 했다.

중문간의 좌측에는 마구간과 부엌이 각 한칸을 차지했는데 부엌은 후방의 안방쪽으로 2칸통(二間通)으로 길게 놓여있으며, 중문간 우측에 놓인 한칸 사랑방은 뒤쪽 처마밑에 받침을 달아 내었고, 안채의 중심은 안마당 폭과 같은 세칸 안대청으로 좌측에 웃방 한칸, 그 앞에 안방을 두칸 두어 부엌과 이어졌는데, 안방에서 외여닫이로 웃방을 통해야 안대청에 이를수 있는 것이 이채롭다.

구조는 막돌 초석 위에 방주를 세웠고 안대청 상부로 삼량가(三樑架)에 동자주대공(童子柱臺工)을 세운 비교적 간소한 구조이나 기둥과 보 등의 재목은 모두 자귀로 다듬었고 배면의 대청과 방의 경계 주상의 긴 밸목 등은 고식으로, 특히 안대청 후벽의 각간(各間)에 설치된 양개판문 틀에는 중간설주가 있어서 고격을 보이는데, 좌우 창문들이 웃 안방과 연귀마춤으로 처리돼 있을뿐 아니라 중간설주의 상단도 제비초리 맞춤으로 되어있어 비교적 정교한 솜씨로 돼있다.

회곡고택으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월사당은 '상지십사년무오 (上之十四年戊午)입주(立柱)상량 (上樑)'이란 상량문으로 보아 영조(英祖) 14년 (1738)에 이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삼량가(三樑架)의 간소한 구조이나 전면에는 원주를 세우고 퇴를 물려 툇마루를 깔아놓았고 내부에도 장마루를 깔아 놓았으며, 후벽에는 선반을 설치하고 회곡이 임란시 중국에 사관으로 갔을 때 선물 받은 감심을 올려놓았다.

또 묘우내(廟宇內)에는 회곡선생문집(晦谷先生文集), 장곡선생유서통(藏谷先生諭書筒)과 교지(敎旨), 옥관연(玉冠硯), 옥관자(玉冠子), 관인(官印), 호패(號牌), 공신록(功臣錄), 행장기(行狀記) 등 가문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 권용보(權龍普, 1828~1908)와 경산정(경山亭)

권용보는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의 후손으로 1828년(순조28)에 태어났으나, 선조인 권태일은 본래는 권춘란(權春蘭)의 동생인 권춘계(權春桂)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권춘란이 아들이 없어 후사를 잇지 못하므로 권춘란의 양자로 입적됐다.

평소에 검소하고 사치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며 학문과 수양에 뜻을 두었으며, 또한 조상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며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써 이름있는 제자들이 많이 배출됐으며, 늘그막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으로 승진되어 삼대(三代)가 추증받았다.

경산정은 권용보의 정자로 선생의 나이 46세 되던 1896년(건양1)에 건립하였으며, 스스로의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기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다.

경산정은 정면3칸, 측면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흙을 다져 기반을 쌓고, 당(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이른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 구조를 취했으며, 정자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양쪽 온돌방의 출입문 앞에는 쪽마루를 두었고 전면의 토석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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