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27년만에 정권 찾은 연오랑 형제

그가 상륙했다는 케히 해수욕장 바닷가 일대는, 애초 진흙 수렁이었다. 큰 바위가, 산에서 내려오는 강물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일창이 만든 칼로 이 큰 바위를 깨부쉈더니 흙탕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비로소 물길이 트여, 마루야마강은 맑은 물이 흐르는 무쇠의 강이 되었다 한다. 이 고장 무쇠산에서 강을 타고 흘러내리는 사철(砂鐵)이, 강변에서 풍부히 캐지게 된 것이다. 강변에서 거두어지는 사철은, 고대제철(古代製鐵)의 긴요한 자원(資源)이었다. 사철을 숯불로 녹혀 강철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자 연오랑 즉 천일창은, 제철을 하기 위해 일본에 간 인물임을 일본 고대 사화(史話)에서 읽을 수 있다.

그 무렵의 귀한 제철 기술 관련자가, 왜 일본까지 애써 진출해야 했을까. 연오랑이 찾은 고장은 석탈해 즉 신라 제 4대왕의 고향이다. 석탈해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왕. 일본에 진출한 동예(東濊) 사람 중의 하나인 다파나국왕 아들이 제 4대 신라왕이 되었으나, 왕통은 이어지지 않았다. 제 5대 신라왕은 석씨가 아닌 박씨였다. 그로부터 제 8대까지는 박씨 정권이었다. 석씨가 다시 왕통을 이은 것은 제 9대 때부터. 석탈해왕이 서거한지 104년만에 석씨계의 신라왕 제 9대 벌휴니사금(伐休尼師今)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서기 184년의 일이다. 그가, 연오랑의 동생 지고(知古)다.

연오랑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서기 157년이다.

따라서 그가 일본에 간지 27년만에, 석씨계는 신라 왕권을 재창출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왕권 재창출의 배경에, 연오랑 즉 천일창이 일본에서 만든 칼·도끼·화살촉 등 철제도구의 힘이 있었다. 연오랑에 의해 만들어진 이들 철기는, 다파나국의 케히(氣比) 해안서부터 반출되어 영일만 등 동해안 일대의 바닷가로 반입, 석씨 일족에 전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포항말 '과메기'를 풀어보니

음력설 앞뒤에, 포항 과메기가 서울로 많이 팔려 나갔다 한다. 실제로, 설맞이 장을 보러 죽도시장에 갔더니, 서울이나 대구에서 왔다는 부부동반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여기가 과메기 시장 맞아요?"하고 다급히 묻기도 했다. 포항시는 과메기 시장장터 서비스를 더욱 폄직하다.

과메기는 꽁치를 삐듯삐듯 말리는 어물이지만, 원래는 청어를 썼다. 이 청어 과메기는 예부터 영일만의 일등 건어물이어서 궁정에도 다량 납품되었다. 그 납품 명단에는, '관목(貫目)'이라 쓰여져 있었다. '관목'이란 '눈을 뚫었음'을 뜻하는 한자 낱말이다.

과메기는 순수한 포항 낱말이다. 이 사투리를, 한자로 표기해야 할 궁중 식품 명단에 올리기 위해서는, 한자로 바꿔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식품 사입 관리들이 고안해 낸 이름이 '관목(貫目)'이었다. 당시 포항에서는 청어의 '눈을 뚫어 짚으로 끼어 말렸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과메기는 '생선 눈을 뚫어 짚으로 묶어 말린' 어물이 아니다. 정갈하게 씻어 짚으로 꼬아 여러마리를 엮어서 집집의 부엌 나무들창 바깥 추녀에 매달았다.

옛 부엌에서는 주로 솔가지로 밥을 지었다. 이 솔가지 불기운 매운 향기가 부엌 들창 사이로 바깥으로 새며 부엌 추녀에 매달린 생선이 자연스레 익어가게 하는 제조 방식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창안해 낸 희안한 '스모크 생선' 제조법이었다. 짚을 꼬아 매달아 연기에 그을려 말린 생선이라 해서 '꼬아메기'라 했던 것이 '과메기'로 줄여져, 드디어 관리들의 생각에 의해 관목(貫目)이라는 한자어가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과메기'의 원래 뜻은, '눈을 무지막지하게 뚫어 꼬은 짚을 끼어서 땡볕에서 말린 생선'이란 뜻이 아니라, '꼬운 짚으로 곱게 둘러 부엌 들창에매달아 솔잎 그으름 연기로 말린 생선'을 뜻한다. 우리 조상의 알뜰한 손길이 담긴 낱말인 것이다. 실지로 한글학회가 지은 '우리말 큰사전'(1992년·어문각) 관목조에는 '말린 청어, 한자 관목(貫目)'이라 적혀있다. 포항말 과메기에는 위와 같이 알뜰한 우리 조상의 맘씨와 솜씨가 깃들여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관목(貫目)'이란 이두문자(吏讀文字)의 한가지다. 우리글이 없었을 때는 우리말을 표기할 방법이 없어, 한자에서 빚어지는 뜻과 소리를 합쳐 우리말을 표현했다. '과메기'라는 순수 우리말을 '관목(貫目)'이라는 엇비슷한 소리와 뜻을 합친 한자로 표기한 것도, 이 이두표기법을 원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관목'이라는 말이 '과메기' 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메기'란 말을 '관목'이라 이두화(吏讀化)한 데서 생긴 잘못임을 깨달아야 한다.

◇…역사를 알면 정체(正體)가 보인다

이와 같이, 역사를 알면, 정체(正體)가 보인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사책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일본 고대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연오랑의 동생 이름이, 지고(知古)라 전하고 있다. '알의 아들 또는 자손'이라는 뜻의 한자 이름이다. 여기서의 '알'이란, 연오랑과 그 동생 지고의 조상 할아버지 석탈해(昔脫解·신라 제4대왕)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석탈해왕은 알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연오랑은 동생 지고에게 나라일을 맡기고 일본에 왔다고 밝혔으니, 석탈해왕의 자손임이 밝혀진다. 고대의 '알'은 주로 '사철(砂鐵)'을 가리켰다. '알'의 자손이라는 것은 제철왕가의 자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서에 나타나는 한자 이름의 이두 풀이는, 역사풀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아달라왕에 이어 제9대 신라왕이 된 벌휴(伐休)왕은 바로 지고왕자의 후신(後身)임을 알 수 있다. '伐休'를 이두로 풀면 '침(伐)을 그친다' 또는 '벰(伐)을 그친다'가 된다. 전쟁을 끝낸 왕의 뜻이다. 벌휴왕은 싸움을 끝낸 왕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인물이다. 실제로 벌휴왕 2년의 '삼국사기'는 '왕이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대사(大赦·크게 용서함)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벌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지고(知古) 즉 벌휴왕은 이때 싸움을 끝내고, 실질적으로 즉위한 것이다. 형 연오랑의 도움 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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