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서예의 명맥 잇는 선구자
전통 서예의 명맥 잇는 선구자
  • 이정희 명예기자
  • 승인 2012년 12월 23일 21시 35분
  • 지면게재일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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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문인화협회 향사 손성범 회장
경북문인화협회 향사 손성범 회장.

사람이 가진 예술적인 재능은 그것을 일찍이 알아서 개발하지 못하면, 자신이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기 쉽다. 자신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그것을 연마하여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루고, 명성을 얻고, 사회에 기여까지 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 복된, 선택받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가 있다. 거기다가 경제적인 후원자까지 있다면 남의 부러움을 살만 하다.

포항 여류서화계의 얼굴이고, 포항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향사 손성범 선생이 그런 분이다. 일반적으로 붓글씨를 쓰고, 사군자를 치고, 묵향을 가까이 하는 작업은 나이가 좀 지긋해서 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런 분들이 많은데 향사 선생은 스무살 젊은 나이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서예에 입문했고 빠른 시일에 재능을 나타냈다.

선생은 국전에, 입선 여덟 번 특선 한번을 했고 포항 최초의 국전 초대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포항 서예인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영일만 서예대전'을 13년째 열고 있으며, 경북문인화협회를 창립해서 회장직을 맡고 있고 포항여류서화가 협회 회장직도 맡고 있다. 또한 대구 경북의 여러 비중 있는 초대전, 회원전의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향사 서실을 열어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고 여성회관, 연일복지관 등에 출강도 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서예에 입문하시게 되셨는지요?

"고모님이 대구에 계셨는데 저가 학교 졸업하자 대구로 불러서 고모부님이 죽농(竹農) 서동균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본래 서당에도 다니고 글씨에 좀 관심이 있었거든요. 선생님에게 정말 열심히 배웠는데 십년 쯤 후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서울로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서실은 언제 시작 하셨습니까?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또 서울로 공부하러 다녀야 하니 서실을 연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지요. 그런데 결혼할 때 제 작품으로 시부모님께 병풍을 해 드렸는데 시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시고 인정해 주시고, 또 표구점에서 젊은 새댁이 어찌 이런 작품을 할 수 있느냐고 놀래면서 서실을 열라고 권했어요. 그래도 나는 가정이 소중하고 아이들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표구점에서 듣고 입소문으로 사람들이 배우겠다고 집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서 시작을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많아져서 하는 수 없이 서실을 열었습니다. 서실을 하니까 공부를 더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 계속 서울로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죽농 선생님께서 '잘못 가르치는 것은 큰 죄'라고 하셨기 때문에 글씨 따로 그림 따로 계속 배웠습니다. "

-즐겨 그리시는 소재는 무엇인지요?

"제일 좋아하는 것은 죽(竹)이고 연도 즐겨 그립니다. 대를 그리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기가 다 발산되는 것 같고 내가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서예, 문인화는 정적인 것 같지만 동적입니다. 불심이 깊으면 연이 잘 그려진다고 해서 절에도 자주 가고 경주 서출지, 안압지, 연도 그립니다. 잘 그리려면 많이 보고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서실을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으셨다면서요?

"예, 가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내가 역사에 남을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도 아닌데 공연히 남편과 아이들 고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적당히 하자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집과 서실, 남편의 일터를 한곳에 모으려고 남편을 졸라 이 집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식구들 챙기면서 서실도 하니 마음이 편합니다."

국전에 초대작가가 되기 전 까지는 결코 개인전을 열지 않겠다는 당찬 원을 세운 선생은 국전에 특선하고, 입문 30년 만에 국전초대작가가 되고, 서울의 예술의 전당 2,3층 전관에서 140여점의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연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서울의 서예가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예술의 전당 전관 전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선생의 힘 있고 유려한 작품이 인정을 받은 것이겠지만, 그녀의 예술적인 재능을 살려 꾸준히 외조를 해 주고, 선생이 국전에 특선했을 때, 아내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던, 사랑 깊고 도량(度量) 있는 부군(夫君)의 공일 것이다.

선생이란 먼저 배웠다는 것 뿐이라며 제자들과 늘 함께 공부하는 향사 선생, 그녀는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고 그중에는 국전 초대작가 2명, 경북 초대작가가 13명이나 된다. 좋은 작품이 나오려면 자연을 가까이 하고 마음이 맑아야 한다며 다도와 글쓰기로 마음을 닦는 향사 선생은, 향기롭고 맑은 삶에, 가족의 사랑까지 그득해서인지 손주까지 본 선생의 얼굴은 아직도 웃음이 해맑은 동안이다. 선생의 사랑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서실에서 역사에 남을 명작이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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