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재 훈<포항강변교회 목사>

언제쯤 노래인지 기억이 정확하게는 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대중가요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그 노래의 시작도 끝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불현듯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누군가가 지나가듯,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요즈음은 세상이 겁난다.>고 말이다. 솔직히 세상이 겁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겁나는 것이리라고 나름대로 해석했었다. 그런데 그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요지경 세상이라는 무대에 올려진 네 가지 사건의 감상법의 주제는 사랑이다. 우선적으로 이성간의 사랑이다.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조건으로 사귀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남의 아이를 강탈하고, 아이의 어머니는 죽여 버린 사건, 자기 둘 만의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담보로 해서라도 자신의 사랑만은 이루어야 하겠다는 사람들의 병든 감정을 들여다보자. 타인의 사랑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충족시키려는 그 야욕들.

둘째, 재혼 부부 사랑이다. 전처의 아이를 구박하고 학대하면서도 새로 맺은 자신들의 부부 사랑만이 중요하다는 철없는 어른들. 아이들 수준보다도 더 낮은 사랑 법으로 부부간의 연을 맺고 살아보자는 야박한 사람들, 한 아이의 생명의 소중함도 모르는 어른들 같지 않은 어른들의 추악한 사랑들.

셋째, 제자 사랑이다. 교사된 자신의 위치를 한껏 이용하여 한 제자만을 특별히 사랑해 준, 물론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문제가 있겠지만, 어떤 이익을 바랐을 법한 제자를 향한 사랑의 흥정.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주어질 것 같은 제자에게 대해서만 남다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교사.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스승의 사랑.

넷째, 동지 사랑이다. 조합원의 복지를 위해서 일 해달라고 위임받은 노조 임원들이 오히려 취업에 목말라하는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돈을 얻어먹고 일자리를 알선했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횡포에 불과한 사랑이다. 그러한 비합리적인 산업현장의 모순을 처리해 달라는 많은 동지들의 아우성 소리를 외면하고 오히려 돈 잔치를 벌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사람들.

사랑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섬김을 다하는 것, 한 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출발한 재혼의 사랑 역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교사가 제자를 사랑하는 것이나. 선업현장에서 만나야 할 산업동지들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해 줄 동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사랑에 타인의 생명과 재물과 타인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그것은 추하고 더러운 사랑으로 전락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더럽고 추한 사랑이 오히려 정당한 사랑인 것처럼 자리를 잡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 세상이다. 사랑을 외치면서도 다른 사람의 사랑은 보지 못하고 자기 사랑에만 집착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희생과 배려와 섬김에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다. 참된 사랑은 언젠가 버리고 떠날 수 있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나만의 소유, 나만의 집착, 나만의 욕심, 나만의 충족을 위한 사랑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잃어버릴 각오를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겠지만, 누리고 차지하고자 자기 이익에만 눈 먼 사람들의 사랑은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요지경 세상에 우리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문득 원재훈 님의 <잃어버려야 할 것을 찾아서> 라는 시 구절 한 부분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모두를, 모든 것을 가지고자, 모든 것을 가진 듯, 자신의 온몸에 족쇄를 채우지만 뙤약볕에서 조금만 더 길을 걷다 보면 하나 씩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생명을 걸었던 귀금속도, 허기를 채웠던 밥그릇도, 사랑스러운 식구도, 그것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모든 음악들도, 제비처럼 날리던 지혜도, 지식도, 결국은 마음마저도 내려놓아야 한다. 이 길 위에 수없이 많은 자잘한 돌멩이들, 돌멩이로 남아 뒹구는 사연이 읽히기 시작한다. 그땐 눈물도 나지 않으리. 눈물을 담을 마음도 없으니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하리. 잃어버릴 그 무엇을 찾아 떠났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서 있던 그곳에서 한 그루 보리수나무로 남을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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