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대목은 교묘한 글발로 엮어져 있다.

사물의 본 뜻은숨기고,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씀새를, 문학용어로 '은유법'이라 말한다. 역사적인 진실을 숨기고자 할 때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역사를 더욱 신비롭게 표현하고자 할 때도 이런 방식을 쓰기도 했다.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에 가자, '신라에 햇빛과 달빛이 사라졌다'는 것도, 그들이 일하던 제철공장의 불빛이 꺼진 것을 빗대 표현한 것임을 우리는 앞서 짚을 수 있었다.

그럼 연오랑이 일본 갈 때, '바위'를 타고 갔다는 것은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이는 바위처럼 튼실한 배를 타고 갔음을 밝힌 것이다. 연오랑이 튼튼한 배를 짓는 조선(造船)기술과, 그 같은 배를 부리는 해양술(海洋術)을 갖추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연오랑은 바다에서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때마침 바위가 나타나 일본으로 가게 된 것으로도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영일만 바닷가 바위에서 모자반을 따고 있는 대목을 표현한 것이다. 모자반은 1미터에서 3미터 길이나 되는 길고 큰 바다풀이다. 이것을 따다가 해변가에서 말린 다음, 그 잎사귀 담궜던 물을 작은 토기(土器)에 옮겨 불 짚히면, 그릇 안에 소금이 맺힌다. 이것이 고대의 소금 제조법이다.

소금 만들기는, 일찍이 무쇠만들기 만큼이나 중요한 국가 산업이었다. 따라서 고대 임금은 이 두가지 산업을 두루 관장했다. 연오랑이 무쇠 만들기와 소금 만들기를 관리했다는 것은, 바로 나라를 관리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연오랑은 신라 왕자였었다. 그가 왕자였었다는 기록은 신라사(新羅史)엔 보이지 않으나, 일본 쪽 기록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제사 도구까지 가지고 일본으로

일본의 정사서(正史書) '일본서기(日本書紀' 수인기(垂仁記)에는, '수인천황 3년 봄 3월,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아메노히보코)이 일본에 왔다'며, 그가 가지고 온 물건 이름까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연오랑은 '나는 신라 국왕의 아들이며, 신라국의 일은 동생 지고(知古)에게 맡기고 왔다'고 밝혔다 한다.

'천일창'이란, 연오랑의 일본 이름이다. 고대의 한국으로부터 일본에 간 귀인들 이름에는, 대체로 하늘 '천(天)'자가 쓰여지고 있다. '일본신화사전'(大和書房)은, '일본 역사책에, 천(天)자 이름을 달고 등장하는 신(神)과 인물은 한반도 출신자이거나 신라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일본 땅에 나타난 연오랑에게, 일본인들이 천일창(天日槍)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연오랑이 신라에서 온 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연오랑이 철기 만드는 야장(冶匠)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야장의 상징인 태양 즉 '날 일(日)'자를 그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 땅에 상륙할 때, 연오랑은 일곱가지(또는 여덟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 중 하나에, 커다란 창(槍)이 있었다.

창이란, 긴 자루 끝 양쪽에 날카로운 날을 꽂은 옛 무기로, 공포의 상징이었다. 일본인들이 연오랑을 '천일창'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를 몹씨 두려워 하고 있었음을 일러 준다. 연오랑이 일본에 가지고 간 보물 중에는 큰 칼과 작은 칼도 있었고, 각종 구슬과 구리거울을 비롯하여 제사 도구까지 두루 있었다 한다. 모두 그 시대의 문명의 이기(利器)다. 연오랑은 갑자기 도망치듯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 두루 준비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조상에게 제사 지낼 도구까지 갖추어 갔다는 것은, 오래도록 일본에서 지낼 생각을 하고 갔음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일본에 간 남자로 치부되고 있는 신라 왕자 연오랑은, 무엇 때문에 일본으로 간 것일까.

◇…연오랑 형제와 아달라왕은 경쟁자

연오랑은, '신라는 동생 지고(知古)에게 맡기고 일본에 왔다'고 했다. 이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도대체 신라왕자 연오랑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그의 동생이라는 지고는 또 누구인가? 형인 연오랑이 '동생 지고에게 신라를 맡기고 왔다'는 것은, 신라왕은 장차 지고가 맡기로 하고 자신은 동생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는 것을 뜻한다.

연오랑이 영일만을 떠나온 157년 때의 신라왕은 아달라왕이다. 그렇다면, 아달라왕과 연오랑·지고 형제 사이에는 신라 왕통을 에워싼 치열한 각축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라왕이 된 인물들의 성씨는 모두 셋이다. 초대 신라왕 박혁거세(朴赫居世) 등 박씨 7명(1·2·3·5·6·7·8대),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 등 석씨 8명(4·9·10·11·12·14·15·16대), 제13대왕 김미추(金味鄒) 등 김씨 51명(13·17대 이후 마지막 제56대까지), 통틀어 66명이다. 이들 박·석·김씨 중 연오랑과 그 동생 지고의 성은 석씨다.

제4대왕 석탈해가 그들의 할아버지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왕권은 제5대부터 다시 박씨가 차지하게 된다. 석씨가 신라 왕권을 도로 찾은 것은 제9대 벌휴왕(伐休王) 때 일이다. 그가 바로 연오랑의 동생 지고왕자다. 형제가 합심하여 정권을 이룩해 내는 과정을 살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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