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이철진作

포항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의 항구 고장에는, '밥식혜'라는 저장 반찬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오랜 전통 찬이다.

홋대기, 도루묵 등 잔 물고기의 내장을 도려내어 잘게 썰어 소금에 버무려 삭혀뒀다가, 밥과 생무우 썬 것을 양념으로 버무려, 삭혀서 먹는 저장 찬이다.

고추가루로 버무린 밥식혜는 현대에 와서 만들게 된 것으로, 원래는 고추가루를 쓰지 않았다. 요즘도, 제사상에 올리는 밥식혜는 고추가루로 버무리지 않고 하얀 채로 쓴다. 이것이 전통 밥식혜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통 방식으로 담은 우리의 '밥식혜'가 일본에 지금껏 전해져 오고 있다.

일본 시가켄(滋賀稷) 오오츠시(大津市)의 전통 찬 '후나즈시(御御)가 그것이다.

오오츠시는,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코(琵琶湖)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는 큰 도시로, 7세기의 한 때 수도였던 고장이다.

이 후나즈시는, 2세기의 옛날, 연오랑이 일본에 전한 우리 밥식혜의 변형이다.

◇…연오랑은 대토목공사 기술자이기도 했다

연오랑은 서기 157년 포항항에서 떠나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이즈모(出雲)항으로 해서 일본에 상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앞서 밝힌 대로, 지금의 효고켄(兵庫縣) 북부해안 케히(氣比)해수욕장 부근에 상륙했다. 당시 '큰칼'의 뜻으로, '기비'라는 우리 옛말로 불리고 있었던 이 고장 일대에서, 칼을 제조하며 제철(製鐵)에 힘쓰고 있던 연오랑은, 그후 남쪽의 비와코 호수 일대로 진출한다.

비와코 호수가는, 사철(砂鐵)만이 아니라, 철강석도 산출되는 무쇠의 산지였다.

이 일본 최대의 풍요한 호수 북단 고을 여고(餘吳)에 당도한 연오랑은, 한동안 이 고장에 머물며, 대공사를 펼친다.

여고마을에도 면적 1.63평방킬로의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근처 산을 허물어 이 작은 호수의 절반을 메꾸어 논을 만들어낸 것이다.

드넓은 농경지(農耕地)가 홀연히 탄생하는 대토목공사였다. 연오랑은 토목공사의 뛰어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여고호수를 내려다보는 산언덕에, 천일창(天日槍) 즉 연오랑을 받드는 진쟈(神社)가 지금도 세워져 있다. '진쟈'란, 규모가 큰 우리나라 서낭당 같은 존재다. 일본의 방방곡곡에 두루 세워져 있어, 마을의 수호신을 받들어 제사 지내고 있다.

이 곳 서낭당 이름은 에레히코진쟈(鉛練比古神社). 고대 이름은 '시라기(白木) 묘진(明神 진쟈'였다 한다.

'시라기'는 '신라'의 일본식 고대 발음이요, '묘진'은 '제철신'을 가리키는 일본 고대어다. 연오랑은 '제철신'으로 받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고대의 제철 기술자는 대토목공사 기술자이기도 했다. 특히 국가 관리자는 제철과 대토목공사를 함께 관장해야 했고, 제염(製炎) 즉 소금 만들기까지 관리해야 했다.

제철과 토목, 제염은 국가경영자가 동시에 펴야 할 기본 과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오랑이 제철과 토목과 제염을 관장했다는 것은, 당시의 신라나 일본에서 국가 관리자의 지위에 있었음을 말한다.

연오랑의 세력은 당시 비와코 호수 남쪽 끝의 항구 고을 오오츠(大津)에도 미치고 있었다. 포항의 옛 식품 밥식혜가, 오오츠의 명품 식품으로 지금껏 살아 남아있는 것이 그 증거의 한가지일 것이다. 호수 북단의 마을 여고와 남단의 항구 오오츠는, 배를 타면 한달음이었다.

다만 오오츠의 밥식혜 즉 흐나즈시에는, 홋대기나 도루묵과 같은 바다생선이 아니라 민물 생선인 붕어가 쓰인다. 비와코는 민물 즉 담수(淡水) 호수이기 때문이다.

민물 생선인 붕어 밥식혜는 비린내가 나서, 요즘 한국인 입맛에는 잘 맞지 않는 편이지만, 연오랑은 이 붕어식혜에 '고국의 맛'을 찾았던 것인가.

근세 일본을 주름잡은 초대 막부(幕府)장군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도, 이 후나즈시를 즐겨 찾아서, 당시 비와코 호반(湖畔)의 오오츠(大津)에는 흐나즈시 특별조달소가 마련되기까지 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예계(濊系)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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