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봉사활동 대구 학정동 김을선 할머니
20여년 봉사활동 대구 학정동 김을선 할머니
  • 홍종환 명예기자
  • 승인 2012년 11월 25일 21시 27분
  • 지면게재일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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삯바느질·콩나물장사로 돈벌어 '통큰 선행'
삯바느질과 콩나물장사로 돈을 벌어 20여년째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대구 북구 학정동 김을선 할머니.

김을선(77) 할머니는 긴 한숨과 눈물부터 쏟아내셨다. 대담은 처음부터 말씀이 반 눈물이 반이었다. 필자는 당혹스러웠고 눈길을 어디에 둬야 좋을지를 몰랐다.

저는 19살에 시집가던 첫날밤 어머님이 기절하셔 돌아가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신랑은 6·25에 참전하여 수류탄을 맞고 온 몸에 중상을 입은 상이용사였습니다. 저는 곧바로 엄마의 뒤를 따라 죽으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신랑을 다시 볼 때마다 까무러쳤으나 죽지 않고 되살아났습니다.

저의 혼사는 전쟁 직후라는 당시의 사정도 있었지만 사돈 될 사람도 만나보지 않고 좋은 가문이라는 소문만 믿고 어머님이 혼인을 승낙했던 것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 있을 수가 없어 다시 밤중에 철길 위에 누웠습니다.

하지만 운명일까요? 제가 죽으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비몽사몽간에 저는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어머님을 따라 죽는 것이 어머님의 뜻도 가문을 위하는 일도 아님을 어머님은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신랑을 다시 보았습니다. 신랑은 당시 격전지였던 백마고지에서 결사항전 온 몸을 던져 전공을 세우고 살아오긴 했으나 얼굴, 팔, 다리 어느 한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었습니다. 신랑은 공산당의 불법 남침을 몸으로 막아냈고 후방의 무고한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낸 은혜로운 희생자였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론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고 힘이 들 때는 조국과 하늘이 제게 맡긴 사명이라고 자신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삯바느질, 보따리장사로 시작해 건축업을 하기까지 돈도 많이 벌고 망해가던 가문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잊지 못할 일은 첫딸을 영양실조로 잃은 일과 시숙(남편의 형)의 박해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첫 딸을 영양실조로 잃으셨다고요?

"저는 첫딸을 못먹여서 죽게 하였습니다. 6·25 직후는 흉년이 들어 시골서는 풀뿌리도 캐먹고 살았는데 제가 첫딸을 낳고 손위 동서가 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고 죽었습니다. 당시 집안에서는 아들은 소중했고 딸은 천덕꾸러기였는데 그러다보니 시어머님의 성화도 있고 해서 제 딸은 뒷전이고 조카를 젖을 먹여 키우다가 딸을 잃은 것입니다. 남들은 운명이라 했지만 저는 또 한번 딸하고 영원히 죽고 싶었습니다."

-형 대신 군에 가서 불구가 되었는데 동생한테 못된 짓을 했다지요?

"당시엔 군에 가면 죽거나 다치니 서로 안 가려고 했고 형제가 있는 집에서는 형이 반드시 군엘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형이 계속 피신을 하니 동생이 대신해서 군대를 갔다가 중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형은 날이면 날마다 도박과 음주로 집안을 쑥대밭을 만들었고 부인이 죽자 어머님과 4남매를 저한테 떠 넘겼는가 하면 정부에서 상이용사한테 먹고 살라고 송아지 한 마리 준 것까지도 다 키워 놓으니까 몰고 갈 정도였습니다. 남부끄럽고 분했던 당시의 심정을 말로는…. 그래도 저는 시어머님 모시고 조카 4남매를 다 키우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5남매 자랑 좀 해주세요.

"5남매가 다 대학을 나와서 석사·박사가 되고 명문대학과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으니 솔직히 자랑을 좀하고 싶지만 효자 효녀인 자식들이 엄마가 힘들게 살아온 것을 세상에 알리면 그것이 의도적인 자랑으로 비칠까봐 걱정을 해서 자식들의 뜻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 딸들은 엄마의 전화 목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불편한지를 금방 알아차리고 밤중에도 차를 타고 달려오고 한가지도 불편하지 않게 해줍니다. 저는 초년에는 죽을 고생을 했지만 장성한 자식들이 사회에 나가 성공하고 효성도 지극하니 지금은 이세상 누구보다도 호강을 하고 있습니다."

-모진 고생 끝에 번 돈인데도 많은 봉사를 하셨더군요?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지만 꼭 필요한 곳에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첫딸을 영양실조로 잃은 것이 한이 되어 돈을 좀 벌자마자 보육원과 청소년 시설을 찾아갔습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이대분(청소년선도위 전 총무)씨가 양해를 구하고 조언해 주셨다.

"저는 10년 동안 총무로 일했지만 회장님이 삯바느질, 콩나물 장사까지 한 것은 전혀 몰랐고 워낙 통큰 봉사를 하시길래 대단한 사업가로 알았습니다. 지금도 주위에선 회장님을 돈 잘벌고 봉사 잘하는 여장부라고 합니다. 옛날엔 보육원이나 고아원 같은 곳엔 이불도 부족하고 먹을 것도 없었는데 20여년 좋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새마을지도자로 나서는가 하면 부녀회장도 맡아 도시 며느리들한테 본보기가 될 일도 많이 해 대구MBC방송에 장한 어머니로 출연도 했고 아직도 고통 받는 이를 도우면서 지난날의 삶을 잊지 않고 살아가셔 우리들에게는 '인생의 등대' 같은 어르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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