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영양향교

영양향교의 정문모습

영양군청 소재지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6㎞가량 가면 일월면의 중심 소재지인 도계리 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좌우에는 장군천과 반변천이 흐르며 일월산 남쪽 기슭에 둔덕을 이루고 냇물을 따라서 길이 나 있으며, 서쪽 마을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영양읍과 청기면, 그리고 수비면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이 마을 가운데로 나 있다.

본래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뒷두들 혹은 도부라고 불렀으나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당중동과 무등곡을 합하고 도계리라고 해 일월면에 들게 했으며, 영양향교(鄕校)와 일월면 사무소와 영양경찰서 일월파출소, 그리고 초등학교, 우체국, 영양농협 일월분소 등이 있다.

연못과 어우러진 수월헌.

도계(道溪)를 풀이하면 냇물을 따라서 난 길이란 말이니 냇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으며, 뒷두들 또는 도부리(道阜里)라고 부르기도 하며 1600년 무렵 이씨(李氏)라는 농부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마을 둔덕 위에 농토를 일궈 살면서부터 뒷두들이라 불렀고 1678년 덕봉면 장중이라고 개칭했다가 1682년 일월면 도부리라 불러 오던 중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을 좌우에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하천을 따라 도로가 개설된 마을이라 해 도계동이 됐으며 1964년 행정 분동으로 도계1리가 되었다.

한양조씨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의 종택.

△ 영양향교(英陽鄕校)

이 마을에서는 일월면 도계리에 향교가 있는데 후학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서 봄과 가을로 향사를 올린다.

조선조 숙종 5년(1679) 을미(乙未) 년에 정식으로 향교를 설치했는데, 향교의 자리는 본래 영해 부사를 지낸 김천보(金天寶)의 옛집으로서 향중(鄕中)의 왼편으로 다시 옮기게 됐으며, 영양향교 건물은 조선 숙종 9년(1683년) 건립됐다.

영양에 처음 향교가 설치된 것은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9년으로 이때 현사(縣舍)를 지금의 현리에 설치하고, 향교를 영양읍 동부리 여기봉 아래에 설치했으므로 그 일대를 향교동이라 했으나 이것은 오랜 세월과 잦은 병란으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조선 숙종 때에 분현(分縣)이 되면서 설치한 향교가 지금 남은 것이다.

건립 당시에는 대성전·명륜당·전루(前樓)·육영루(育英樓) 등의 건물이 있었다 하며, 그 중 대성전·명륜당과 동·서재가 당시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신문(神門)·사주문(四柱門) 등은 후에 건립한 것이다.

대성전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한 8칸집이고, 명륜당은 홑처마에 H자지붕을 한 7칸집이며, 명륜당의 현액은 고려 말의 명필 유항(柳巷) 한제의 글씨라고 알려지고 있으며, 막새기와에서는 '강희23년(康熙二十三年)'이라는 명문이 발견됐다.

5성(聖)·10철(哲)과 송조(宋朝)6현·한국 18현을 봉안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로 지정되어 있고, 매년 춘추로 대성전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 수월헌(水月軒)

수월헌은 수월(水月) 조검(趙儉, 1570~1644)의 덕행(德行)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영남북부 유림(儒林)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수월헌을 중심으로 좌우로 영양향교(英陽鄕校)와 한양조씨 참판공종택이 있으며, 정자 뒤로는 산이 있고, 앞에는 작은 연못과 은행나무가 있으며, 건물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31번 국도를 따라 굽이굽이 흐르는 장군천이 보인다.

수월헌은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으로 충효로서 널리 알려진 수월(水月) 조검(趙儉)선생의 정자로 원래 원당리 무들(지금의 영양읍 상원리) 강가에 있었으나, 1922년에 9세손 조언찬(趙彦瓚)이 향내(鄕內) 유림들의 뜻을 모아서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선생은 선조 3년(1570)에 원당리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 소학을 배울 때 고인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들으면 심중에 즐겨하고 모방코자 노력했으며 차차 장성해 인륜을 두렵게 지키며 언행이 공손했다. 또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 장군 밑에서 종군했으며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선생은 조실부모해 오랫동안 부모를 받들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여겼는데, 조모가 겨울에 병상에서 강어(江魚)를 원했으나 얼음이 강을 덮어 구하기가 어려워 울며 강 아래 위를 수차 내왕하면서 "부친이 평시에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셨으니 영검이 계신다면 고기를 구하도록 해달라"고 애원하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얼음위로 뛰어 오르고 또 그것을 까마귀가 물어 선생에게 날라줘 그 잉어를 가져와 조모에게 공궤(供饋, 받들어서 먹게하는 것)한 즉 병이 나았다는 비리동효행(飛鯉洞孝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워 녹훈 됐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몸이 쇄약해 출전을 할 수 없자 단을 쌓고 하늘에 축원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를 축천단충절고사(祝天壇忠節告祀)라 했으며, 이후 한양조씨 수월공파가 형성됐고 오늘날까지 도계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선생의 충효를 추앙하기 위해 후일에 자손들이 지은 정자이며 3칸 겹집으로 左右書室(좌우서실)이며 중간은 마루로서 좁고 난간을 둘렸고 정자 앞에는 연못을 두어 운치를 가미했다.

△ 사의정사(思義精舍) 및 참판공종택(參判公宗宅)

사의정사(思義精舍)는 한양 조씨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趙源)의 종택으로 350년 전에 건립됐으며, 2002년에 기존의 종택을 철거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중건했다.

수월공(水月公) 조검(趙儉, 1570~1644)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이곳 도계리(道溪里)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사의정사(思義精舍)라 편액(扁額)했으며, 종택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고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좌측 담장 사이에는 3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세워 종택으로 출입하게 했다.

한양조씨의 영양 입향은 기묘사화(1519)를 만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화를 당하자 한양조씨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감공 조종(趙琮)은 영주로 그의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은 1535년 경북 영양에 입향하면서 한양조씨의 영양세거가 시작됐다.

한양조씨 11세 손으로 영양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 선생은 안동 풍산 땅에서 영양으로 들어와 함양 오(吳)씨를 맞아 광인(光仁), 광의(光義) 두 형제를 뒀으며, 한양조씨 12세 손인 광인(1537~1582)에게는 검(儉)과 임(任)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장자 검은 조실부모 후 병든 조모를 구완하기 위해 빙판 위를 오르내리며 잉어를 구한 이야기로 마을 이름이 비릿골(飛鯉里)로 불리울 만큼 유명했으며, 효행으로 향내(鄕內)에 널리 알려져 향인들의 추앙하는 바 컸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동생 임과 함께 홍의장군 곽망우당(郭忘憂堂) 휘하에서 종군해 공을 세웠고 조검의 아우인 사월공(沙月公) 조임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 조검과 함께 의령출신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용감히 싸웠으며,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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