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연오랑은 일본에 가서 그 곳 명문가 태씨(太氏)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7세기의 일본 정계(政界)를 주름잡은 제철(製鐵) 대호족(大豪族) 오오노오미홈치(多臣品治)의 조상이 되는 여인이다.

대(大)씨와 태(太)씨, 다(多)씨는 모두 한 집안이었다. 고구려계 예(濊)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명맥을 이어 발해(渤海)를 세운 대조영(大祚榮)도 대(大)씨였다.

그럼, 세오녀는 일본에 간 후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연오랑 세오녀 관련 기사 중 가장 두들어지는 차이는 그들 부부관계에 관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연오랑을 따라 일본에 온 세오녀를 귀비(貴妃)로 맞아들여 살았다며 다정한 부부로 서술하고 있으나, 『일본서기』는 끝내 이 내외를 이혼한 부부로 치고 있다.

이 같은 일본 역사책의 씀새에 대해, 후대의 일본 사학자들은 『연오랑 세오녀 내외는 일본에서는 끝내 부부행위를 하지 못했다』며, 야릇한 역사비판의 글을 써 남긴 적도 있다. 세오녀는 일본에 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그 발자취를 찾아보자.

세오녀는 큐슈(九州) 히메지마(姬島)로 갔다

'귀한 여인의 섬'을 뜻하는 '히메지마'(姬島)라는 보물섬이 일본에 있다.

큐슈(九州) 동쪽 쿠니사키(國東) 반도 끝자락에서 6킬로 더 간 한바다, 총 면적6.85평방킬로, 둘레 17킬로의 아주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도미·문어·문치가자미가 풍성하게 잡히는 바다의 노루목이지만, 이 고장이 '보물섬'이라 불리는 것은 흑요석(黑曜石)이 산출되기 때문이다.

검고 단단한 유리를 닮은 돌 흑요석은, 화살촉날·칼날·도끼날 등에 쓰인 고대의 중요한 석재다. 무쇠가 생산되기 전에는, 긴요하게 쓰인 원자재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았다.

한반도에 없는 귀한 흑요석을 찾아, 2세기의 그 옛날, 일본 히메지마까지 간 우리나라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히메고소.

『고사기』(712년 간행)와 『일본서기』(720년 간행)를 비롯한 일본 역사책에 의하면, 히메고소는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 즉 연오랑의 아내요, 큐슈의 히메지마와 무나카타(宗像), 그리고 나니와(難波·요즘의 오사카) 등지의 신으로 받들어진 신라 여성이다. 이들 고장에서는 히메고소진자(比賣語曾神社)라는 사당을 지어 지금껏 극진히 모시고 있다. 특히, 큐슈의 무나카타에서는 비단을 짜는 신으로 받들어져 있다. 그가 바로 세오녀이다.

섬 서쪽 산 벼랑이 짓푸른 바다기슭에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산 전체가 온통 흑요석의 바위 덩어리인 것이다. 히메지마의 흑요석은 새까맣지 않고 고운 은빛을 띄고 있다. 이 은빛 흑요석으로 깎은 화살촉을, 세오녀는 신라의 지고(知古)에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달라왕 20년 5월에, 『왜국(倭國)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어 내빈했다』는 기술이 보인다.

『일본서기』 등 일본 기록에 의하면, 세오녀는 비미호(일본명 히미코)의 딸로 치부되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로 간 비미호의 사신은 세오녀의 사신이었다고 여겨진다.

아달라왕과 화친(和親)을 맺으려 했다기보다, 일본 히메지마의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을 지고왕자에게 건네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듬해인 아달라왕 21년 정월에 흙비가 오고, 2월에는 가물어 우물과 샘이 말랐다는 기술이 보인다. 지고(知古)와의 전쟁도 이어갈 형편이 아니었음을 추측케 된다. 아달라왕은 31년 3월에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21년 3월에 돌아간 것은 아닐까. 아달라왕 22년과 31년 사이의 기록은 전혀 없다. 이 행간은 많은 것을 일러주듯 무겁고 암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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