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세오녀는 일본에 가서 '히메고소(比賣語曾)'라 불렸다.

'히메'는 한자로 '희(姬)'라 쓰여지기도 한다. '귀한 여인', '신분이 아주 높은 여왕급의 여성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한편, '고소'는 '왕호'를 뜻한 우리 옛말 '거세' '거소'가 일본화된 낱말이다.

고대의 경우, 강변에 쌓인 사철(砂鐵)을 거두어들이는 권리는 임금에게만 있었다. 사철은 철기를 만드는 원자재였다. 따라서 임금은, '무쇠 거두는 이'의 뜻으로 '거세거소'라 불리기도 했는데,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 이름 중의 '거세'가 바로 이것이다. 박(朴)은 성이요, 혁(爀)은 이름이었으며, 거세 또는 거소는 왕호(王號)였다.

제철왕을 가리키는 이 '거세'라는 신라말이, 일본에 건너가 '고소(ごそ)'라 불리게 된 다. 따라서 세오녀가 일본에서 '히메고소'라 불렸다는 것은, 바로 '제철여왕'이었음을 일려 준다. 세오녀는 일본에 가서 제철여왕으로 군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일본은 통일국가는 아니기 때문에, '여왕'이라 해도 '국왕'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고, 무쇠를 산출한 드넓은 고장의 영주(領主)였음을 알 수 있다. 제철기술을 가진 여성 영주였던 것이다.

세오녀는 큐슈(九州)의 히메지마(姬島)를 비롯하여, 나니와(難波·요즘의 오사카)와 아와지시마(淡路島)에도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나니와는 물론, 아와지섬 역시 고대의 이름난 제철터였다.

세오녀는, 일본의 무쇠 고장을 부지런히 누비며 철기를 만들고 있었다. 신라에서 아달라(阿達羅)왕과 싸우고 있는 연오랑의 동생 지고(知古)에게, 무기를 계속 조달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달아난 아내와 좇아간 남편'

'일본서기'와 '고사기' '풍토기'등 일본 역사 책은 세오녀를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아내'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한발 먼저 일본에 간 연오랑을 따라 세오녀가 갔고, 그 곳에서 귀비(貴妃)가 되었다고 밝힌 '삼국유사'의 기록에 비겨,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풍토기(風土記)'등 일본 사서(史書)는, 한결같이 '도망친 아내와 좇아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남편과의 관계'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나라 쪽 기록과 일본 쪽 기록이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이 수수께끼의 비밀은, 연오랑과 그 후처 사이에 태어난 한 자손과 얽혀 있다.

그 자손은 훗날 천왕으로 일본을 다스리게 되는데, 그 같이 지체높은 천왕이 '후처 소생'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당시 일본사를 쓴 사람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오랑 세오녀는 끝내 '호적상 이혼'을 당하고만 것이다. 일본사는 이렇게 몇몇 사람의 생각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쓰여져 왔다.

그러나, 세오녀가 살았던 아와지(淡路)와 나니와(難波) 고장에서 연오랑의 발자취를 찾게 되는 것은, 그들 내외가 일본에서도 함께 있었다는 증거로 삼아진다.

훗날 연오랑은, 조상들의 땅인 일본 타지마(但馬·요즘의 효고켄) 지방의 이즈시(出石)에서도 세오녀와 함께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연오랑은 일본에 가서 타지마의 명문가 태씨(太氏)의 딸 마타오(麻多烏)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7세기의 일본 정계(政界)를 주름잡은 제철(製鐵) 대호족(大豪族) 오오노오미홈치(多臣品治)의 조상이 되는 여인이다.

대(大)씨와 태(太)씨, 다(多)씨는 모두 한 집안이었다. 고구려계 예(濊) 사람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명맥을 이어 발해(渤海)를 세운 대조영(大祚榮)도 대(大)씨였다.

연오랑은, 태씨의 딸 마타오(麻多烏)와 결혼한 후, 아들 모로스크(諸助)를 낳았고, 그후 대대로 일본 동북부 지방의 지배자였던 자손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 신라에 있었을 무렵의 세오녀는, 일본 역사 책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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