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초대석-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한국 역사학계 거목'인 이태진(李泰鎭·68)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산세가 수려한 포항시 청하(淸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청하'는 한국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으로 있으면서 내연산 '삼용추도','청하성읍도' 등 청하의 절경을 대상으로 한 걸작을 남길 정도로 옛부터 한반도를 대표할 만큼 산세가 빼어난 곳이다.

이태진 위원장의 고향은 이러한 빼어난 산수를 배경으로 동해를 아늑하게 감싸 안으며 물이 맑은 곳(淸河))의 달이 뜨는 포구 '월포(月浦)'이다.

이 위원장은 해마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의 낭만이 넘쳐나는 월포해수욕장이 있는 월포3리 양조장 집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양조장은 그 지역의 대표적인 '부(富)'의 상징이었다. 어린시절 산수(山水)가 수려한 곳에서 보낸 이 위원장은 역사학계 거목으로 성장했다. 아마도 이곳 산수의 정기가 이 위원장의 오늘이 있게 했을 것이다.

포스텍(포항공대)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자력 근대화의 꿈과 좌절'이란 주제의 특강 차 고향을 찾은 이 위원장을 만났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포스텍 특강에서 '고종 시대 바로보기'를 통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의 자부심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제복을 입은 고종 황제.

이 위원장은 "고종은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개화의 선봉장으로서 개화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갖고 실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고종의 자력 근대화의 길을 탈취했습니다. 따라서 고종의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부정확한 역사와 왜곡에서 탈피해야 합니다'고 강조했다.

 

'고종 시대 바로보기'를 통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의 자부심을 계승해야 한다는것이다.

 

1977년부터 2009년까지 32년간 서울대 국사학과 강단에 섰던 이 위원장은 '고종'과 '대한제국 연구'의 권위자다. 조선 유교사·농업경제사를 전공한 그는 1990년대 이후 외규장각 도서의 약탈 과정을 밝혔고 고종의 근대화 노선 재조명, 국권 침탈 과정의 불법성을 규명하는 자료 발굴 작업 등으로 한국 개화기 역사를 바로잡아 대중의 지명도가 높은 역사학자다.

그는 역사학 뿐만아니라 국내 최고경영자(CEO)와 사회지도층 인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을 개설해 '인문학의 위기'를 타파하는 등 '인문학 열풍'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위원장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은 뒤 장서 35만권을 정리하던 중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 하나는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이는 반환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는 한·일병합 불성립론이다. 그는 한·일 조약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조목조목 따져 나갔다. 그의 작업이 일본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잡지 세카이(世界)에서 진행된 일본 학자와의 논쟁이다. '한·일 병합은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머지 조약이나 협약은 문제가 없다'는 일본 학자들과 집요하게 논쟁했다. 이를 계기로 2001년, 2004년 일본 도쿄대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하고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고종시대의 재조명' 등 저서와 논문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1977년 모교 서울대 강단에 선 뒤 32년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역사학회 회장,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일병합은 성립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강조하는 이 위원장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맺은 조약의 불법성을 파헤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는 대한제국을 통감부 체제 하로 만드는 문서에서 순종 황제의 결재 서명 필체가 원래 필체와 다른 점을 발견했고, 1905년에 체결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은 효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고종의 서명이 빠져 있어 무효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유교'라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무리수를 둬야 했던 것도 조선 유교 문명의 힘이었다는 게 그의 반론이다.

이 위원장은 알려진대로 고종황제의 '수호천사'를 자임한다. 우유부단해서 나라를 뺏긴 나약한 인물이라 거나, 기껏해야 봉건왕조를 연장시키려 했던 구닥다리 황제에 불과했다는 비판에 맞서왔다. 이런 이 위원장의 신념은 한일병합 무효론과 맥이 닿아 있다.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았을 때 규장각에는 대한제국 공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이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차피 망한 왕조인데 볼게 있겠느냐는, 말하자면 식민사관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국가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로서 직무유기라는 생각에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여기서 의외의 성과가 나왔다. 국가 서류다 보니 법령 자료부터 손대기 시작했는데 정미조약(1907년·대한제국 정부를 일본 통감부 산하에 두는 내용)과 관련된 법령 사인 가운데 순종황제의 필체와 다른 게 6개나 나왔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본과 맺은 각종 조약의 원본을 다 찾아봤다. 을사보호조약(1905년)에는 제목도, 명칭도, 비준서도 없었다. 정상적인 문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이란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협상 대표가 받아가는 위임장, 협상 뒤 만들어지는 조약문, 여기에 서명날인, 다시 국가원수에게 재가를 받는 비준서가 있어야 합니다. 한·일 간 조약을 보면 조약문 하나 달랑 있는게 대부분입니다."

한일병합 문건도 마찬가지다. "병합 문건도 비준서가 없어요. 다른 서류도 한일 양국이 쓰는 종이나 필체가 똑같아요. 일본이 서류를 다 만들어 강제로 서명하게 했다는 뜻 이에요. 게다가 순종황제 서명도 없어요. 행정절차 처리하는 엉뚱한 도장하나 찍힌 게 전부입니다. 한마디로 문건상 효력이 인정되지 않도록 한 것이지요."

1992년 관련 연구를 종합해 학계에 보고했다. 나라를 빼앗긴 건 사실이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저항한 황제들이었다는 주장이다. "순종황제의 유언이 뭔지 압니까. 시종 조정구에게 '역신(逆臣)들이 강린(强隣)과 함께한 것이지 내가 승인 한 적 없다. 내가 죽어서도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돕겠다. 광복에 힘쓰라'라 합니다. 참 슬픈 얘기지요."

서류 문제는 일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있었다. "저항이 워낙 심하다 보니 을사보호조약에는 제목이 없어요. 외교자문을 받으라는 1904년 한일협약은 메모랜덤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미국, 영국에 관련서류를 보여줄 때는 을사조약에는 convention(협약), 한일협약에는 agree ment(조약) 같은 단어를 제목에 집어 넣어요. 한마디로 조작인 거죠."

3·1운동도 이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가 일본 내각 총리로 있을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웁니다. 고종황제가 또 헤이그밀사사건 같은걸 일으킬 까봐 데라우치가 후임 총독인 하세가와에게 지시해요. 고종에게서 을사보호조약을 추인 받으라, 거부하면 죽이라고. 그 이틀 뒤에 고종황제가 죽어요. 당연히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풍문이 나돌고, 그 때문에 3·1운동이 터져나온 겁니다" 우리의 국호가 대한민국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원래 논의됐던 국호는 '조선공화국'이었습니다. 지금의 국회 격인 당시 의정원 기록을 보면 긴급발의가 나와요. 임정이 3·1운동 덕에 세워진 것이고, 3·1운동은 고종황제의 독살을 슬퍼한 사람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니 대한제국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고향을 찾아 대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이 위원장은 어느 때 보다도 열정이 넘쳐 보였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약력= △ 1943년 경북 영일 출생 △ 성동고, 서울대 사학과 졸업 △ 77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98년 진단학회 회장 △ 2003년 역사학회 회장 △ 03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 06년 서울대 인문대 학장 △ 06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 △ 07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현) △ 저서 '조선후기의 정치와군영제 발달' '한국사회사연구' '고종시대의 재조명' 등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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