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연오랑의 성은 석(昔)씨. 신라 제4대왕 석탈해(昔脫解)의 손자다.

석탈해의 아들은 구추(仇鄒), 구추의 아들이 연오랑과, 지고(知古) 즉 훗날의 신라 제9대 벌휴(伐休) 왕이다. 석탈해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교포 2세 원조'인 셈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김부식 지음·1145년)' 탈해왕 대목을 보자.

탈해는 본시 다파나국(多波那國)의 출생이다. 왜(倭) 동북 1천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데려다 아내를 삼았더니, 아이를 밴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가로되 사람으로 알을 낳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에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어 흘러가게 했다. 궤짝은 처음 금관국(금관가야) 바닷가에 가서 닿았으나, 그 나라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거둬들이지 않았다. 궤짝은 그 후 진한(辰韓·신라)의 아진포구(阿珍浦口·포항 영일만 바닷가)에 이르렀다.

시조 박혁거세가 왕위에 오른지 39년 되던 해였다. 바닷가의 노모(老母·박혁거세왕의 고기잡이었다 한다)가 이상하게 여겨 궤짝을 열어보니 거기에 한 어린이가 앉아 있었다. 노모가 데려다 길렀더니, 인물이 매우 뛰어났다. 지리(地理)에도 밝아, 경주(慶州)의 한 관리의 집터가 길지(吉地)라 하여 꾀를 내어빼앗아 살았다. 그곳은 그 후 신라왕이 대대로 왕궁으로 삼은 월성(月城)터다. 신라 제 2대 남해왕(南解王) 5년에, 왕이 그의 어짐을 듣고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했고, 등용하여 벼슬을 주어 정사(政事)를 맡겼으며, 드디어 신라 제 4대왕으로 등극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왕이 되자 3년째 된 해 5월에 왜국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24년 8월에 서거했다.

◇…석탈해 아버지는 동예(東濊) 사람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왕의 성은 석(昔)씨다. '昔'은 훈독(訓讀)으로 '예'라 읽힌다.

일찍이 우리 땅에는 '동예(東濊)'라는 부족국가가 번성했었다.

동쪽은 동해에 이어져 있었고,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와 함경도 남부 일대를 찾이하고 있던 강국이었다.

주민은 부지런하며 싸움에 강했고, 박달나무로 만든 활 단궁(檀弓)은 유명하여 당시의 중국에 많이 수출되었다. 삼지창(三支槍)도 유명했다. 키가 작고 튼실한 말 '과하마(果下馬)' 산출로도 이름이 높았다.

석탈해의 아버지인 다파나국의 왕은, 일찍이 동해로 해서 일본에 진출한 예나라 사람이다. 그들은 항해술에도 강하여, 일본에 잇따라 진출, 땅을 널리차지하고 살았다.

당시의 왜는 통일국가는 아니고, 주로 큐슈(九州)섬과 일본 본섬의 서부 및 북동부를 중심으로 세력가들이 각기 권력을 쥐고 있던 부족국가 집단이었다.

다파나국왕은 그 중 북동부를 지배하고 살았다. 지금의 효고켄(兵庫縣)과 교토부(京都府), 후쿠이켄(福井縣) 등에 걸치는 지역이다. 이 일대 해안(동해를 바라보는 바닷가)에는, 신라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항구가 있었다.

연오랑 즉 천일창(天日槍)이 당도한 바닷가도 이 근처였다.

요즘의 효고켄(兵庫縣) 케히(氣比)해수욕장에서 평야 쪽으로 이어지는 마루야마강(丸山川) 어귀. 이 일대 지명은 현재 케히(氣比)지만, 고대엔 한국식 한자음 그대로 <기비>라 불렸다. 기비란, <긴 칼>을 뜻한 우리 옛말이다. 장도(長刀)의 뜻이다. 이 고장 일대가, 고대의 장도 고장이었음을 일러 준다.

연오랑 즉 천일창이 신라에서 가지고 온 열곱가지(또는 여덟가지) 보물 중에도 긴 칼이 있었다. 연오랑은 이 바닷가에 상륙, 마루야마강을 타고 분지(盆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이즈시(出石)까지 진출한다. 이 고장 산악지대에는 카나토코산(鐵?山) 등, 철광석이 캐지는 유명한 무쇠산이 있었다.

천일창은 이 산에서 캔 무쇠 광석으로 칼을 만들어, 단마(但馬)지방 개발에 활용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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