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책 '삼국유사(三國遺事·13세기 일연스님 지음)'에는 한국과 일본 간의 최초의 교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 대목이 그것이다.

―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 4년 (서기 157년), 신라에는 햇빛과 달빛이 사라진다. 놀란 임금이 그 까닭을 묻자, 신하들은 '해와 달의 정기(精氣)인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모두 일본에 가버렸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들 내외를 빨리 신라로 데려와야 될 것이 아니냐는 임금의 성화에, 신하들은 서둘러 일본에 가 신라로 돌아와 달라고 간청하나 연오랑은 고개를 젓는다. 대신 세오녀가 짰다는 세초(아주 얇고 고운 비단) 한 필을 준다.

이 비단을 신라로 가져가 하늘에 제사 드리면, 햇빛과 달빛이 그 전처럼 되돌아 오리라는 것이다. 비단을 받아온 아달라왕의 신하들이, 연오랑이 시킨대로 했더니, 과연 신라 땅에 햇빛과 달빛이 되살아났다.

임금은, 이 비단을 임금 창고에 보관,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이름 지었다. 한편, 비단을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불렀다.

◇…고대제철은 국가 기밀이었다

'삼국유사'의 글발은 은유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물의 본 뜻은 숨기고, 겉으로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교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씀새를 문학용어로 '은유법(隱喩法)'이라 한다.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로 바꿔 표현하는 글씀새.

이를 테면 흰머리가 생긴 것을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든가 하는 식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많은 부분에서 이 은유법을 쓰고 있다. 역사의 민감한 부분, 특히 기밀(機密)에 해당하는 부분의 서술에 있어 이 은유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교묘한 역사 서술법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 있어 제철(製鐵)은 철저한 국가 기밀이었다. 신라'고구려'백제 시조들은두루 제철에서 나라를 일으킨 임금이었으나, 그 부분의 서술은 철저히 은유 속에 숨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밝히기로 하겠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대목은 특별히 은유 덩어리다. 한자로 된 원문은 불과 208자.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208자의 이 글발이, 때로는 신화로 또 때로는 전설로 그간 크게 오해 받아온 까닭은, 그 철저한 은유 글귀에 있었다 할 것이다.

◇…연오랑은 철기 야장, 세오녀는 제철 제사장

그 중 첫손 꼽히는 부분이 '연오랑 세오녀 내외가 일본에 가버리자 신라 땅에 햇빛과 달빛이 사라졌고, 신라인들 사이에 소동이 벌어졌다'는 대목이다.

이른바 '일식월식(日蝕月蝕) 소동설'이다. 그러나 여러날 연달아 계속되는 일식·월식은 있을 수 없다. 일식과 월식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우도 없다.

고대의 해와 달은 제철신(製鐵神)을 상징했다. 해와 달을 합쳐 '명신(明神)이라 불러, 명신당(明神堂)을 지어 제철 관련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 중 해는 철기 단야장(鍛冶匠)을, 달은 제철장(製鐵匠)을 상징했다.

제철의 불짚히기 즉 화입(火入)에 앞서 반드시 제사가 베풀어졌는데, 이 때의 제사장은 여성이 관장했다. 제사장과 제철장을 여성이 두루 맡아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 고대사 책에 등장하는 여성 제사장은 제철장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오랑은 단야장이었고, 세오녀는 제철장 겸 제사장이었다.

이 사실은, 이들의 일본에 간 후의 행적에서 증명된다. 단야장과 제철장·제사장이 한꺼번에 일본으로 갔으니, 공사장의 불이 꺼지고 단야·제철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당시 포항공장의 제철 능력이 상당했음을 이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내외는 일본 각지에서 제철 관련 '왕'으로 지금껏 받들어지고 있다. 나중에 소상히 밝히겠지만, 세오녀는 큐슈(九州) 지방의 '비단의 신'으로도 이름이 높다.

신라는 이른 시기부터 번성했다. 그 번영의 밑다짐을 한 것이 바로 무쇠와 비단이다. 특히 신라 철기 중 반제품(半製品)인 철정(鐵鋌)과, 신라도끼 그리고 아주 얇고 고운 비단 세초는 해외서도 소문난 명품이었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는, 무쇠와 비단과 더불어 구비구비 펼쳐진다. 그러나 이들은, 무쇠와 비단 제법만을 전해 주기 위해 일본에 간 것은 아니다. 그들에겐 큰 목적이 있었다. 신라 왕권(王權)을 에워 싼 문제였다.

2세기의 신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은유적인 씀새 속에 펼쳐지는 치열한 권력 투쟁 이야기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곤다부리하다'는 포항말 풀어보니

'곤다부리하다'는 포항말이 있다. '자질구레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재미있는 말이다. '곤'은 '큰'의 옛말이다. 경상도 일대의 사람들은 '큰'을 '근' '곤'등으로 발음했다. 영일만(迎日灣)은, 고대에 '대항(大港)'의 뜻으로 '근오기'(斤烏支라 한자 표기. 고대엔 支자를 '기'라 발음했다)라 불렸다.

이 '근' '곤'에는 '중요한' '으뜸가는'이란 뜻도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선생님'등을 가리키는 현대말 '꼰대'의 '꼰'은 이 '곤'에서 생긴 말이다. 일본고대어 'こんでい(콘대이)'는 '으뜸가는 장정'을 뜻했다. 우리 옛말 '곤대'가 일본에 건너가 와음된 것이다.

'곤다부리하다'의 '다부리'는 '자부리'의 옛소리다. 고대인은 ㅈ(지읒)소리를 ㄷ(디귿)소리로 발음했다. 다부리, 자부리는 자자부리한 것, 즉 자잘한 것을 가리켰다. 실은 큰 것인데 자잘하게 보이는 것, 매우 중요하나 작은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연오랑 세오녀 대목이다.

2012년에는 이 곤다부리한 대목에 주목하자.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