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섬촌·가천마을'영의공 후손' 남손 선생의 정자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

영양군 일월면사무소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1㎞쯤 가면 장군천 따라 마을이 이루어진 열한 개의 자연마을이 모인 일월면 섬촌리가 나온다.

원래 영양군 북초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재인동(才仁洞)과 당하동(唐下洞)의 일부를 합해 섬촌리라고 해 일월면에 속하게 했으며, 칠성봉에 속하는 봉우리 중 하나인 덕봉 거리에는 조선 시대에는 행인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덕봉원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섬마 또는 섬촌(剡村), 당하동(唐下洞)'은 방도헌이 있는 마을로 약 400년 전에 봉성 금씨(鳳城琴氏)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당하동이라고 부르다가, 동학운동으로 말미암아 금씨가 망하면서 이후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다.

신암정

재인두들 또는 재인구(才仁邱)'라는 마을은 약 300년 전에 손씨(孫氏)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200년 전부터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재주 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섬촌리 마을의 덕봉 삼거리에서 군도를 타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일월면 가천리가 나온다. 경치가 아름답고 땅의 생김이 아늑하다. 본래 영양군 가하부곡(가하부곡)이 있던 곳이기에 가실(佳室) 또는 가곡·개곡을 다시 불러 가천이라 하게 되었으며, 북초면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개상동·개중동·재인구를 합하여 가천리로 해 일월면에 들게 했다.

가천정

마을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가천정(佳川亭)과 상사암(相思岩),그리고 가천동천(佳川洞天) 바위를 들 수 있다.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菴公派宗宅 )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愼庵公派宗宅)은 영양 남씨 입향조인 신암(愼庵) 남손(南蓀, 1415~1488)을 파조(派祖)로 하는 후손들이 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일월면 섬촌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난 2005년 9월1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9호로 지정 되었다.

종택은 원래 18세기 중반 남씨와 함께 집단을 이루며 살았던 안동권씨 문중에서 건립해 대대로 거주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남손의 14대 주손인 남기영(南基永, 1853~1938)이 종택이 오래되어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거주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 가옥이 매물로 나오자 주위 친척의 지원을 받아 1893년 매입하게 되었다.

이후로 신암공파 주손들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향촌의 제반 문제의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유력사족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가옥은 비록 영양 남씨 신암공파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닌 데다 주위 부속건물 일부가 훼철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신암공파의 집성촌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점과 인근에 남손이 말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져진 신암정 정자와 더불어 섬촌리 신암공파의 결속의 상징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영양남씨 신암공파의 상징적 건물이라 들수 있다.

신암공파종택(愼庵公派宗宅)은 초막골 안쪽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원래 좌측 전면에는 아래채가, 좌측 뒤쪽에는 방앗간 채가 각각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ㄱ자형본채와 최근 보수·정비된 건너채만 남아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가운데 칸의 봉당과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정지와 고방을 연결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했으며,우측에는 상방과 마루방을 두었는데, 상방 뒤에는 마루를 깔아 대청은 ㄱ자형을 이루게 하였으며, 마루방의 뒤에는 모방을 두었다.

가구는 정침부분은 오량가이고, 고방부부은 삼량가인데, 정침부분의 안방과 모방상부에는 벽체를 설치하지 않고 상부 더그매가 노출되면서 합각부분에 환기구멍을 두어 완연한 까치구멍집이 되게 하였으며, 현재 후손인 남광열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영양 신암정(英陽 愼菴亭)

일월면 섬촌동(剡村洞)에 있는 이 정자는 중종조 전 현감 및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신암 남손(愼菴 南蓀)선생의 정자로 선생은 영의공(英毅公 諱는 敏)의 후손으로 영양군 고려조 대광도첨의 찬성사(大匡都僉議贊成事) 홍보(洪輔)의 9세손이며 감찰어사 및 용담군수를 역임한 수(須 號 松亭)의 차자(次子)로서 1415년(태종 15년)에 영해(寧海) 인량리(仁良里)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용자(容姿)가 아름다웠으며 장성함에 따라 장신웅대(長身雄大)하고 재질이 뛰어나서 1435년(세종 17년)에 21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군위현감, 진주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만년에 벼슬자리에서 물러 나와 영해로부터 영양에 입향했다.

선생의 자손이 일월면 섬촌동(剡村洞)으로 이주하여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섬촌(剡村)은 일명 섬계(剡溪)라고도 말하며 정자 앞에는 흥림산(興霖山)이 안대를 이루고 부근에는 촌락이 드물게 있으며 앞에는 일월산에서 흘러 내리는 반변천 맑은 물이 마을을 싸고돌아 산자수명하여 어조지락(魚鳥之樂)이 있는 곳이다.

남향으로 3칸의 복우(復宇)이며 앞으로 흥림산(興林山)이 있으며, 1947년에 공의 16세손 장흠(璋欽)이, 1996년에는 18세손 성직(星直)과 형종(瀅鐘)이 중수하였으며, 정자 부근에는 자손들이 세거(世居)하며, 자손들이 수차 중수하였으며 1947년에 신암 선생의 16세손 장흠(璋欽)이 신암정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양 가천정(英陽佳川亭)과 가천동천(佳川洞天),월성 이씨 효부 정려각(月城李氏孝婦旌閭閣)

가천정은 가천(佳川) 김찬구(金贊龜:1732∼1806)가 정조(正祖) 18년(1794)에 건립했으며, 정조 7년(1783) 영양읍 동부리에서 가천동으로 이거하여 정자를 세우고 삼친당(三親堂)이라 하며, 1987년12월 29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어 현재 김대환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삼친이란 가장 가까운 세 친족으로, 부자·부부·형제를 말하는데 삼친당이란 인륜(人倫)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인자(仁慈)와 효도(孝道)·공경(恭敬)을 근본으로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한다는 뜻으로 그 후 퇴락해 1907년 후손인 김낙현(金洛顯)·김준현(金峻顯) 이 그 자리에 정자를 중건하고 그를 추모해 가천정이라 했으며, 김낙현은 1903년에 일어난 대기근 때 양곡 수백섬을 풀어 주민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으로 주초를 놓고 건립하였고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오량가(五樑架) 집으로 평면 구성은 정면 3칸의 어칸에는 마루방을 꾸미고 좌우로 온돌방을 들였으며, 전면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기둥 앞으로 헌함을 돌리고 계자각을 설치하여 마치 누마루처럼 보이게 했다.

전면의 기둥은 두리기둥이지만, 건물 자체의 기둥은 네모기둥이다. 온돌방 뒷벽 아래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다.

가천동천은 김찬구 선생이 산 좋고 물 맑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 하여 덕봉(德峰) 앞 냇가에 있는 바위로서 앞쪽에 크게 가천동천(佳川洞天) 넉자를 새겨 놓았으며, 이름하여 아름다운 골짜기란 뜻이다.

월성 이씨 효부 정려각은 일월면 가천리에 있는 월성이씨(月城李氏) 부인의 행적을 기리는 유적이다.

관향이 월성인 이성호(李聖浩)의 첫째딸로 1847년(헌종 13)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곡강리(曲江里)에서 출생해 16세의 나이로 결혼하였으나 2년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시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1894년(고종 31) 8월 나라에서 효부 정려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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