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교수의 역사칼럼 연오랑 세오녀의 진실

이철진作

동해를 향한 일본 항구도시 후쿠이켄(福井縣) 츠르가시(敦賀市)의 케히신사(氣比神社)는, 케히대신(氣比大神)이란 정체 불명의 신을 받들고 있다. 후쿠이켄 으뜸의 신사다.

'케히'란, '긴 칼'을 가리킨 우리 옛말 '기 비'의 일본식 발음이다. 따라서 이 신사가 받들고 있는 신은, 일찍이 긴 칼 즉 대도(大刀)를 만든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간 일본학자들은, 이 신사가 받들어 온 신을 연오랑일 것이라 짐작해 왔었는데, 그 짐작이 맞아든 셈이다. 연오랑은, 포항에 있을 때부터 긴 칼을 만든 단야장(鍛冶匠)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연오랑의 일본 내 활동 범위는 효고켄(兵庫縣) 일대에서 보다 동쪽인 후쿠이켄과 그 남쪽 시가켄(滋賀縣)을 포함, 쿄토후(京都府) 오사카후(大阪府) 일대와, 그 건너 바다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섬 아와지시마(淡路島), 뿐만 아니라 큐슈(九州)까지 널리 걸쳐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중서부의, 무쇠가 캐진 드넓은 지역이다. 무쇠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읽게 된다.

세오녀의 활동 영역 또한 그랬다. 세오녀도 큐슈를 비롯하여, 오사카, 세토나이카이의 섬들을 다니며 철기를 만드는 데 전념했다. 연오랑 세오녀 내외는 그 철기를 신라로 보내어 조국을 도왔고, 일본인에게는 제철 등 선진기술을 가르쳐 일본을 도왔다.

일본의 고대문화연구가 시다하라 타케시(仕田原猛)씨에게 의뢰하여, 이번에 특별히 취재한 곳만 22군데. 그때 찍은 사진의 일부를 다음 호에 소개한다.

◇…서라벌은 백만 인구를 자랑한 도시

서기 157년에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3백여년이 지난 서기 503년의 어느날, 포항 영일만에서는 또 한쌍의 제철·단야(鍛冶) 팀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광(神光·포항시 북구)의 곡강(曲江) 주변에서 사철(砂鐵)을 거두어 모아 철기를 만들던 사신지(斯申支)와 말취(末鄒)의 두 사나이다. 이들은 어느날 왕명으로 원료(사철) 모으기를 금지 당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명을 받는다. 하루 아침에 일을 빼앗긴 이들 기술자는 서둘러 흥해(興海)에서 출항, 일본 이즈모(出雲)로 향한다. 이즈모의 통치자 오호쿠니느시(大國主)의 환대를 받은 이들은, 일본 중부지방 나라(奈良)의 미와야마(三輪山) 주변 강변에서 제철·단야 작업을 펼치게 된다.

이에 관한 기록은, 1989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굴된 암석에 새겨진 231자의 한자 비문과, '일본서기'권제 1 신대(神代) 상(上) 제八단 및 '고사기'상권(上卷) 칠(七) '미모로노야마(御諸山)의 신(神)'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포항은, 고대부터 제철이 흥성했던 고장이다. 제철만이 아니라, 비단 직조(織造)와 제염(製鹽)으로도 손꼽혔다.

특히 흥해는 소금과 쌀 고장으로 손꼽혔고,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의 대상이 되곤 했다. 왜구는, 흥해에서는 주로 쌀과 소금, 신광에서는 철기를 약탈해 갔다. 흥해와 신광은, 곡강을 타면 한달음 거리에 있다.

고대의 포항에서는 토기(土器)도 왕성하게 제조되었다. 운제산(雲梯山)에서 양질의 흙이 거두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포항 바닷가에서 소금을 구웠던 제염(製鹽) 토기는 이 주변에서 구워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철기와 비단과 쌀과 소금, 토기. 그리고 해산물(해산물 중에는 특히 다양한 젓갈이 있었다). 국가 경제를 뒷받치고, 그 여세가 일본에 까지 미친 이 부(富의 '6점 셋트'는, 신라 천년의 도읍 서라벌을 민 원동력이 되었다.

'삼국유사'진한(辰韓) 조에는, 신라 전성기의 서라벌에는 17만8천9백36호(戶)의 집이 있었다고 밝혀져 있다. 한 집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해도, 이 숫자는, 당시의 서라벌 인구가 90만 이상이었음을 가리킨다. 대가족이 함께 산 고대에, 한 집에 다섯 식구만 살았겠는가.

'삼국유사'에는, 순금(金)으로 벽과 난간 등을 치장한 집 '금입택(金入宅)'이 35택(宅)이나 되었음도 밝혀져 있다. 인구 백만의 황금과 무쇠의 도읍이 한반도에 탄생했던 것이다.

신라가 만들어 중국이나 서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한 철기는 주로 신라 도끼와, 반제품인 덩이쇠였다. 신라도끼의 성능은 특히 우수했던 모양이다. 신라도끼를 찬양한 8세기의 '만엽집' 노래가 지금껏 일본에 남아 있다.

신라의 번영을 이끈 그 전진기지로, '근오기(斤烏支)'라 불린 포항이 있었다. 근오기는 '크게 오는 항구'즉 '대항(大港) '의 뜻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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