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드리는 100가지 감사 이야기

최우혁(해군6전단 상병)

◆먹고 자고 입고

감사 하나.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은 저의 영원한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으로 인하여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분이시며 당신들과 함께 이 세상에,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부모님, 제가 첫째이자 장남으로서 우연히 유산을 하고 저를 낳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여나 부모님께서 이런 말을 하면 너무나 큰 상처를 받으실까봐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비로소 이 감사편지를 통하여 말씀드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하늘로 보낸 제 형 일수도 있고 누나일 수도 있는 그 핏줄을 통해서 비로소 제가 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게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께 상처가 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저를 어렵게 낳으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임신이 안 되시어 갖은 방법을 다 이용하여 저를 낳으시려고 노력하였고 4년 만에 저를 낳으셔서 큰 기쁨을 안겨드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 아닌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서 너무나도 큰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던 저에게 커다란 빛을 안겨주셨고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서 부모님과 눈을 마주치며 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만약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큰 불행과 아쉬움으로 남겨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저를 태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이젠 부모님께 보답해드리고 싶습니다. 또 다른 생명을 얼른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부모님께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제 나이가 23살, 결혼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이지만 부모님께서 저를 낳으시느라고 허비한 시간만큼 얼른 새 생명을 부모님께 안겨드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결혼은 네가 편할 때 해라. 네가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히 있고 네 마누라와 자식을 부양할 수 있을 때 하라는 말씀을 하시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축복을 안겨준 만큼 부모님께 새 생명을 곧 안겨다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둘. 어릴 적 몸이 허약해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려다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는 어릴 적에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시골에 살아서 병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 가야하는 거리를 매일 저를 업고 가셨다는 걸 기억하고 또 주변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급성 천식을 동반해 저녁마다 깨서 부모님을 귀찮게 해드렸다는 것 또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병원에 데려다 주신 것을 비롯해 아파서 밤마다 울어대면 저를 업고서 밖으로 나와 울음을 그칠 때 까지 밖에서 서성거렸다는 것 또한 감사합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단순한 지병이라고만 했는데 완쾌하지 않고 몇 년 동안 계속 아팠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랫동안 그 병을 끌고 가서 호흡기에 좋다는 음식은 다 챙겨주셨다는 것도 감사합니다. 몸이 많이 아파서 그런지 기력도 많이 잃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사람이 퀭하게 보였고 의지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게 제가 몸이 아파서 그런 줄 아시고 몇 년 동안 지속된 급성 천식을 고치기 위해 무엇이든 많이 먹이셨고 식탁에 앉으면 반찬을 모두 제 쪽으로 밀어주시며, 밥 공기기가 비어갈 때쯤이면 제 밥그릇을 가져가 밥을 또 퍼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그만 먹는다고 하면 많이 먹어야 빨리 낫는다면서 매 끼니마다 배가 터지도록 먹은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저를 먹이려고 했는지 깨달아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학교에 들어갈 때쯤에 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깨달았습니다. 남들보다 체구도 작았으며 소심한 성격 탓에 더욱 약해보였습니다. 그리고 몸이 많이 허약하여 병원을 계속 달고 다녔었는데 그 때문에 부모님께서 끼니를 많이 거르셨습니다. 제 아픈 몸 챙겨주시느라 본인들은 밥을 먹지 않거나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신 것도 많이 봤습니다. 지금도 그렇지요. 맛있는 게 있으면 항상 저를 먼저 챙겨주시고 본인들은 챙기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게 진정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젠 저는 전혀 아프지도 않고 너무 건강해서 살까지 조금 찐 것 같습니다. 그런 부모님들을 제가 이제 챙겨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몸이 약할 때 병원에 데려다 주신 거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셋. 시골의 따뜻한 집을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주변 길거리나 지하도를 지나다보면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럴 때면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서 살게 해준 부모님께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남들처럼 높은 아파트에 살거나 도회지에 살지 않게 한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데 그렇게 삭막한 곳에서 쭉 살았다고 하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옛날, 어릴 적에는 집에 대한 불평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빌라나 아파트에 살았는데 저는 기와집의 허름한 집에서 살아 부모님께 이사를 가게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처럼 아파트에 살고 싶고 사람도 별로 없는 이런 곳에서 살기 싫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할 때면 부모님께서는 다음에 꼭 이사를 가게 해준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저에게 이런 집을 살게 해 주신 것이 미안셨다고 나중에 말씀하셨을 때 저는 부모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제게 집을 어떻게 마련한 건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비록 옛날에 지어져서 오래되었지만 그 집에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님이 결혼하고서부터 지금까지 간직해온 소중한 집이라는 걸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히 도회지에 나가 월세나 전세를 얻어 집을 장만할 바에자기 집을 갖고 있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이 또 두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처음엔 한 방을 창고로 쓰고 한 방에 네 가족이 모두 같이 잤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땐 네 가족이 오순도순하게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나 정말 행복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구석에서 자고 있으면 저를 안고서 이불을 덮어주시던 기억과 여름에 더울 때면 온 가족이 모시이불을 덮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잠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은 제가 살고 평생을 함께했던 집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천장에 살고 있는 쥐들을 잡아본 적도 있고 벌레들이 꼬여서 한밤중에 잠을 설친 것도 다 추억이라 생각합니다. 집이 부실하거나 허약해서 부서지거나 어디가 무너지면 아버지께서 고쳐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은 추억이 묻어나 있는 최고의 집이며 다시 한 번 따뜻하고 포근한 집에서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넷. 겨울 철 매일 군불을 떼다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시골집이라 겨울철엔 유난히도 추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눈도 많이 있었고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었죠. 그래서 유일하게 따뜻했던 곳은 안방 건너편에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군불을 뗄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이 방에서 겨울에 추운 몸을 녹이면서 자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다 아버지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군불을 떼 주셨기에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나물을 하러 가자고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산에 가셨습니다. 이제 컸으니 나무를 하는 방법도 배워야하기 않겠느냐며 데리고 가셨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주워 다 지게에 올리는 모습이 아버지는 귀여우셨나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낫을 들고 잔가지를 쳐내시고 톱으로 나무를 쓰러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힘이 좋으셔서 그런지 몇 번 톱질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나무는 힘없이 푹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게 좋다고 옆에서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도구들을 들고 아버지는 경운기에 한 가득 장작을 실어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나무들을 도끼로 패는 일이 남았었는데 나무의 결을 따라서 치면 힘을 들이지 않고 자를 수 있다며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끼를 낑낑거리면서 들어 올려 나무를 치니 몇 번 나무가 튕겨져 나가 애를 먹었는데 계속하니 익숙해져서 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어느 시대에서 살다왔냐고 물어보는데 기름보일러를 가지고 난방하는 요즘 세상을 보면 시대가 날로 발전해 가는구나라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그렇게 장작을 패고 집구석에다가 쌓아놓으면 그 해의 겨울, 나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만약 불을 떼고 새벽에 또 춥다 싶으면 아버지께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 방이 차가워지지 않도록 다시 불을 떼 주시곤 하였습니다. 이제 힘드시니 제가 아버지, 어머니 방에다 군불을 떼어 드리고 싶지만 그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군불을 떼면서 그 아궁이 밑에서 고구마도 구워먹고 생선도 구워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나는 참 복 받았다는 걸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위해 겨울철 따뜻하게 방을 데워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다섯. 자기 입을 것 아껴가며 저를 위해 옷을 사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어릴 적, 저는 옷이나 신발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부모님께서 사주시는 대로 입고 다녔으며 옷이 헤지면 부모님께서 꿰매주시고 신발이 너덜해지면 그제야 신발을 새로 사 신었던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제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좀 많아졌습니다. 남들은 브랜드 있고 유명한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는데 저만 시장에서 산 것들을 입고신고 있으니 그 때는 왠지 모르게 조금의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데리고 유명 매장에 간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너무 기분이 좋아 갖가지 옷을 사달라고 떼썼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이것만 사고 나중에 다른 걸 사자라고 하셨지만 저는 계속 사달라고 우겼습니다. 하지만 그 옷 한 벌을 사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입을 옷을 몇 벌이나 사지 않아야 된다는 걸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때 철없이 굴었던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사고 나서도 옷에 대한 욕심과 신발에 대한 구매 욕구는 줄어들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매일 비슷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보고 그런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습니다. 당신은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가격을 더 깎아서 옷을 사는데 저를 위해서라면 사주려고 하는 그 마음에 눈물까지 고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드리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괜찮다,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추우니 외투라도 하나 걸치고 나가야 하지 않겠니?”라며 그 다음날에 바로 옷을 구입해 주셨는데 조만간 꼭 제가 옷 한 벌 해서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옷에 대한 기호와 취향도 있는데 부모님이 어떤 옷을 좋아하고 어떤 색을 입지 않는지조차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옛날엔 저만 생각했다는 증거인 것 같습니다. 이제 부모님에게 직접 물어봐서라도 부모님이 원하시는 옷을 한 벌 제대로 맞춰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젠 제가 돈 벌로 독립할 때도 되었으니 그만한 능력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데 돈 썼다고 부담스러워 하시고 당연히 아들이 해야 하는 도리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자기 입을 것 아껴가며 옷을 사주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감사 여섯. 필요한 것 없냐고 매번 물어봐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바쁜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도 항상 부모님께서는 제게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봐주셨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자사전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편리성과 일반 사전을 찾는 것에 비하여 단축성이 있어 부모님께 전자사전을 하나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유가 되지만 다른 친구들이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어 나만 소외감을 느낄까봐 사달라고 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가격은 한 달 기숙사비와 맘먹을 정도로 비쌌지만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사주셨습니다. 제가 일반 사전이 있었지만 너무 찾기에 귀찮아서 사달라고 했던 것인데 지금은 너무 후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 하나 편하자고 했다는 것이 참 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전도 샀으면 제대로 써야 부모님을 만족시켜드리는 일인데 사전으로 허튼 짓이나 하고 많이 쓰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자사전 말고도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며 PMP를 사달라고 했었는데 전자사전보다 훨씬 비싸서 부모님께서 약간 주저하시는 것 같았는데 결국 사주셨습니다. 그 때 마침 아버지께서 약주를 하시고 집에 들어오셔서 제게 저를 붙잡아 놓고서 제가 원하는 건 얼마든지 마련해준다는 말을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필요한 것이나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전자사전과 PMP를 사기 위해서는 생활비를 얼마나 아껴야 하는지 모르고 무턱대고 그랬다는 것이 다소 후회가 되지만 그로 인해서 제가 많은 편리성과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제 저에게 말씀하지면 됩니다. 저에게 그만큼 필요한 것을 해주신 만큼 이제 제가 필요한 것을 사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제가 부모님이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서 사드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필요한 것으로 사드리면 가장 부모님께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걸 왜 사왔느냐는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부모와 자식사이에는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제가 필요한 것들을 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 일곱. 수능 친다고 보약을 해 먹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집과 떨어져서 학교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3년간의 기숙사 생활 중에 단연 힘들었을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물론 시험에 대한 부담감과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하여 살이 매우 많이 빠졌습니다. 살이 원래 10kg가까이 빠졌다가 어머니께서 그런 저를 보시고는 보약 한 채라도 지어먹어야 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땐 어머니의 그런 정성조차 정성으로 느껴지지 않고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약을 안 지어줘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결국 어머니께서는 제게 보약을 지어주셨습니다. 왜 이런 걸 해줬냐고 물어봤더니 공부한다고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그랬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주변의 친척들이 하시는 말씀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친척분들이 부담스러운 질문들을 해서 방문하기가 꺼려졌지만 어머니께서는 자주 방문하여 저의 모습이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셨나 봅니다.

그런 말을 듣고 어머니께서는 저희 학교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도 바쁜 일 때문에 참석하지 않아서 고등학교 생활하는 내내 어머니를 학교에서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의도치 않은 방문을 해주셔서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끙끙거리면서 보약을 들고 학교 기숙사로 찾아와 하루에 세 번 꼬박꼬박 먹어야 살이 찐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정성을 들여서 해주신 보약이니 한 끼도 거느리지 않고 매일매일 먹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먹고 나니 살도 다시 찌기 시작했고 기력도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했던 체력도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수능까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그 덕분에 수능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자신감도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때에 어머니가 제게 보약을 건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저를 위해서 단순히 그랬다는 것도 너무 감동이었습니다.

요즘에 어머니를 보면 너무 기력이 쇠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기력을 너무 많이 빼앗은 건 아닐까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보약을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덟.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고 신경써서 음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던 시절에 집에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 낙은 부모님께서 저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는 것이었는데 너무나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특히 좋아했던 음식은 삼겹살이었는데 제가 집에 갈 때면 항상 많이 사서 구워주셨습니다. 제가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당신들께서는 고기엔 손도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집에 있을 때 빼고는 부모님께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식사를 안 하실 때도 있고 아니면 하루 종일 바빠서 굶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저한테 그렇게 해주시기에 당연히 평소에도 부모님이 그렇게 드시는 줄 알았기에 더욱 부모님께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줄줄이 다 꿰고 있는 것도 부모님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저를 키워 오셨기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웬만한 관심이 아니면 부모 자식 간에도 힘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먹는 음식들은 식탁위에 올라와 있어서 제가 음식 투정을 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먹는 음식, 좋아하는 음식 이외에도 못 먹는 음식은 식탁에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못 먹는 음식이라기보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음식들은 철저히 배재해주셔서 안전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커서도 알레르기의 음식들을 배재해 주셨지만 이젠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으니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 부모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제가 원하는 음식만 해주셔서 그런지 그게 그땐 당연한 것 인줄만 알았습니다. 당연히 식탁에 올라와 하는 것인 줄 알았고 그렇게 성가신 일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식사를 한 번 차리려면 1~2시간 정도 주방에서 지지고 볶고 더운 여름날에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중노동 비슷하게 일을 하신 것인데 너무나도 죄송스럽습니다. 그에 비해서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은 너무나도 많다고 느꼈습니다. 뭐든지 잘 드시고 맛있게 드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부모님들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만간 제가 번듯한 레스토랑에서 두 분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음식에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홉. 혹시나 감기에 걸릴까봐 매번 꿀물을 타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호흡기가 많이 약했던 것도 부모님께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한 번 감기에 걸리면 오래가고 기침도 많이 하여 고생을 많이 해서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밖에서 한참 놀다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씻기시고 청결을 우선시 하였습니다. 세균에 오염되어 혹여나 감기에 걸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씻고 나면 꿀물을 타다가 먹으라고 제게 주셨습니다. 달짝지근하고 맛있어서 몇 잔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몸의 체온도 올라가서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감기에 걸리면 그때부터는 지극적성으로 저를 돌봐주셨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한밤중에도 계속 기침을 해서 너무 고생했는데 부모님께서 따뜻한 꿀물을 내오시면 잠시 동안은 기침이 잦아들어서 편안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부모님에게서 제가 태어났는데 부모님께서도 기관지가 약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저만 기침하고 힘든 줄 알았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감기에 걸리시면 사래가 들 정도로 기침을 하십니다. 자기를 안 챙기시고 저를 먼저 챙기는 모습에 모습은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감기나 기침에 좋다는 배즙이나 도라지도 제가 공부하는 책상 위에 항상 올려놓으시고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호흡기도 괜찮아졌고 감기도 잘 안 걸리지만 부모님께서는 쇠약해지셔서 그런지 감기에 걸리신 모습을 부쩍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평소처럼 일하시고 자기의 몸 관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보단 자식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먼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젠 부모님의 몸도 조금은 챙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몸에 좋으신 음식도 많이 드셔야지 제가 맘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호흡기가 약한 부모님을 위해 무엇을 해드리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좋은 공기 마시며 좋은 곳에서 살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꼭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 호흡기 질환에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 자취할 때 반찬을 매번 보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자취는 대학 와서 본격적으로 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서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있어 부모님께서 많이 서운해 하셨는데 대학에 들어와서도 자취를 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있게 되니 너무 많이 아쉬워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내색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처음 자취를 할 때 어려움이 진짜 많았습니다. 청소며 설거지며 각종 살림살이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다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고 생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은 음식을 하는 것이나 밥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그래서 반찬을 바리바리 싸다가 택배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혹여나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봐 잘 챙겨먹는다고 하였지만 거의 밥을 챙겨먹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거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게 저에겐 편했고 밥은 처음에 할 줄도 모르니 그냥 모든 게 귀찮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부모님께서 집에서 먹는 반찬이 먹고 싶을까봐 택배로 제가 자취하는 곳에 보내셨는데 그 안엔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정말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보내주신 것 중에 생닭은 각종 한약재가 다 들어있어서 그대로 고아서 먹기만 하면 되었고 어릴 때 자주 먹던 시금장도 보내주셨습니다. 시금장은 게를 갈아서 장으로 만든 것인데 밥이랑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습니다.

제게는 참으로 지독한 자취였는데 밥도 할 줄 모르는 저에게 음식을 하는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콩나물국부터 끓이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조미료를 되도록 이용하지 말고 콩나물국을 끓일 때는 뚜껑을 절대 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비린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에서 만든 된장도 보내주셨는데 따로 육수를 내지 않고 물에다 그냥 끓여서 먹어도 참 맛있었습니다. 야채만 조금 썰어 넣으면 그걸로 끝이였으니 참으로 편했습니다. 집에서 재배한 채소들도 보내주셨는데 배추, 당근, 고추 등 골고루 보내주셨습니다.

지금은 군대에 있지만 가끔 부모님이 해주시는 반찬과 음식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고 앞으로 부모님의 음식들을 계속 먹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자취할 때 맛있는 음식과 반찬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하나. 매번 더러워진 교복을 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중학교 시절, 교복을 입으면 빤지 하루만에 더러워지곤 했습니다. 매일 같이 뛰어놀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소매 끝이나 목덜미 뒷부분이 새까매져서 꾸지람도 많이 들었습니다.

교복을 한 번 벗어놓으면 어머니께서는 제 교복을 가지고 욕실로 가셔서 칫솔로 때가 탄 부분이 없어질 때까지 문질러 주셔서 말려 다음날에 학교에 입고 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직접 했더라면 그런 수고는 덜어드릴 수 있었을텐데란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매일 그렇게 교복을 빠는 것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라는 걸 제가 자취를 하고서 깨달았습니다. 일을 하시고 집에 돌아와서 제 교복이 더러워졌는지부터 확인하시고 제가 밥을 먹고 있는 동안 빨아놓으시고는, 깨끗하게 입어야 3년을 입는다라는 말을 남기시는 부모님이 저는 당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한번은 교복이 너무 더러워져서 아예 세탁까지 했는데 다음날까지 마르지 않아 드라이기로 말려서야 그 날 교복을 입고 갈 수 있었습니다. 빨리 말려달라고 성화를 부린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게는 약간의 게으름이 있어서 빨래 이외에도 자질구레한 건 모두 어머니가 처리해주셨습니다. 방이 어질러져 있으면 그냥 묵묵히 치워주시고 가끔 공부를 하고 있으면 책상을 정리해주시고 TV를 보다 잠이 들면 제 방에 들어와서 꺼주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것들은 다 사소하지만 저를 사랑하는 행동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교복을 이제 입지 않게 되었을 때 우연히 옷장을 열어본 적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세탁되어서 옷장에 들어있어서 어머니께 물어봤더니 제가 3년 동안 입은 걸 버릴 수 없다고 하시며 그렇게 고이 드라이까지 하셔서 걸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껴주시고 소중히 생각해주시는 것에 대해 조금은 놀랐습니다. 만약 오래되고 누추한 옷을 제 자식이 입고 있다면 저는 주저 없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그 마음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사드리는 오 t이나 물품들은 아껴놓지 마시고 마음대로 쓰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시 한 번 매번 더러워진 교복을 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둘. 매달마다 목욕탕에 데려다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시골에 살아서 목욕탕에 갈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습니다. 목욕탕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30분이상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저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셨습니다. 한 번 목욕탕에 갈 때면 어릴 적엔 어머니를 따라 여탕에 들어가서 어머니가 때를 다 벗겨주셨습니다. 제 등판을 돌려놓고 때를 밀고 팔다리를 잡고 때를 밀고서는 때가 너무 많다며 저를 놀리셨던 모습이 새삼 떠오릅니다.

저는 목욕탕에 가는 게 싫어 얼른 나오고 싶어서 대충 씻고 나오려하면 어머니는 저를 붙잡아 놓고 탕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탕에서 이리저리 물장구를 치고 있으면 그제야 어머니는 씻고 때를 미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빨리 나가자고 보채면 저를 달래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조금 더 커서 남탕에 혼자 가게 되었을 때에도 제대로 때를 밀지 못한다며 때밀이 아저씨를 붙여주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시원하게 때를 밀고서 밖으로 나오면 외식하기가 힘들어 가끔 자장면을 사주셨습니다. 흔치 않은 먹을 거리였기에 건더기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의 먹는 모습만 봐도 흐뭇하신지 별로 드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몫까지 저에게 덜어다주시며 많이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짬뽕을 자주 시켜 드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남은 걸 제게 다 덜어주시고는 배부르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목욕탕에 갈 때 말고도 집에서 목욕을 할 때가 더러 있었습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날, 목욕을 했던 기억이 가장 많이 떠오르는데 그 때 들어오셔서 힘을 써가면서 저의 등을 밀어주시고는 지친 기색을 보이셨습니다. 제가 혼자 씻을 수 있는데도 제가 씻으면 제대로 씻지 못한다며 타울을 뺏어서 밀어주셨습니다. 제 등에 밀린 때밀이의 감촉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철부지 어린애가 아닙니다. 그만큼 부모님도 제가 성숙했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주시고 저의 정성을 받아주실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는 정성을 조금도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제가 이젠 부모님의 때를 밀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목욕탕에 갈 때마다 때를 밀어주시고 신경 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열셋. 계절마다 제철음식을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해마다 계절이 바뀌고 풍경도 바뀌면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도 매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번 바뀌는 제철음식들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먼저 봄이 되면 산뜻한 봄나물이 밥상에 올라오고 냉잇국이 국으로 나왔습니다. 산뜻한 봄나물은 밥맛을 한층 돋구어 주었으며 냉이국은 쌉싸름한 게 아주 맛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재배해서 직접 먹으려고 키우는 딸기밭에 가보면 딸기들이 웅크리고 옹기종기 앉아 있어서 그걸 따겠다고 달려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봄날이었고 그런 밥상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무엇보다도 시원하게 만들어주시는 콩국수가 일품이었습니다. 콩을 재배하여 직접 갈아서 국물을 걸쭉하게 내어 잘 반죽한 밀가루를 총총 썰어서 얼음에 콩국수를 띄워 먹으면 시원하고 더위가 싹 달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가을에는 그렇게 특출한 음식은 없었지만 추수를 하는 계절이라서 뭔가 음식들이 풍성했습니다. 그 계절엔 먹어도 또 배가 고프고 계속해서 먹어서 살이 많이 쪘는데 잘 먹는다면서 계속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엔 군불에다가 갖가지 음식을 구워주셨습니다. 고구마나 감자를 호일에 싸다가 구워먹으면 어느새 입가와 손에는 새까만 것이 묻어 나오곤 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 뿐 아니라 개울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잡아다 내장을 다 빼내어 불에다 구워먹으면 고소하니 참 맛있었습니다. 물이 차가운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직접 맨손으로 고기를 잡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제철음식을 매번 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다양한 음식을 먹게 해주셔서 남들과는 조금은 다른 생활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남들이 잘 먹어보지 못하고 생소한 음식들은 먹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뭐 드시고 싶으신 것이 없으신지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제가 직접 음식을 해드리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나중에 결혼을 해서 제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얼른 대접해 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철음식을 계절마다 그렇게 해주셨으니 그만큼 제가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계절마다 제철음식을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열넷. 웬만한 음식들은 모두 손수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장을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웬만한 음식들은 모두 다 만들어주셨습니다. 남들은 쉽게 밖에 나가서 외식을 즐기고 맛있는 걸 많이 사먹지만 저는 그런 것에 익숙해지지 않아서인지 부모님께서 직접 해주시는 음식들이 훨씬 다른 것보다 맛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해주시는 음식 중에 가장 최고의 음식을 몇 가지 고르자면 직접 밀가루를 입혀 튀긴 돈가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기를 몇 근 사서 평평하게 편 뒤에 빵가루와 튀김가루를 입히고 튀기면 바삭바삭하고 맛이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속까지 바삭하게 잘 익어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돈가스 말고도 고추와 각종 채소들을 튀겨주신 종합전도 맛있었습니다. 고추 같은 경우는 풋고추를 사용하여 배를 갈라 안에 있는 씨를 다 제거하고 튀겼으며 감자와 고구마는 얇게 썰어서 간장에 찍어 먹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정말 배불렀습니다. 채소들도 튀겨서 먹으면 색다른 맛이 나 간식거리는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튀긴 음식 말고도 어머니께서는 떡국을 참 맛있게 끓이셨습니다. 직접 집에서 재배한 쌀로 가래떡을 뽑아내어 방금 막 나온 떡을 송송 썰어서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은 육수와 함께 끓여서 그 위에 고명과 김을 얹어 먹으면 배가 불러도 숟가락이 계속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떡국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렇게 해주시는 음식들 중에서 어머니의 손길이 하나도 안 거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고 바쁘시면 아버지는 저희를 위해 색다르게 음식을 해주셨습니다. 절대로 평범한 음식은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라면 하나를 끓일 때에도 전날 먹던 육개장에다가 라면을 끓여서 맛을 한층 돋구어 주셨고 생선 같은 것도 그냥 튀기는 것이 아니라 생선 안에다 당면 같은 것을 넣어서 씹히는 맛이 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요리를 잘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리를 잘 하지 못하여 그런 부모님의 능력이 부럽기만 합니다.

다시 한 번 웬만한 음식들은 손수 다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다섯. 저의 감수성을 키워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에게 혼나거나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면 잘 울고 그래서 부모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저도 이런 성격 때문에 스스로 많이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잘못해서 부모님께 혼나고 있을 때 아무 말 못하고 그냥 끙끙 대고 있으면서 눈물부터 고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참으려 매우 노력하는 데 흐르는 눈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은 남자가 그렇게 울면 못쓴다,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 어디에다가 남자의 위신을 세울 수 있겠냐 등 그런 말을 많이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 때문에 저의 감수성이 한층 더 풍부해진 것 같습니다. 저의 감수성의 깊이가 그렇게까지 깊어진 것이 다 부모님 덕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단순히 저를 혼내시고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눈물을 흘리면 토닥여주고 때로 혼내시기도 하는 상황에 따라 저를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집에서 키우던 새끼 강아지가 죽었을 때였습니다. 품종이 있는 개가 아니었는데 저도 무척 많이 좋아했었고 그 새끼강아지도 저를 무척 많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죽어있었습니다. 죽은 새끼 강아지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저 산속에 가서 고이 묻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새끼 강아지를 들고 산 속에 올라가서 아버지께서 손수 땅을 파주시고 집어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강아지를 고이 흙 속에 넣고 모아둔 용돈 700원도 같이 넣었습니다. 저승길에 가면 비상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고도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으시고 저의 순수함을 잃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좋은 길 가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성격이 삐뚤어 질 수도 있었지만 저의 감수성은 현재 매우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감수성 덕분에 지금의 좋은 글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보다는 글 쓰는 능력이 발달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감수성을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여섯. 면역력을 키워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아서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고생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올려드립니다. 그 때 저 병원 데리고 다니시느라 정말 고생하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잠도 못 주무시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가 그렇게 잔병치레가 많았던 이유는 면역력이 많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약하게 태어났기도 했고 태어났을 때 2kg이 조금 안되게 태어나서였습니다. 면역력이 약해서 쉽게 병에 걸렸는데 가장 심한 병에 걸린 건 대상포진이라는 병이였습니다. 대상포진이라는 것은 수두의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으면서 몸의 체계가 약해져있을 때 드러나 수포 같은 물집이 두드러기처럼 몸의 일부분이나 전체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병에 걸렸을 때 정말 밤에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옆구리에 났었는데 처음에 수포형식으로 퍼지다가 나중에 터졌습니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한 통증과 나중엔 간지러워서 꼬박꼬박 약을 먹이셨습니다. 그 당시엔 제가 알약을 먹지 못하여 일일이 다 으깨서 가루약으로 만들어 물에 타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알약을 먹지 못하니 제가 약을 먹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알약을 몰래 먹는 척하면서 버리려고 하면 부모님께서는 저를 호되게 혼내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약을 안 먹으면 또 다른 병이 나서 고생하면 너만 고생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번 천 번 맞고 지당한 말씀이었지만 저를 그렇게 혼내시기에 혼자 삐쳐가지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그렇게 있었더니 약을 또 먹어야 한다며 억지로 밥을 먹이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잔병치레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지속되다가 부모님의 지극정성으로 약을 먹이시고 보살펴 주셔서 면역체계가 강화되어서 병에 잘 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부모님을 보면 약을 달고 사시는 것 같아 마음이 그렇게 좋지 만은 않습니다. 신경통에 근육통 약까지 식사 후 먹고 계신 것에 대해 다 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더 이상 약을 드시지 않도록 제가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 면역력을 높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입곱. 집이 넓은 마당을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남들처럼 아파트에 살지 않아서 제가 태어날 때부터 기와집에서 살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집 앞에 넓지는 않지만 마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당은 경운기를 세워두고 있었고 집 뒤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마당 중앙엔 흙으로 덮여 있어서 어릴 때 많이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마당 구석엔 툇마루가 있어 마루 위에서 앉아 옆집 친구와 수다도 떨고 땅에 있는 흙을 파면서 놀기도 했습니다. 땅을 파면 부모님께서 더러워진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개미들이나 공벌레들을 잡고 놀고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습니다.

이 마당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넓은 마당 덕분인지 고기를 구워먹거나 큰 상차림을 할 때엔 마당에서 먹곤 하였습니다. 야외여행에서 음식을 해먹거나 밥을 지어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기분이 한껏 업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과 마당에 앉아서 오순도순 밥을 먹으며 주변에 있는 벌레들의 소리를 들으면 하루의 마무리가 정말 좋은 기분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마당으로 인해 개들과도 함께 뛰어놀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개들을 키우지 못하거나 마음대로 뛰어놀지 못하는데 제가 워낙 강아지를 좋아해 개들을 풀어놓고 마음대로 뛰어놀게 하고 저도 같이 뛰어놀곤 했습니다. 목줄을 풀어놓은 개는 기분이 그렇게나 좋은지 저에게 막 달려들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올라타면서 놀기도 했습니다.

이 마당 구석엔 흙으로 덮여있어 자급자족할 수 있는 채소들도 재배 할 수 있었습니다. 토마토나 가지를 심어놓으면 몇 달이 지나고 확인하면 주렁주렁 열매들이 달려 있어서 그냥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떻게 농작물들이 달리는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농번기체험 같은 용어는 따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마당이 있다는 것은 제 사고를 넓혀주었고 좀 더 많은 경험과 폐쇄적이지 않은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지금 마당은 어릴 적 보다 작아진 느낌을 받는 건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넓은 마당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열여덟. 저를 부지런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성격상 원래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매사에 귀찮게 생각하고 어질러 놓아서 부모님께 혼났던 적도 많습니다. 저와 달리 아버지는 매우 부지런하셨습니다. 아직 동트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밭에 나가 일하시곤 하셨습니다.

이른 새벽은 너무 이른 시각이라 아직 꿈나라에 있을 시간인데 아버지께서는 그때 일어나셔서 집에도 잘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한시도 쉴 틈 없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저는 본받고 싶었습니다. 비록 다 따라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버지의 일부분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부지런함이 더욱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밭에 가시는데 피곤하시지도 않으신지 밭에서 묵묵하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일찍 일어나셔서 밭에 나가 일하시는 것 뿐 아니라 집 곳곳에 있는 수리할 만한 부분들을 알아서 찾아내어 고치시곤 하였습니다. 만약 전선이 너무 엉켜져 있어서 합선될 위험이 보이면 알아서 선들을 일일이 풀고 다시 엮곤 하였습니다.

저희 집 뿐 아니라 홀로 사시는 노인 분들을 위해서도 부지런함을 보이셨습니다. 추운 겨울날, 정기장판 같은 것이 고장이 나면 그것도 직접 가서 고쳐주셨습니다. 어르신들이 푸세식 화장실을 쓰기에 불편하실까봐 변기를 그 위에 덧대어서 설치를 해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릴 때면 저희 집 앞마당만 쓰는 것이 아니라 골목길까지 다 쓸어서 차가지나 다니기에 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가 구렁에 빠졌을 때는 직접 경운기를 가지고 오셔서 차를 끌어내주시기도 하였고 그런 걸로 절대 생색을 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부지런함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다 좋아하셔서 이장으로까지 추천하였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런걸 하면 다른 일에 신경 쓰기 힘들다고 거절하셨습니다. 정말 존경스럽고 본받을 만 했지만 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도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부지런함을 배워 남들에게 일은 미루지 않고 제때 다하여 눈치는 보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부지런함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열아홉. 비위를 강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골에 살면서 비위가 강해질 줄 알았지만 비위가 강하고 약한 것은 타고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대로 잘 먹지 못하는 음식이 호불호가 너무 갈려서 특정 음식만 먹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비위가 강해지지 않아서 고약한 냄새나 더러운 걸 보면 헛구역질이 나서 많은 고생을 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입에 뭔가가 들어오거나 어떤 이물질이 들어가면 바로 헛구역질이 나서 치과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마음먹고 부모님께서 저를 치료하려고 치과에 데리고 가셨는데 저는 치과의 기구들이 저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너무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의자에 누워 입을 멀리고 의사가 기구들을 제 입에 넣고 치료를 하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여 그 자리에서 토해버렸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너무 놀라셔서 저에게 달려와 구토물을 닦아주시면서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미안하다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비위가 약하다 보니 부모님께서 제 비위를 강하게 만들어주시려고 일부러 냄새나는 음식들을 저에게 먹이셨습니다. 특히 과메기를 많이 사주셔서 이건 고소하고 맛있다며 저에게 주셨습니다. 꽁치를 말린 것이라고 하는데 김에다 싸주시는데 저는 먹기가 싫었습니다. 비린내도 많이 나고 냄새도 역겨워서 먹지 못하고 뱉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입이 짧아서는 남에게 얕보이기 쉽다면서 참고 먹으면 익숙해진다고 하시며 계속 먹으라 하셨습니다.

처음엔 먹기 싫은 걸 계속 먹으라 하셔서 싫었지만 그게 다 저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먹기 힘든 음식도 잘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강요가 아니라 제가 좋아서 이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비위도 많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미뤄놓았던 치과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역겨운 냄새나 이상한 냄새가 나도 헛구역질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게 다 부모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약 같은 것도 이제 대수롭지 않게 먹게 되었습니다. 저의 생활에 크나큰 이로움을 주신 부모님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또한 저희 생활습관까지도 바꿔주시는 부모님이 위대하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비위를 강하게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감사 스물. 삼 시 세끼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주시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밥을 저에게 챙겨주실 때면 하소연처럼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삼시세끼 밥을 챙겨먹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축복인지 잘 알지 못하는데 그걸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알려주셨고 배고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것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은 기본이고 두 끼를 먹으면 잘 먹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얘기가 먼 옛날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바로 얼마 전의 이야기로 들려왔던 건 사실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식사 한 끼를 하려고 뒷산을 뒤적거리며 먹을 것이 없는지 찾아보셨고 칡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사신 이야기를 밥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저에게 얘기해주시곤 하셨습니다. 밥 한 끼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며 옛날에 비해 지금은 너무 나아졌다고,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꼭 이런 이야기를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모님께서 어렵게 사신 이야기를 해주셨기에 삼시 세끼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소중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단순히 끼니를 때우려고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과시하려고, 더 돋보이려고 비싼 호텔이나 유명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밥 한 끼 한 끼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그런 위신은 세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사셨고 저에게 들려주셨기에 저는 끼니를 때우는 것에 대해 경건한 마음까지 들기도 합니다. 저에게 밥을 먹는 것은 부모님의 그 이야기가 그대로 스며들어가 있기 때문에 항상 밥 한 톨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고 남들에게 삼시 세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부모님의 그런 교육이 있었기에 비싼 밥 대신에 배를 든든하게 채울 수 있는 음식을 택하게 되었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밥 대신에 간단하고 싸게 먹을 수 있는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삼시세끼의 중요성을 저에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산골마을 시골에서

감사 스물하나. 농촌에서 살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는 영락없는 시골뜨기입니다. 누가 뭐래도 시골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활을 해왔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너무나 큰 감사를 느낍니다. 사실 남들은 시골에서 살고 자라났다고 하면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ㅔ 저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자라나는 것은 저에게 크나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그것부터 말씀드리기 전에 저희 마을은 30가구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고 또래라고는 제 동생과 옆집에 살던 친구 1명이 전부였습니다. 부모님도 기억하시죠? 그래서 무엇보다 그들과 친했고 잘 놀았습니다. 농촌에서 자라나다 보니 조금은 추잡한 면도 있었지만 저는 좋았습니다. 옆집의 친구와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메뚜기를 잡아다 튀겨먹기도 했고 청개구리를 잡아 옆집 할머니를 갖다 드리기도 했습니다. 옆 집 할머니는 청개구리가 약이 된다면서 한 번에 개구리를 삼키시는 모습이 계속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겨울이 되면 밖에 눈이 쌓여 그걸로 눈사람을 만들어 한곳에 쌓아놓기도 했고 담벼락을 지나다니는 뱀을 잡기도 했습니다. 이 뱀은 꼬리를 잡으면 안 되기 때문에 머리를 우선 잡고 장난감처럼 휙휙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장난치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오셔서 이런 뱀은 위험하다며 저 풀숲에 던지셨습니다.

남들은 집에서 오락을 하거나 TV를 보고 있는데 저는 밖에서 야외활동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사실 지금의 세대는 어릴 적에 추억이 많이 없습니다. 모두 학원에 다니고 학교에 다니느라 쉴 틈이 없고 혹여나 쉬는 시간이 있으면 잠을 자거나 컴퓨터 오락에 빠져 팔팔한 젊은 시절을 아무런 추억 없이 보내는 게 사실입니다. 시골에 살게 해주셔서 이런 추억들 또한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제가 농촌에서 자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식을 낳으면 꼭 저처럼 살게 할 것입니다. 부모님은 조금 반대하실 수 있겠지만 남들과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와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게 하고 싶고 추억이 있는 아이로 자라나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저를 농촌에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둘. 벼농사의 중요성을 알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면 모내기를 하고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논은 그렇게 크지 않아서 모내기를 하기에 수월했습니다.

쌀을 한 톨, 한 톨 얻기 위해서는 먼저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논에 물을 대놓고 모종을 하나하나 심는 것이었습니다. 기계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기계가 닿지 못하는 곳은 손으로 일일이 심어야 했습니다. 장화를 신고 논에 들어가 모종을 심고 나면 현기증 때문에 머리가 띵하니 아파왔습니다.

모내기 뿐 아니라 모종을 다 심고 나서 중간 중간에 관리도 해야 돼서 안에 있는 해충도 없애줘야 하며 잡초도 뽑아줘야 하는 무척이나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있습니다. 하지만 쑥쑥 크는 모들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식 키우는 것과 똑같다며 그 크는 재미를 보시면서 저절로 흐뭇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추수하는 때가 오면 우선은 고개 숙인 벼들을 베는 작업이 먼저 있는데 낫으로 베는 작업이 정말 만만치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낱알들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해야 하고 베는 기술이 있어야 올바르게 벨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벼들을 탈곡기에 넣어 껍질에 쌓인 쌀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렇게 쌀을 얻는데 수많은 노력이 든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농사를 짓기에 벼농사의 중요성을 알았고 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항상 교육하시기를 이렇게 밥을 먹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이 들어가며 결코 그냥 노력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력과 긴 시간을 통해서 나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음식물을 남기는 건 농부들의 땀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밥이 좀 많더라도 다 먹는 버릇이 생겼으며 아예 많다면 덜어서 먹습니다. 이게 다 부모님 덕분인 것 같습니다. 벼농사의 중요성은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마 직접 벼농사를 해보고 체험해본다면 분명히 깨닫게 될 텐데라는 아쉬움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벼농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 셋. 주변에 자라나는 식물들의 이름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골에 살면서 주변에 널린 건 이름 모를 나무들과 갖가지 식물들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께서는 하나하나 짚어주시며 이건 무슨 식물이라는 걸 알려주셨습니다. 또 제가 잘 까먹어서 한 번 들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여러 번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는 식물들을 조금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식물들의 이름은 아버지의 경운기를 타고 가면서 많이 알게 되었는데 산딸기나 오디 같은 식물들은 새콤달콤해서 가는 길에 따먹기도 했습니다. 식물들을 가지고 놀기도 많이 했었는데 강아지 풀 같은 걸 꺾어서 손 안에서 비비며 놀고 친구 목덜미에 간질이기도 했습니다. 이름들을 거의 다 알기에 자랑거리도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이건 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고 우쭐하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나는 시금치들 중에 독초가 있는 것과 없는 것도 알려주셔서 함부로 먹지 말라고도 저에게 조언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겨울철엔 일거리가 없어 봉황을 수확하곤 했는데 봉황을 약재로도 사용하여 그냥 먹으면 쓰고 입안이 약간 텁텁하게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부모님이 저에게 알려주시고 체험하게 해주신 것들입니다. 소를 키울 때에도 소 먹이로 토끼풀을 베곤 했었는데 토끼풀이 뭐냐고 다른 사람들이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 경험을 통해서 알았으며 부모님이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또 하나, 직접 이것들을 체험하면서 알았다는 것인데 남들은 식물들을 책이나 인터넷으로만 보는데 저는 직접 봤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글로 배운 것과 직접 체험한 것은 차원인 다르니 말입니다. 돈 주고 배우는 걸 직접 체험하고 주변에 널린 식물들의 이름을 알려주신 건 식물을 다루는 방법은 저절로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식물들은 소의 먹이로 이용되고 이 식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고 이 식물은 그냥 관상용이며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식물을 아주 잘 알게 되었고 설사 무인도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생존능력이 아주 높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주변에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 넷. 겨울철 연과 썰매를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사실 시골에는 그렇게 놀 거리가 많지 않습니다. 기껏 해봐야 물가에서 놀거나 친구들과 숨바꼭질, 달리기는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추운 겨울날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씨도 춥기도 하고 오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계속 안에만 있는 절 보고서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뛰어놀아야 한다며 연을 직접 만들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밖에서 파는 비닐로 만든 연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물품들을 조달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달력 종이를 하나 째서 크기에 맞게 자른 후 대나무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달력의 종이에다가 붙이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렇게 연을 만든 연을 실타래로 엮어 만들면 연이 완성되었는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더욱 연이 훨훨 잘 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연을 날리는 기술로 알려주셨는데 연을 처음에 살살 풀어서 하늘로 올라가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등지고 실을 계속 풀다가 보면 연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간다고 하시며 저에게 실타래를 넘겨주셨고 연을 그렇게 재밌게 날리다가 실을 끊어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엔 원래 연을 끊는 게 재밌다며 실을 싹둑 자르셨습니다. 너무나도 재밌어서 당분간은 연을 계속 날렸던 것 같습니다.

연 뿐만 아니라 썰매도 직접 만들어 주셨는데 소나무 같은 걸 구해서 잘 깎아 판자 밑에 덧대어 못으로 고정시키고 나면 썰매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썰매를 이끄는 막대는 밑에다 못을 박으면 끝이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꽁꽁 언 저수지로 가서 손이 다 얼 정도로 신나게 오랫동안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렇게 재밌게 놀았는데도 남들 다가는 놀이공원 못 데려다 줬다며 아쉬워하시던 모습도 떠오르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자체가 이미 놀이공원이었으며 자유이용권을 평생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씩은 지금도 아버지가 만들어주시는 연과 썰매를 타고 싶습니다. 이젠 제가 부모님이 이용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만들어 드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썰매와 연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다섯. 농작물을 직접 재배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농작물을 직접 재배하고 다시 심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남들은 돈벌이가 안되고 별 소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가치가 높고 뛰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것들인데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지 않겠습니까?

부모님께서 재배하신 작물들은 다양했습니다. 고추, 배추, 콩, 쌀, 깨 등 다들 한번쯤은 봤을법한 작물들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작물들을 그냥 보게만 놔두시지 않고 직접 재배하는 걸 하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말하자면 끝도 없지 길 것 같습니다.

고추 같은 경우는 홍고추와 청고추로 나뉘는데 고추를 심기 위해서는 쇠 같은 걸 밭에다 박아야 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 전에 고랑을 엎어 비닐을 덮어주는 건 필수입니다. 거기에 고추 모종을 심어 쇠막대기를 타고 고추가 자라난다고 부모님께 배웠고 제 눈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매년 그런 걸 봤어도 너무 신기했습니다. 다시 죽었다 다시 살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고추 뿐 아니라 배추 같은 경우는 씨를 뿌려서 재배하는데 배추가 다 자라나면 엄청나게 컸습니다. 제 얼굴만한 배추도 있었고 그냥 먹어도 그 안에 수분이 스며 흘러나와 목마를 때 자주 먹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깨 같은 경우는 다 자라나면 마당에다가 두고 탈탈 털면 깨들이 우르르하고 쏟아 흘러 나와서 폭포수를 연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걸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반찬에다가 뿌려 고소함을 더하기도 했죠. 만약 보기만 했다면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직접 농작물을 재배하고 키우면 그 과정을 더 중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과는 그 과정의 노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하는데 농작물을 재배하는 일은 그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제가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 도움을 많이 못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제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고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농작물을 직접 재배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여섯. 추수가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는 가장 큰 기쁨이 아마 추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추수라는 것은 한 해의 가장 큰 행사와 같은 것으로 이때 마을에서 잔치 같은 행사도 많이 열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추수철이 되면 여기저기 일손이 매우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너무 많다보니 저도 물론 투입이 됐었고 동네사람들도 분주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한다고 결코 불평불만이 나오지 않고 때로는 노래를 불러가면서 까지 일을 하곤 했습니다. 특히 잘 익은 벼들을 수확할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 집에 총 동원됐습니다. 일종의 품앗이 형태이죠. 그러면서 서로 인정도 쌓이고 말 그대로 상부상조하는 그런 형식의 말을 그대로 느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 바탕 추수를 끝내고 나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올해의 수확은 태풍이 와서 저조했고, 어떤 농작물은 풍년이 들어 큰 이익을 봤다는 등 많은 말이 오갔는데 이것도 수확의 기쁨 중에 하나였습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 할머니들이 해주시는 칼국수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따뜻한 국물에 거기에 밥까지 비벼먹으면 금상첨화였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수확의 기쁨을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처럼 결과에만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중시하고 사람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나는 것이 진정한 추수와 수확의 묘미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 덕분에 제가 이기적이지 않고 바르게 자라났던 것 같습니다. 그 수확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과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자기 일 밖에 모르고 남의 기분을 잘 무시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말입니다.

지금은 몇 년 동안 수확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군대에 입대해서 시간이 잘 나지가 않았습니다. 이것도 핑계거리가 될 수 있겠죠. 조만간 수확의 큰 기쁨을 만끽하려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혼자 농사를 짓고 계시는데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려야 일도 조금 더 편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추수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일곱. 조그만 잘못에도 크게 혼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조금은 덤벙대는 스타일이라서 일을 조금은 자질구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이런 성격 탓에 뭐든 잘 잊어버리고 까먹는 버릇 아닌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잘못을 고쳐주시기 위해 부모님께서 저를 크게 혼내셨습니다.

그냥 말로만 조용조용 타이르시다가 제가 한 번은 학교에 우산을 두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까지는 비가 왔다가 저녁이 되니 비가 그쳐서 그만 우산을 들고 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그냥 말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버지께서 저를 크게 혼내셨습니다. 저의 버릇을 고쳐주시기 위해서라도 우산을 당장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학교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밖에서 서성거리는 걸 보고 아버지께서는 한참 뒤에 저를 부르시고 우산은 내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혼내주셔서 그럴 때면 제가 당분간은 버릇을 조금은 고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가 저에겐 큰 약이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 컴퓨터 게임을 오래하다가 들켜 아버지가 저를 호되게 혼내셨습니다. 아버지가 컴퓨터 게임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며 만약 게임을 하더라도 하루에 한 시간은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도 약속을 어기고 밤새도록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팬티 바람으로 마당에 계속 서 있었습니다. 이런 교육 덕에 제가 자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잘못을 하면 그 자리에서 혼내지도 않고 오히려 보듬어줘서 더욱 버릇이 나빠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및 어머니께서는 제가 버릇없이 자라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는 걸 티내기 위해 그렇게 교육을 시키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게 된 게 부모님 덕분이지만 저는 시골에서 살게 해주신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남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저절로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천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조그만 잘못에도 저를 혼내주시고 교육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여덟. 양봉할 때 꿀들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집 주변에는 꿀벌통이 되게 많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양봉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토종벌로 키우셔서 제가 많이 무섭기도 했고 쏘일까봐 피해서 돌아서 방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꿀벌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지런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움직여서 꿀들을 모으고 밤에도 꿀 벌통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벌소리가 계속 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 주변에 둘러진 꿀벌을 키우기 위해 부단히도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봄이면 벌들이 새끼를 낳는다고 표현하는데 벌통에서 꿀벌들이 새까맣게 나와서 하늘에 수를 놓고 있다가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에 가까이에 있는 나무에 붙었습니다. 나무에 붙은 벌들은 계속 놔두면 야생벌이 되기 때문에 빨리 나무에 붙은 벌들을 떼야 합니다. 아버지는 쑥으로 연기를 내어 벌들을 온화하게 만든 후 벌통을 만들어 그 안에 집어넣으셨습니다. 거의 1년 동안 벌들은 꽃들에서 꿀들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꿀들을 꺼낼 채비가 되면 꿀을 짜내는 커다란 기구에다가 벌집을 넣고 돌리면 꿀들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저는 벌에 쏘이면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멀리서 지켜봤는데 더욱 그 모습과 광경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매년마다 그 광경을 봤으니 참으로 귀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꿀들은 제가 자주 먹는 꿀물을 먹는데 사용되었고 음식에 넣어서 먹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꿀을 모아 고이 병에 담아서 팔기도 했습니다. 이걸 친척들이나 고마우신 분들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양봉을 하지 않지만 그 때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밤에 불을 켜놓으면 벌들이 들어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벌에 쏘여 혼쭐이 나기도 했는데 꿀맛은 아직 잊을 수 없습니다. 다 부모님께서 양봉을 하신 덕분이죠.

다시 한 번 꿀들이 어떻게 모아지고 양봉을 해서 귀한 자랑거리가 되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스물아홉. 인스턴트 음식에 물들지 않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시골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다른 음식들은 입맛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엔 피자 같은 음식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음식들은 제일 처음 접한 게 아마 9살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촌형 집에 놀러가서 피자를 먹고 입맛에 맞지 않아서 토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토종 입맛이었습니다.

저는 토종 입맛에 제일 처음 길들여진 것이 좋았습니다. 만약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져 있었다면 우리의 시골음식들은 입에 대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입이 짧아서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음식은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였습니다. 된장은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찌개로 만들어서 두부만 송송 썰어서 넣으면 시큼하니 정말 맛있었습니다. 김치찌개도 역시 집에서 담가 몇 년 동안 푹 삭혀둔 김치로 만들어 맛이 매우 일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스턴트 음식보다는 집에서 먹던 향토적인 음식이 훨씬 제 입맛에 맞습니다.

요즘에는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어서 주변에 길거리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를 먹을 때면 그런 생각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런 음식들을 계속 먹어서 그런지 성인병에도 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는데 토종음식이 영원한 저의 친구가 될 것 같습니다.

요즘엔 이런 음식들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청국장 같은 음식들을 내놓으면 이런 건 먹지 못한다고 하는 애들을 보면 불쌍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음식들을 먹다보면 저절로 천천히 먹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 발효음식이라서 TV같은 데를 보면 이런 음식을 먹고 병이 나았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께 이런 음식이 좋냐고 물어보면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도 물론 그렇습니다. 지금도 집에 가면 그런 음식들이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고 너무 행복합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인스턴트 음식에 물들이지 않고 우리의 시골 향토음식에 정을 붙여주셔서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 서른. 경운기를 어떻게 모는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당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경운기였습니다. 경운기는 농사에 가장 많이 이용되고 필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운기로 각종 물건을 옮기고 앞부분을 분리시켜 밭도 갈 수 있는 유용한 기계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한 번 저렇게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아버지 몰래 경운기에 올라타 기아를 내렸더니 경운기가 뒤로 후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다시 기어를 원상복구 시켰더니 경운기가 멈췄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께 경운기 한 번 모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촌에 살면서 경운기 하나는 몰 줄 알아야하지 않겠느냐며 제게 경운기 모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선은 경운기를 안전한 평지에 갖다놓고 먼저 시동을 거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시동을 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수동으로 거는 방법은 경운기 앞쪽에 보면 철로 된 망치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걸 엔진으로 돌아가는 앞쪽에 잘 맞춰서 돌리면 시동이 걸립니다. 어린애가 하기엔 다소 힘이 든데 자동인 열쇠로 걸리지 않을 때 자주 이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장점은 기름을 덜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께 시동 거는 방법을 배우고 기어조작법을 배우니 경운기의 작동원리는 거의 다 깨우쳤습니다. 실전만이 남았는데 저를 경운기 옆 좌석에다가 태우고 직선 코스, 코너 등을 모두 돌아다니시며 경운기는 이렇게 몰아다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혼자 몰아보라고 했는데 속력을 제일 낮게 하여 몰아보니 힘이 의외로 많이 들어가서 조작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께서 너의 힘으로 경운기를 모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며 좀 더 커서 힘이 좀 길러지면 그때 속력을 조금 높여서 경운기를 몰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경운기를 모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일 수 있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보아 와서 그런지 경운기 모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경운기를 몰다보면 나중에 운전면허 따는 것도 쉽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따실 적에 운전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이렇게 처음에 운전을 잘하시는 분은 처음 봤다는 것이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경운기를 잘 쓰지 않지만 길을 지나다 경운기 소리가 들리면 문득 그 때가 생각났고 다시 한 번 경운기를 몰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경운기 모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서른하나. 산짐승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낮이고 밤이고 산짐승들이 마을 어귀에 많이 출몰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산골이고 외져서 짐승들이 살기에 적절했고 조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산짐승들과 부딪히고 마주칠 기회가 많았습니다. 특히 밤이 되면 산짐승들이 많이 출몰했는데 밭에 있는 농작물들을 마구 헤집어 놓기도 했습니다. 혹여나 짐승들이 사람에게도 해코지를 할까봐 부모님께서는 산짐승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초식동물인 노루나 산토끼 등의 동물들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산길을 걸어가다가 이런 동물들을 많이 봤었는데 제가 가까이가자 무서워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궁지에만 몰리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괜히 잡으려다가 설치면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물들 말고 육식동물이 멧돼지 같은 동물이 위험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동물들은 마주치면 우선 등을 보이지 않고 도망가라고 하셨고 그대로 있거나 주변에 높은 곳이 있으면 빨리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한밤중에 길을 걸어가다 밭너머에서 멧돼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고 두 눈이 시뻘게서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멀리서 봐서 그 멧돼지는 절 보지 못한 것 같아 슬금슬금 뒤로 나오면서 얼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되도록 그런 것들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셔서 저는 야밤엔 잘 나다니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멧돼지를 아버지가 잡아오셨는데 하도 농작물에 피해를 많이 주니까 관공서에다 허락을 맡고 잡으신 것이었습니다. 마당에 널부러지 멧돼지는 크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입 양쪽에 털이 삐죽삐죽 나있었고 일반적인 돼지와는 다르게 크기가 1.5배 정도 더 컸으며 거무티티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이런 짐승들은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제게 거듭해서 하신 것 같습니다.

TV에서 보면 그런 짐승들과 바로 앞에서 마주치면서 승부를 겨루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 영화 같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그렇게 교육을 시키셨고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니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산짐승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둘. 따뜻한 날달걀을 먹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바로 옆방엔 닭집이 있었습니다. 이 닭집 안에는 닭뿐만 아니라 토끼 같은 동물들도 살고 있었는데 특히 닭들이 많았습니다. 아침이 되면 울음소리로 잠을 깨우고 오후의 한 낮에 밖으로 나와 모이를 쪼아 먹곤 했습니다.

제가 특히 좋아했던 먹거리는 닭들이 낳는 달걀이었습니다. 이 달걀을 삶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날달걀로 그냥 먹었습니다. 삶아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모님께서는 제가 날달걀을 좋아하기 때문에 닭장에서 꺼내 씻어서 제게 주시고는 했습니다. 갓 품은 알들이라 따뜻하고 온기가 있었습니다. 계속 부모님께서 꺼내주시니 제가 이제 꺼내먹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닭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닭장 안으로 들어가니 닭들이 저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가 닭들 몰래 달걀을 꺼내오려고 하는데 닭들이 막 저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아마 자기의 알들을 지키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부모님께서 꺼내려고 할 때에는 덤벼들지 않더니 제가 꺼내려고 할 때에는 닭들이 덤벼드는 것이 이상해서 부모님께 여쭈어봤더니 알을 꺼내는 것도 다 오령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닭들은 머리가 나빠서 모이는 주는 척 하면서 알들을 꺼내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이를 주는 척 하면서 알들을 꺼내와서 하루에 1~2개씩은 따뜻한 알들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알들은 모두 냉장 보관에서 따뜻한 알들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따근따근한 알을 톡톡 깨서 먹으면 냉장보관한 알보다 훨씬 더 고소하고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알들은 모두 유정란이라서 품질도 다른 알들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가끔씩 집에 가면 부모님께서 달걀을 좋아했던 제게 하나씩 주십니다. 지금은 닭을 키우지 않아서 비록 사서 제게 주시지만 그 정성만큼은 변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달걀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닭들만 보면 달걀 생각밖에는 나지 않습니다. 고소해서 그 맛은 어느 고소한 맛보다 뛰어났습니다.

나중에 닭을 한 번 키워보고 싶습니다. 닭들은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유용한 동물이니 키우면 달걀을 계속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따뜻한 날달걀을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셋.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동물들이 워낙 집에 많아서 같이 살다보니까 그만큼 살육의 현장도 많이 목격한 것 같습니다. 복날이 되면 개들은 심심치 않게 잡는 모습을 보았고 돼지들도 철장에 가두고 잡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 저로서는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고 특히 돼지를 잡을 때에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보지 않으면 돼지만 길을 지나다가다 그런 장면들을 쉽게 보게 되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충격을 받을까봐 한 번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런 동물들이 왜 저렇게 죽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키우는 가축들은 도시에서 키우는 애완용 동물과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친구이며 한 가족으로서 키우지만 우리는 먹기 위해서 동물들을 키우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사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동안 정들었던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그저 슬프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동물보다는 사람이 훨씬 우월하며 약한 동물들은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그저 슬플 뿐이었습니다.

아마 그런 것들이 다 직접 봤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해주셨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들만 먹고 그 과정을 모르니 그런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서 식탁에 올라오는지 아마 봤다면 먹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제게 계속 교육을 하시면서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저 돼지와 가축들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 위해서 희생을 하고 있지만 함부로 아무 의미 없지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설사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그냥 재미로 밟아서도 안 되며 그런 짓은 학살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요즘도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들을 보면 어떻게 잡혀지고 가공돼서 올라오는지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그런 동물들이 있기에 지금 제가 맛있는 먹거리를 먹을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것이다 부모님의 교육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한낱 미물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 되지만 사람의 먹거리를 위해서는 동물의 생명도 헛되지 않다는 것이 평생 기억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넷. 농사의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그걸로 먹고 살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1960~70년대만 해도 사람들의 대부분이 종사했던 직업이 농부였고 이 농사로 아들딸들을 모두 장가보내고 시집보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다 기업에 들어가서 사무직이나 생산직 노동을 하는 것이 평범해졌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시기에 저에게 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계속 언급하셨습니다. 밭에서 나는 채소와 논에서 자라나는 벼들은 결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농부들의 수많은 땀과 노력의 결실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농사는 돈이 안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1차적인 생산이라 중간 도매상에 팔 때 값을 잘 흥정하지 못하고 부르는 대로 파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이 안 된다고 해서 농사의 중요성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농사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우리의 입으로 향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생산직 및 사무적인 일을 한다고 해도 그런 걸로는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 농사일을 물려받는 걸 결사 반대하셔서 농사를 물려받을 수는 없겠지만 다른 일을 하면서 농사의 중요성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른 직장을 잡고 부모님을 편하게 해드리려고 일을 그만하시라고 해도 부모님은 농사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평생에 걸쳐 농사일을 해왔고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농사 뿐인데 몸이 따라주는 한 계속 일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농사일을 몸이 정말 고되고 시도 때도 없이 관리를 해야 해서 부모님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하시는걸 권유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시니 저만 속상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모님이 농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에 저도 농사의 중요성을 새삼 깨우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께서 계속 농사를 짓는다고 하시니 가끔 시골에 내려가면 부모님 일손도 도와드리고 격려도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쉬엄쉬엄 해가며 농사일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다섯. 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기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겨울철에도 물론 잡을 수는 있지만 얼음을 깨고 자는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여름철에 고기를 많이 잡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장구를 치면서 놀다가 물가 사이로 지나가는 물고기를 보면서 잡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말씀하셨을 때 어린 마음에 매우 기뻐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물을 챙기고 장화를 신고 마을 뒷산에 있는 저수지로 갔습니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수로 이용되는 저수지로써 아주 마을에서 중요한 저수지였고 물고기들도 많이 살았습니다. 여기서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방법을 정말 다양하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그물로 잡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지만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로 이용했던 방법은 통발로 잡았는데 안에 미끼를 놔두고 하루정도 저수지 물가 근처에 놔두면 고기들이 통발 안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통발로 잡는 방법도 있었고 낚시로 잡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흔히 보는 알루미늄이나 그런 낚싯대가 아닌 대나무나 좀 튼튼한 나무를 구해서 길이를 알맞게 잘라 다듬고 거기에다가 나일론 실을 매달아 바늘을 끼우면 낚싯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지렁이 같은 건 주변에 거름을 파보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낚싯대를 하나 만들어주시며 이걸로 낚시를 한 번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고기가 딱 입질을 시작하면 손에 느낌이 전달되고 딱 미끼를 무는 순간 당기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될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한 마리도 얼쩡거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습득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당분간 낚싯대와 지렁이를 구해서 저수지로 출근하다시피 했습니다. 미끼를 그냥 물고 도망가는 녀석도 있었고 줄을 당기다가 물고기가 떨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낚시를 가르쳐주셨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 법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그런 방법 말고도 가장 원시적인 방법은 페트병을 잘라 안에 된장을 넣고 비닐을 덮고 중간에 구멍을 뚫으면 완성이었습니다. 어디서든지 어떠한 방법으로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 도구 없이 돌을 이용해 잡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여섯. 시원한 물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한 물놀이가 최고였습니다. 제가 태어난 후 한 3~4년 동안은 아파서 활동을 잘 못했지만 그 이후로 저를 밖에서 많이 놀게 하셨습니다. 집에 있으면 얼른 밖에 나가서 뛰어놀라고 하셨으며 물놀이도 자주 갔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마을에 있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시켜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빨래를 하시고 저희 남ㄴ매는 물에서 물놀이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연히 TV에서 물놀이를 수영장에서 하는 것을 보았는데 나도 저런 곳에 데려다 달라고 떼를 쓰면서 매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비록 수영장 같은 곳에 데려다 주시지는 못하셨지만 저는 그 계곡이 저의 수영장이었습니다.

조금 크고 초등학교 입학 한 이후에는 친구들과 수영을 많이 하러 다녔는데 그렇게 다녀도 부모님께서는 저를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혹여나 수영하다가 잘못될까봐 안전하게 놀다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고 가끔은 먹을거리를 사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시골에 살았기에 물놀이 할 곳을 많이 데려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곳이 인각사라는 절 앞이였는데 인각사라는 곳은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앞에서 수영을 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그 위엔 위태롭게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고 물이 너무나도 깨끗하여 안이 훤히 다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시골에 살면서 수영은 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돈을 주고 어디서 수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계곡이나 이런데서 수영을 배우고 즐기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물놀이를 즐기고 수영을 한 덕분에 남들 못지않게 수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해군에 입대하게 된 것도 다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저를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셨으니 저도 부모님이 원하는 곳에 대려다 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오붓하게 단 둘이 여행을 떠나서 즐기시면서 오시면 저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신혼여행밖에 두 분이서 단 둘이 다녀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얼른 부모님을 여행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즐겁게 물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일곱. 공생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미덕이라고 부모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좀 야박하게 말하자면 시골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같이 지내며 언젠가 생일이고 밥숟가락이 몇 개 있는 것 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이웃이 어렵고 도움이 필요할 때 꼭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웃을 참 잘 도와주셨습니다. 마을엔 노인 분들이 많이 살고 계셔서 뭔가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 집으로 오시곤 하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뭐든 다 고치시고 말을 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르신들인 찾아오면 아버지께서는 발 벗고 도와주셨습니다. 겨울에 난방이 잘 되지 않아서 전기장판을 고쳐준 적도 있었고 화장실의 변기도 고쳐준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런 것이 당연한 것인 줄만 알고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커갈수록 세상에는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오히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괴리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도록 부모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은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고 너 자시만 처신을 똑바로 하고 남을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삭막해지면 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이 맞고 공생이 그 원리라고 하셨습니다.

공생이라는 말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생이라는 것이 점점 쇠퇴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남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무덤덤해지는 감정들은 그냥 정상적인 감정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가식도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저는 부모님께서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너무 싫습니다. 남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다며 공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신 덕분에 공생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남을 이해하고 도울 줄 아는 마음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 절대로 변치 않고 저의 신념으로 세우면서 살아야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남과 더불어 살고 공생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여덟. 소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는 농가의 재산의 척도로도 사용될 만큼 소중한 가축이었습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희 집에도 커다란 소를 키웠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또 다른 친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소 덕분에 어린 시절을 조금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놀았던 것 같습니다.

저희 집의 소는 참 순했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에 뿌연 콧김이 계속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기분이 좋은지 계속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제게 밀었으며 등긁개로 소의 등을 이리저리 긁어주면 얌전하게 있었습니다. 소를 데리고 다니지는 못 했지만 소의 등에 올라타기는 많이 했습니다. 저를 주인으로 알아보았는지 등에 올라타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에게 여물도 가끔씩 줬었는데 가마솥에 풀들을 뜯어서 푹 삶아 조금 식힌 후 소 밥통에다가 담아주면 그걸 먹고서는 한참동안이나 씹고 있었습니다. 아마 되새김질을 그렇게 계속 한 것 같습니다. 파리들이 특히 소들 주위에 많았었는데 꼬리를 흔들면서 파리를 쫓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소를 데리고 밖으로 데려 나갈 때면 저도 같이 따라 나가서 쟁기를 끄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무뚝뚝하게 쟁기를 끌고 있는 모습을 기특해서 바라볼 때면 뻐금뻐금 눈만 깜빡였습니다. 소를 키운 지 얼마 안되어 소를 팔았습니다. 소를 잃은 슬픔에 그냥 멍하니 소 우리를 서성 거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소를 팔고 경운기를 샀었는데 소는 어디 있냐고 계속 부모님께 물어봐서 경운기를 샀다고 하니 그제야 소가 팔려간 것을 알고 울었었습니다.

그만큼 소는 저에게 짧은 기간이지만 소중한 친구였고 지금은 허물어진 소 우리에 다른 건물이 올라섰지만 그곳을 바라볼 때면 옛날에 소를 키우던 생각이 간절하게 나기도 합니다.

이게 다 부모님께서 소를 키우셨기에 제가 그런 친구를 둘 수 있었고 좋은 추억 하나를 만들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소 뿐 아니라 들고양이나 개 등 다양한 동물들을 키우면서 제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많은 추억들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소를 키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서른아홉. 많은 별들을 보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 수놓인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는 밤에 하늘에 있는 별들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다 시골에 살아서 그랬던 것이죠. 시골에는 수많은 별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할머니 집에서 살 때였습니다. 여름에 더울 때 마루에서 시원한 모시이불을 깔고 밖에서 자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같이 하늘을 보면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별들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이야기들과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봄녀서 그렇게 잠들곤 했습니다. 별들을 그렇게 한참동안 보고 있으면 별들이 제게로 우르르 쏟아져 버릴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장난쯤은 모두 한 번씩은 해봤을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기 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다시 볼 수 있냐고 물어보면 부모님께서는 별들이 여행하고 있어서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별중에 다시 그 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밤에 하늘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 때에는 그 별을 다시 찾아내곤 했습니다. 같은 시간대라서 그런지 그렇게 매일 밤 같이 별 찾기 놀이를 하다가 잠들곤 했습니다. 시골에 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없었을텐텐데 부모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리온자리가 기억에 남는데 별들이 세게 잇달아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며 매우 빛났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별을 세며 잠이 들었던 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이야기가 저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별들을 부모님께서는 제게 선물해주셨으며 평생 다 봐도 못 볼 별들은 저는 제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별들을 많이 볼 수 없습니다. 어디로 다 꽁꽁 숨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부모님께서 구경시켜 주신 별들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마 인공적인 빛들이 너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은 별들을 품고서 잠들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잠이 들 때에 눈 속에 별들이 아른거리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잠동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많은 별들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 옛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체험한 일들도 많이 있지만 부모님께 옛 이야기를 들은 것도 많습니다. 옛 이야기라 하면 부모님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들입니다. 부모님들도 모두 시골에 사셨지만 저보다는 더 낙후된 곳에다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옛날엔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을 뜯어먹고 사셨다고 하셨으며 끼니를 때우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이 큰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학교도 걸어서 1시간 이상 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셨고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를 다니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저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옛날엔 아버지가 참 어렵게 사셨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 조금만 더 배우고 싶은데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도 부양해야 했기에 큰아버지만 도시로 보내고 아버지는 지금까지 시골에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구미에서 사셨다고 말씀하셨는데 형제자매들이 워낙 많아서 아버지와 비슷한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학교에는 잘 나가지 못했지만 사이가 좋아서 돈독하게 지냈고 그 때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어릴 적에 그렇게 힘들게 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나서 그런지 부모님께 꼭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났습니다. 사실 저를 이렇게 키워주신 것도 고마운데 그만큼 효도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너 하나 잘되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 그런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부모가 되어서도 그렇게 말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옛 이야기는 제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부모님께서 어렵게 사신 이야기를 생각하면 저절로 부지런해지고 게으른 생각이 바로 고쳐지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조금씩 제 자식을 위해 할 말들을 생각하여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부모님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자식만을 위한 부모님의 사랑

감사 마흔하나. 항상 저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학교를 다니기에 꽤 먼 거리였습니다. 저의 교육을 위해 그 먼 거리까지 매일매일 차로 버스를 타는 곳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아침이라 바쁠 법도 하지만 제가 사는 곳은 버스가 정차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차로 매일같이 태워다 주셨습니다. 저희들이 걸어가도 되는데 그러면 일찍 일어나야 돼서 그 수고를 덜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원래 제가 사는 지역상 연고지의 학교를 다녀야 되는데 제 연고지의 학교가 사람 수도 적어서 보다 멀리 있는 학교에서 시설이 좀 더 뛰어나고 교육면에서 나은 학교를 주소지를 바꿔가면서까지 다니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가까운 학교에 갔다면 학군에 좀 더 나은 학교보다는 교육이 조금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교 뿐 아니라 학원에도 보내주셨습니다. 학원은 제가 5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부모님이 일찍부터 배워야한다는 그런 인식을 가지시고 철저히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다른 아이들보다는 조금 앞서나갈 수 있었고 제가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제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 번도 결석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반드시 나가야 된다는 부모님의 신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하루라도 빠지면 안 되고 선생님의 말씀은 부모님의 말씀과 같고 그래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눈병에 걸려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에도 이건 결석처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진도 다 따라가려면 힘들다고 친구들한테 오늘 뭐 배웠는지 꼭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시험기간에는 절대로 저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는데 저에게 혹시 부담이 될까봐 그랬다고 하셨습니다. 때마침 그 당시에 제가 사춘기라 조금만 반응해도 화가 나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너는 꼭 커서 농사 같은 거 짓지 말고 다른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해서 공부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교육에 힘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 마흔둘. 전학을 고려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먼 거리의 학교라 해도 한 반 밖에 없고 전교생은 1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습니다. 이런 학교에서 제가 혹여나 좀 더 나은 교육을 받지 못할까봐 어머니께서는 저를 전학을 보내기로 고려하셨습니다. 이곳 시골에서는 교육을 받기가 힘이 들고 낙후되었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솔직히 전학을 가기가 싫었습니다. 10년 넘게 생활한 친구들이 여기에 있었고 여기가 저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금도 그 생각이 나지만 제 생각만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여기 시골 농사를 놔두고 이사를 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나 봅니다. 만약 제가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바로 만류해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 큰 고민에 빠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도회지로 나가면 여기에 남은 논과 밭 뿐 아니라 할머니 또한 여기에 계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습니다.

눈치는 채지 못했었는데 사촌형과 고모들이 저에게 떠보기 식으로 물어봤던 건 기억이 납니다. 전학을 도시로 나가서 좀 더 큰 곳에서 공부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저는 단박에 거절을 했었습니다. 그러기를 정말 잘 한 것 같습니다. 괜히 나가봤자 더 고생할 것이 분명한데 저는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습니다. 아마 제 의견을 받아들여서 이사 가기를 포기하신 것 같았습니다. 뒤늦게야 이사를 갈려고 했다고 했지만 만약 이사를 갔더라면 저는 엄청난 부담에 시달렸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부모님이 저를 위해서 이사를 고려했다는 자체로도 말이죠. 만약 제 자식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다면 저는 그대로 만족하면서 살겠습니다.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쳐서 하는 것이지 때문에 환경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수려하고 아름다운 농촌에서 배우는 것이 아이들 정서에도 좋고 낫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보다 부모님께 배우는 내용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수많은 도움이 되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제 교육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저의 전학을 고려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셋.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많이 배우지 못한 한이 남으셨는지 저에게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아주 강조를 많이 하셨습니다. 배워야 산다, 배움은 끝이 없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보다도 지금 배워놓지 않으면 나중에 늙어서 반드시 후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지만 저에게 절대 공부하라, 성적을 올려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고 제가 삐뚤어질까봐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매일같이 공부하라고 하거나 숙제 같은 걸 하지 않는다고 혼내시고는 성적에 계속 연연하십니다. 제가 그렇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용돈을 벌려고 과외를 하는데 과외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담을 주지 않고 성적을 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가르치면서 학생은 잘 따라주지 않고 나 혼자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원맨쇼를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가르치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저는 원래 공부에 대한 흥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건 부모님이 저에게 자신들이 못 배운 이유를 계속 설명해주시기 시작한 때부터 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이라도 열심히 고부해서 부모님의 기대에 충족시켜 드려야겠다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왜 그리 공부에 집착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이유때문이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여 제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부모님이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우회하여 표현하지 못해서 부모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제 주변에는 그런 분들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예 교육을 시키지 않은 무관심한 부모도 있는 반면 교육열이 너무 강해서 자식들을 혹사시키는 부모도 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중립을 지키시면서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주시기만 하여 저는 그런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교육에 대해 신경 써 주시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 넷. 자만심을 가지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성적이 계속 상위권이었습니다. 제가 많이 노력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공부에 흥미를 보이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않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의 노력으로 중학교 3년 내내 1등을 했었는데 그게 저의 실력인 줄 알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고등학교는 3년 동안 타지에서 생활했는데 성적이 처음 들어갈 때에는 중간을 맴돌아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계속 중학교에서 나온 성적만 생각하다가 한 방을 먹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 성적표를 바라보시는 부모님께서는 처음엔 다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시골과 도시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라면 중학교 때의 성적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먹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기는 이것밖에 되지 않고 이것이 한계라는 사람이라며 더 이상 하기 싫다고 그만 두는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자만심을 가지지 말라고 하셔서 전 새로운 마음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관습은 다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기다리는 문제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뿐이었습니다.

3년간 진짜 이 악 물고 공부만 했습니다. 옆에서 보면 독종이라고 말할 정도로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남들 따라 PC방을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여행 같은 건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라고 생각하지 않고 부모님의 미래라고 생각하여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성적이 점점 오르기 시작하자 다시 자만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조금 소홀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조금만 흩뜨려졌더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제게 그렇게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면 분명히 후회를 할 것이라고 끈덕지게 차분히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런 자만심이 생기면 그 때 그 당시에 부모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을 상기시키곤 합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자만심이 생기지 않도록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다섯.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는 원래 이기적인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속에, 주변사람들의 관심속에 저만 잘난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저를 생각하는 마음보다는 적었던 것 같습니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이겠지만 저 스스로가 그만큼 저에게는 소중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공부하고 직장을 잡으면서 나중에 자기 혼자 잘되는 그런 사람이 결코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친구가 저희 집에 한 번 놀러왔던 적이 있었는데 친구가 저희 집에 놀러오는 것은 드문 일이라 부모님께서 친구가 놀러왔다고 말씀드렸더니 마을에서는 가장 큰 식당으로 데려가 주셨습니다. 솔직히 서운하기도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남을 잘 대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자식 중에 제가 오빠이고 첫째이기 때문에 여동생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적엔 여동생과 잘 놀아주었던 같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러 나가시면 여동생 말도 태워주고 머리도 묶어주기도 했습니다. 아직까지 여동생을 만나면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곤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버릇들이 나오곤 합니다. 제가 먼저 하는 것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훨씬 마음에도 편합니다. 설사 제가 조금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저를 보면 어리석고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그건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의 착각 속에 빠져 생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의지에 반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의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그런 상태에서 말입니다. 남을 배려하다간 손해를 본다고 다들 말하지만 손해를 좀 봐도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편하고 남을 배려하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저는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여섯. 열심히 공부하라고 걱정거리를 없애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소심한 편이라 어떤 문제가 있거나 걱정이 있으면 그 상황을 해결이 될 때까지 다른 일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꽉 막힌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이런 성격으로는 공부에만 전념하기에 다소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뭔가 걱정거리가 생기면 그 걱정에만 매달려 공부는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이런 제 성격을 아시고는 걱정을 최대한 없애주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사실 그런 부모님의 노력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이제는 생각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부담감에 죄송할 따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몰랐었는데 직접 전화통화를 한 것을 듣고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말이라 집에 와서 편히 쉬고 있는데 부모님은 안계시고 동생만 있었습니다. 동생에게 부모니은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 그냥 볼일 보러 나갔다고만 말씀해주셔서 의심스러웠지만 그냥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 전화로 이웃이 전화가 와서 아버지가 괜찮으시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소린가 싶어 다시 동생에게 되물어보니 대답을 하지 않자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는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크게 다치지 않아서 며칠 뒤에 퇴원하신다고 저보고는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 동안 저를 위해서 참 많이 배려해주신 것 같습니다. 늦게 공부하고 주말에 집에 돌아올 때면 집안에 있는 일들을 하나도 말씀 안하시고 그냥 제게 편히 쉬다가라고만 하셨습니다.

나중에 되어서야 물어보니 3년간 저의 학업을 위해서 어떤 스트레스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모습과 노력 덕분에 부모님의 기대에 충족시키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음 놓고 공부에도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먼 거리를 떨어져 3년 동안 생활했음에도 항ㅅ아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필요 이상의 정성을 쏟아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열심히 공부하라고 걱정거리를 만들어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일곱. 아껴쓰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풍족하게 자라나지는 않아서 부모님께 아껴쓰는 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웬만한 것은 다시 쓰도록 노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걸 몇 가지 들어보자면 연필이 짧아졌을 때 그냥 쓰고 버릴 수도 있지만 연필 위에다 긴 막대 같은 것을 덧대어 끝까지 쓰라며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옛날엔 연필도 이렇게 좋은 연필이 아니었고 그냥 쓰면 부러지고 하는 불량스러운 연필이라고 하셨습니다. 연습장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겐 연습장의 빈 공간까지 빽빽하게 쓰라고 하셨고 옛날에 연습장을 하나 사면 거기에다 다 쓰고 다시 지우고 쓰셨다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건 모두 다 사주셨지만 낭비하는 건 부모님께서는 싫어하셨습니다.

학용품 말고도 다른 것들도 아껴쓰는 법에 대해 알려주셨는데 먼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돈을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건 모두 손수 직접 만드시곤 하셨습니다. 칼을 한 자루 사도 그걸 오랫동안 쓰고 무뎌지면 다시 갈고 쓰기를 반복하여 칼이 본 형태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까지 쓰셨습니다. 그렇게 아껴쓰다보니 저는 어릴 적에 많이 불편하다고 느꼈습니다. 한 번 산 옷을 색깔이 바래지도록 입었던 적도 있었고 필요한 것을 구입하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제 아껴쓰는 버릇이 몸에 베인 것 같습니다. 남들은 아무렇게나 펑펑 쓰는 걸 보면 괜히 불안하기도 하고 저렇게 쓰면 어떻게 감당을 하려나하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저보다도 부모님이 아껴쓰는 걸 보여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래된 신발은 삼부로 버리지 어떻게든 활용하셨으며 못 쓰게 된 이불이라도 해도 개나 닭집에 넣어서 겨울철을 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일부러 퇴비 같은 것도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물들의 배설물들을 이용하여 퇴비를 만들었으며 농사를 지을 때에도 웬만하면 직접 손으로 다 하셨습니다. 반찬 같은 것도 딱 먹을 만큼만 만드시고 버리지 않으셨으며 밥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부모님이 계셨기에 낭비벽이 생기지 않고 아껴쓰는 버릇이 저절로 저에게 생겨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아껴쓰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여덟. 인성교육을 중시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부모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공부가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라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성숙해져야 하고 매사에 올바르게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인성교육을 부모님께 많이 받았습니다. 저를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인식할 수 있도록 저를 훈계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자식이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인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자기 자식의 잘못을 감싸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혼내셨습니다. 제가 멀리 시험을 치고 늦게 돌아온 적이 있는데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잠깐 논다고 부모님께 연락을 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곧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해서 집에 가는 시간까지 부모님께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께서 왜 연락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면서 저를 많이 혼내셨습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닌 건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일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제 자신만 생각한다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 하나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지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인성교육을 받으며 만약 변변치 못한 직장을 잡는다고 하더라도 부모님께서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어려움은 무시하지 말고 도와주며 남들에게 피해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들을 도와주면서 살면 나 자신 뿐 아니라 자기에게도 다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손해 보는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지만 나 하나의 손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득을 본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손해가 아니라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커서도 저는 그저 공부를 잘하는 것 보다 인성 교육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격은 사회에 나가도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식을 키울 때에는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가르칠 생각입니다. 항상 먼저 사람이 되는 교육부터 시킬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인성교육을 시켜주시고 중시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마흔아홉. 무조건 하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사시는 안방에 보면 하면 된다는 글귀라 새겨져 있는 나무판이 있습니다. 저희 집이 가훈이라 할 만큼 부모님께서는 자주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나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면 된다는 말은 쉽지만 막상 부딪혀 보보고 포기라는 말은 나중에 생각하라며 무조건 일단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디에 나서도 활동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시작조차 못 해보고 흐지부지 끝낸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걸 하고 싶어도 괜히 시작했다가 낭패를 보면 어쩌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 어쩌나하고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은 반장선거에 나가고 싶어 지원을 하려고 했으나 괜히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나 싶어 지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런 저를 보시면서 무조건 하면 된다라며 어떻게 되든지 다음에 한 번 지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반장 선거 때 한 번 나가보기로 했습니다. 떨어지든 말든 일단은 한 번 해보고 결심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반장선거에 나가니 아이들은 모두 다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웅성거리는 소리도 무시한 채 공략을 발표하고 개표를 했는데 제가 반장에 당선 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잘했다며 일단 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도 제가 하기 싫은 공부는 잘 하지 않았습니다. 딱 보기에 어려워보이고 내신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랑 다른 과의 학생들과도 같이 경쟁하는 과목이라서 다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었지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한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그 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무조건 하면 된다라는 생각에 무모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한 번 도전하여 성공하게 되었고 좌절을 잘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도전하고 또 다시 도전하는 것이 힘이 부치고 고되지만 도전을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않고 머뭇머뭇 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얼른 도전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일단은 먼저 하면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하면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 동생을 아끼고 보살피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하나 밖에 없는 저의 여동생입니다. 어릴 때 같은 방을 쓰면서 정말 많이 놀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집을 비우시는 일이 많아서 그만큼 이야기도 많이 나눴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던 것 같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많이 싸웠는데 싸우면 항상 오빠인 제게 많이 양보하고 져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네가 잘 챙겨줘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때 당시 어린 마음에 저를 더 많이 혼내시는 부모님이 밉기도 하였습니다. 커 가면 커갈수록 동생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어지고 그제야 부모님께서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그렇게 저를 많이 혼내시면서도 저를 더 많이 챙겨준 것이 저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네가 커서 나중에 동생에게 보답해라는 말인 것 같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제가 먼저 대학에 들어가자 동생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애매 졌습니다. 비록 실업계지만 동생은 실업계에서도 항상 성적이 상위권이었습니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제가 먼저 대학에 들어가니 제게 더 많은 기대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집안 형편도 그렇고 인문계를 나온 제 자신에게 부모님께서는 항상 공부에 대한 말씀을 하셔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국 동생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사연을 듣고 나니 괜히 동생에게 더욱 미안해지고 애틋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동생이 일을 하고 있고 저는 군대에 있지만 제가 직장을 잡고 나서 동생에게 번듯한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 할까 싶습니다.

동생과 말도 하지 않고 맨날 티격태격 싸우는 걸 주변에서 보면 제 생각엔 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고 가족인데 당연히 소중히 생각해야 하고 보살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동생을 보살피라는 말씀이 아직도 생각이 나고 기억에 남습니다. 부모님의 뜻대로 되어서 다행이고 다음 휴가 때에는 동생을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밥이라도 한 끼 하면서 못 다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나중에 더욱 크면 동생에게 더욱 잘해줘야 겠다는 맹세도 해야 할까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동생을 아끼고 보살피라는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하나. 무슨 직장을 다니든 만족하며 살라는 것에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저를 이렇게까지 공부를 시키신 이유는 제가 좋은 직장을 가져서 좀 더 편한 생활을 하라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나서 거기에 만족하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제가 무슨 직장을 가질지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께서는 무슨 직장을 잡든지 거기에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짓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다른 직장처럼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으며 겨울엔 쉬는 시간도 있기에 만족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자기가 다니고 있는 직장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든지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해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욕심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것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최고의 자리만 탐내는 것이 바로 만족하지 못한 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짓는 일에 아주 탁월한 기량을 보이고 계십니다. 다른 분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하시고 요령도 많이 터득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된 이유는 개발을 끊임없이 하시고 직업에 만족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밭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만큼 피나는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게 만족하는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떤 직장을 잡을지 잘 모르겠지만 직장을 잡기 위해서 군대에 있어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글을 쓰고 신문도 스크랩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직장을 잡고 있는 사람들 보면 항상 불만투성이에다 피곤해합니다. 그 이유가 자신의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가 받는 연봉도 적다면서 투덜대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버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그런 모습이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주어진 것에 대해 불평불만 하지 않고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대하여 저도 부모님을 닮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무슨 직장을 잡든지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만족사면서 살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무슨 직장을 가지든지 만족하며 살아라고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쉰둘. 자기들보다 할머니께 효도하라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 집과 할머니집이 같은 마을에 있었지만 저는 할머니 집이 더욱 좋았습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4살 정도 무렵부터 할머니와 같이 살다시피 했습니다. 할머니 집에서 살았기에 할머니가 저를 유난히 귀여워 해주셨습니다. 항상 저를 먼저 챙겨주셨고 먹을거리가 있으면 저에게 가져와서 주셨습니다. 매일 같이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저녁거리는 어떤 걸로 할지 고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때에도 먼저 만들지 않으셨고 저를 챙겨주셨습니다.

그만큼 추억이 많았는데 할머니 집에 다른 할머니들이 특히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여름엔 시원한 마루가 있었고 겨울엔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할머니집에서 민화투를 많이 치셨는데 할머니 무릎에 누워 화투 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의 음식솜씨도 참 좋으셨는데 특히 애호박전을 잘하셨습니다. 전을 해주시면 저는 그걸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곤 했습니다. 만약 할머니가 잔치에 다녀오시면 거기에 있는 음식들을 싸오셔서 저에게 갖다 주시곤 하셨습니다. 점자 제가 나이가 들도 할머니 집에서 부모님 집으로 옮겨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방문이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방문이 뜸해지고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난 이후부터는 거의 할머니 집에 방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입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갔더니 후두암으로 수술하셨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를 보고서는 저를 이렇게까지 키워주신 것에 대하여 많이 효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씀을 듣고 찾아뵙지 못한 것도 그렇고 죄송스럽고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드리지 못한 것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께서 정정하시고 불편한 곳이 그렇게 많이 없으시지만 할머니께서 아직도 일을 하시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젠 그만 일하시고 쉬셔도 될 텐데 뭔가 계속 일을 하시려고 하여 그만하라고 해야겠습니다. 저를 어릴 때 키워준 할머니의 사랑을 일깨워준 부모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제게 할머니의 사랑을 알려준 부모님과 저를 어릴 때 성심성의껏 키워준 할머니께 감사드립니다.

감사 쉰셋. 무리를 해서라도 학업을 마무리시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까지 대학 2년이 남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학하여 10년 넘게 저의 교육을 위하여 제 뒤를 밀어주셨습니다. 제 교육 때문에 월급의 대부분을 학원과 학교에 쏟아 부으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교육만 아니면 부모님께서 편히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허리끈 조아 매지 않고 살 수 있었을텐데라는 죄송함이 몰려옵니다.

저는 다른 부모님들도 다 비슷하지만 저희 부모님께서는 특히 저를 위하여 교육에 신경 쓰셨습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 터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시켜주신 것에 대해 너무 죄송해서 제가 다니던 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는 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제가 혼자 공부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봐 부모님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고 하니 부모님께서는 왜 다니지 않느냐고 계속 학원을 다니라고 권유하셨지만 저는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다며 부모님을 설득시켰습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숙사 관리비에 급식비까지 들어서 저에게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아직 학생의 신분이라서 돈을 빨리 벌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여서는 이제 제가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고 용돈만이라도 제가 벌 수 있도록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올 때 등록비 등을 다 대주셨기에 그것만이라도 제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노력했지만 부모님께서는 뭐든지 필요하면 무조건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저의 교육에 신경을 써주신 것이 아마 자신들의 교육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항상 가방끈이 짧은 것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저로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가방끈이 짧은 것에 대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를 이만큼이나 키워주셨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은 2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계속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제 등록금은 이제 제가 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나이에 제가 돈을 벌어서 제가 학교를 다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업을 마무리하고 나중에 부모님이 원하신다면 아직 남은 학업을 이룰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학교 가서 못 배운 한을 실컷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무리를 해서라도 저의 학업을 마무리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넷. 부모님의 말씀은 항상 존중하라고 교육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특히 좀 엄하셨습니다.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훨씬 엄하셨는데 그런 부모님께서 항상 당부하신 말씀이 어른들의 말씀은 들어서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조금은 가부장적인 면모도 보이셨지만 그게 교육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때로는 따르기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라고 시키시면 그 말씀을 따르기 어려워 안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부모님께서는 저를 많이 혼내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고 저한테 나쁘게 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다 맞는 말씀입니다. 어린 마음에 그 당시에는 저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컴퓨터 게임 같은 경우도 조금만 하라고 하시면 그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혼난 적도 있고 또한 항상 물건을 집에서 들고 나가면 제가 잘 까먹고 안 가져와서 수첩에 적어가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서 혼난 적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면 틀린 말이 하나 없는데 그땐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 안에는 생활의 지혜가 진짜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어머니께 음식 같은 것을 배울 때에도 비법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가장 기본적인 밥을 지을 때에도 알맞게 밥을 짓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자취할 때 잘 애용했었습니다. 잘 새겨들어서 전혀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또 부모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척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큰 대역죄이며 불효라고 생각하여 부모님이 남겨주신 머리카락 하나도 자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아서 후회하고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가 아마 부모님께서 저를 잘 알고 계셔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보다 부모님이 저를 가장 많이 알고 있고 제가 어떻게 해야할지 많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법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저에게는 항상 법이었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면 피해를 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부모님의 말씀은 존중하라고 교육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다섯. 이웃과 지내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골에 살아서 이웃과 만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로 건너편에 이웃들이 살았었고 길가 만나는 사람들이 이웃들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이웃과 지내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마을에는 어르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예의범절을 특히 중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식들을 모두 외지로 다 보내고 홀로 시골에 남아서 지내시는 분들이라 저 같은 아이들을 보면 매우 귀여워해 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렇게 귀여워해주시는 만큼 어르신들에게 예의 없게 행동하지 말고 항상 말동무도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어르신들과 말동무를 참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말동무를 많이 하다 보니 어르신들의 지혜를 많이 얻었고 옛날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저를 집으로 데리고 오셔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특히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한국전쟁 때 피난길에 오른 이야기와 전쟁에 참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다 부모님이 이웃들과 지내는 법을 알려주셔서 이런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설사 이웃과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먼저 가서 사이를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같이 붙어 지내다보니 말다툼을 할 수 있지만 이게 오래가서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버릇이 크면서도 저에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습니다. 제 근처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주변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나 자신부터 챙기는 버릇을 들이다보면 주변의 미움을 살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또 이웃과 지내려면 수시로 찾아뵙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방을 찾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시간도 걸리고 힘든 일이지만 이것이 이웃과 잘 지내는 방식이라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을 교육받고 주변사람들과 아무런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그 때 당시 부모님께서 그렇게 교육을 해 주신 덕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여섯. 끝까지 항상 지켜봐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셨습니다. 오직 제 의지대로 하게 놔두셨다고 하면 맞을 겁니다. 부모님께서 앞에 나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선두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제 의견부터 들으시고는 어떻게 할지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특히 제가 공부에 관해서는 이 대학에 가라, 저 대학에 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체 언급조차 하지 않으셔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담감을 덜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어느 고등학교에 갈지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정해서 고등학교에 진학 했습니다. 저는 인문계와 실업계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인문계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할지 실업계로 진학하여 빨리 돈을 벌지 고민했었습니다. 인문계를 원하시는걸 알면서도 저는 고민에 빠졌고 부모님께서는 그때에도 아무런 조언이나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니 제가 선택하게 하여 후회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부모님의 의지대로 하셨다면 제가 엄청 많이 부모님을 원망하셨을 거라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이외에도 대학을 선택할 때에도 부모님께서는 제 의지대로 하도록 존중해 주셨습니다. 대학에는 사립과 국립이 있는데 국립이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이었겠지만 국립이든 사립이든 어느 대학을 가든지 상관없고 오직 너 마음대로 하면 부모님께서는 지원을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립을 선택했고 지금의 후회는 없습니다. 제가 부모님이 뒤에서 묵묵히 지켜만 봐주시고 그랬던 이유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항상 생각이 많아서 뭔가 결정을 할 때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성격입니다. 누가 옆에서 이렇게 하라는 말을 해주면 더 혼란스러워서 결정을 하기가 더욱 힘이 들어집니다. 부모님은 그런 제 성격을 아시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것도 있었고 가장 예민한 공부라는 부분에서 저의 의견을 존중해주셔서 제가 부모님의 생각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끝까지 항상 지켜봐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쉰일곱. 양육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집 안에 동물들을 많이 키워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저는 그 동물들이 저의 친구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제가 말 한마디를 하면 저를 잘 따랐었고 하루 종일 동물들과 놀았습니다.

처음에 부모님께서 동물을 키우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사람을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제가 좋아하는 개들하고만 놀다가 다른 동물들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연히 제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더니 동물들을 키우려면 관심을 넓게 가져야 한다고 하시며 골고루 신경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개 말고도 오리, 닭, 토끼 같은 것들을 키웠었는데 이 많은 동물들을 키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냥 밥만 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어디가 아픈지 꼼꼼히 살펴봐야 하고 애기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혼자 관리하기에 벅찬 걸 부모님께서도 느끼셨는지 옆에서 보시고는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개 같은 경우에는 사람을 워낙 잘 따르기 때문에 사람을 잘 따르지 않거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는 무기력해진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상 유무를 파악하고 밥도 제때 꼬박꼬박 줘야지 한꺼번에 많이 주거나 조금주면 분명히 이상히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개밥을 줄때도 있지만 사람이 먹다 남긴 잔반을 줄 때에는 꼭 삶아서 줘야지 그냥 주면 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닭 같은 조류들을 키울 때에는 매일 알을 낳기 때문에 알을 보고 그 동물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어린 제가 관찰하기에는 많이 벅찬 일이었지만 저에게 양육하는 법을 알려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아끼는 동물들이 있어도 티내지 말고 공평하게 대하라는 말이 아직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양육법 덕분에 제가 아이를 낳더라도 아무 무리 없이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그렇게 교육해주신 덕분에 누구를 더 편애하고 좋아하는 걸 티를 잘 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분명히 일이 생길 테고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잃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양육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여덟. 듣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말하는 것보다 듣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과묵하신 편이여서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저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하는 것은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5살배기 아기도 말하는 것은 할 수 있고 이에 비해 듣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하는 건 남에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지만 말을 잘못 함으로 인해서 만 냥의 빚을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 건 훈계를 하실 때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농사를 잠시 접어두고 다른 일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상사에게 말을 한 번 잘못하셔서 직장에서 미운털이 박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때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시고 한동안 힘들어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듣는 것에 중요성을 알려주셨습니다. 듣는 것이란 상대방의 관심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모모의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모모에서 주인공은 자기의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어느 소녀인데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아주 잘했습니다. 뭔가 분쟁이나 싸움이 생기면 모두 모모에게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이 모모같은 사람이 되라는 뜻 같았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저는 듣는 걸 좋아하고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에 저에게 말할 때 잘 들어준다면서 고민 상담소라고 칭찬도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전 말하는 능력이 그렇게 탁월하지가 않아서 듣는 능력이 발달했고 그 능력이 부모님 덕분에 더욱 극대화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듣는 법을 알아서 남이 이야기를 할 때면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에 제 자신에게 상대방이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신뢰도 가고 인상도 유해보이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듣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쉰아홉. 기다릴 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참을성이 없고 덤벙대는 성격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항상 지적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잘 고쳐지지가 않았습니다. 참을성이 없는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너무 참을성이 부족해 기다려야 하는 때에 기다릴 줄을 몰라서 오히려 더 기다린 적도 많았습니다. 특히 시험 칠 때에 문제를 끝까지 읽지 않고 답을 체크하여 아는 문제도 틀린 적이 많았고 처음에 말을 잘 듣지 않고 판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한다며 항상 얘기하셨는데 말과 행동보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은 한 번 시행되면 되돌릴 수 없지만 생각은 수 없이 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기다린다는 것은 머피의 법칙과도 비슷한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이만큼 기다렸으니 그만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할 때에 그 동안 기다려왔던 것이 다 산산이 무너질 수 있는 그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진득하게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기회는 찾아오신다고 하시며 그 기회를 잘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고 기회는 찾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부모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다림이란 기다릴 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 덕분에 성급한 성격과 덤벙대는 것들이 조금씩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곰탱이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저는 미련 곰탱이가 되어도 좋습니다.

제가 나중에 결정을 할 때에도 함부로 결정하는 버릇도 사라졌습니다. 항상 기다리며 꼼꼼히 살펴보고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기다린다는 건 때로는 제게 많은 고통과 지루함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런 것쯤은 이제 제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기다림을 가지고도 또 다른 기다림을 기다리는 것도 익숙해졌습니다. 기다림 뒤엔 항상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기다림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 정리 정돈의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제 주변에는 지저분하고 더럽습니다. 이건 아직까지 잘 고쳐지지 않는 저의 버릇입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모르지만 작업 같은 것을 할 때에 책이나 자료들을 다 펼쳐놓고 하는 스타일이며 정리를 잘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할 때에도 책들을 옆에 쭉 쌓아놓고 하나씩 빼가면서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저와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너무나 깔끔하셔서 결벽증까지는 아니지만 그만큼 깨끗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인지 나열해보면 매일같이 방바닥을 쓸고 닦으시고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것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정리를 마무리 하십니다. 그날에 조금 힘들거나 피곤해도 항상 청소는 하고 주무십니다. 정리를 잘 하지 않고 청소를 잘 하지 않는 저에게 정리정돈과 깨끗함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남이 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속이 아니라 겉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속마음을 보고 첫인상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또한 겉으로 보인 그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정리와 청소는 기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들어도 저는 잘 고쳐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불도 잘 개지 않고 청소는 다 동생이 도맡아 했습니다. 조금 치우는 척 하기도 했지만 너무 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는 가장 기본적인 정리정돈과 주변이 잘 정리가 돼야지만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최대한 제가 다녀간 자리의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조금은 복잡했던 것들이 정리가 되곤 했습니다. 항상 뭔가 복잡하고 어지러웠는데 한 번 정리를 말끔하게 하고 나니 가슴이 뭔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비로기 그게 쭉 이어지는 습관으로 되지는 않았지만 옛날에 비해서는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 같습니다. 옛날엔 책 하나 치우는 것도 버거웠고 귀찮아서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다시 한 번 제게 정리정돈의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감사 예순하나. 학업을 포기하려 했을 때 잡아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너무 많이 힘들었습니다. 중학교에 있는 것에 비해 차원이 다르게 힘들었고 무엇보다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때 항상 1등만 하다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날고 기는 애들을 보니 처음부터 기가 죽었고 시험 때는 거의 중간권에서 맴돌곤 했습니다. 제 스스로에겐 너무나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보니 성격도 더욱 소심해졌고 다른 아이들과 거의 이야기도 하지 않아서 속으로만 저의 고민을 삭히곤 했습니다.

정말 그때는 제가 어디에 하소연 할 때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모님께 말하자니 부모님께 걱정만 끼쳐드리는 것 같고 친구들에게 말하자니 그렇게 친한 친구도 없고 해서 너무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실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려고 여러 번 고민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저 혼자 포기 상태에 있었습니다. 제 성격이 한 번에 폭발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 묵은 것들을 맘속에 삭혀두고 바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서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니겠으니 전학을 시켜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부모님께서 들으시자 제가 원래 학교도 잘 다니고 그랬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니냐며 걱정부터 하셨는데 저를 달래시려고 무진장 노력을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 학교까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혹여나 제가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아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일까라는 고민을 매일같이 하셨고 근 한 달 동안 저를 위해서 매일 전화도 해주셨습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돌렸던 계기는 어머니께서 네가 선택해서 학교에 들어갔으니 무조건 마치고 나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학교를 옮기면 분명 네가 후회할 것이고 처음의 그 선택을 저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돈을 빨리 벌고 싶은 마음에 공장에 들어가려고 실업계를 가려고 했는데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엄청난 후회를 했을 것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제 진로도 바뀌었을ㅌ에고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학업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바로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둘. 열이 펄펄 올랐을 때 옆에서 매번 간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마다 치러지는 의례처럼 저는 감기에 걸리거나 항상 어디가 아팠습니다. 아마 옛날에 몸이 많이 약했는데 그게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2~3일 정도 아파서 드러누워 있을 땐 정말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서 집 전체가 저를 고정시켜놓고 돌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서 제 옆에 와서 저를 항사 보살펴 주셨습니다.

한 번은 아파서 토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제가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니까 열이 내릴 때 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제 옆에서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그 다음날이 되나 열은 조금 내려서 쉬지도 않으시고 죽을 끓여다가 제 앞에 다 두고서 혹여나 뜨거울까봐 식혀서 저에게 떠먹여주셨습니다. 매번 제가 아플 때마다 그렇게 해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말 지극정성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제가 아픈 징조를 딱 보면 알아차릴 정도로 저에 대해서 완벽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부모님은 제가 잘 알지 못해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렇게 잔병치레가 많았고 아프기도 했었는데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렸을 때에는 근 보름동안을 고생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병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심한 병이었습니다. 보기에도 흉측해서 누가 본다면 비위가 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병에 걸린 제 옆에서 부모님께서는 정말 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해주셨습니다. 수포로 얼룩진 옆구리를 보더라도 비위가 상하실텐데 약도 발라주시고 밤잠 설치는 저를 위해서 같이 깨어서 고통을 나눠주셨습니다.

제가 아픈 것만 간호해주시고 정작 본인이 아픈 건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식중독에 걸렸을 때 그냥 방에 누워 1~2일 있고는 덜 나으신 것 같은데 일을 하러 밖에 나가셨습니다. 아픈 내색을 전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꾹 참고 아픈 모습을 잘 보이려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아픈 모습을 보인다면 혹시 제가 걱정할까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저를 신경 써 주시고 아플 때 간호해주시고 저는 그 고마움을 보답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아플 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셋.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학교까지 매번 태워다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때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잘 다치고 그래서 다음날이면 낫겠거니 이렇게 생각하다가 다음날 일어나보니 다리가 엄청나게 부어 있었습니다. 거의 걷지도 못할 정도였고 병원에 어서 빨리 가야할 상황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봐 말씀을 드리지 않고 절뚝거리며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인대가 많이 늘어나 있었고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의사는 다리를 움직이지 말고 안정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보니 집에 가려면 아직 2주의 시간은 남아서 그 동안 빨리 낫고 부모님께 아픈 모습을 보여드리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계소 걷게 되고 안 움직일 수가 없어서 다리는 빨리 낫지 않았습니다. 집에 갈 날이 가까워오자 부모님께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왜 다치고 빨리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치고 말씀을 드리지 않은 제가 문제였습니다. 원래는 저를 데리러 올 때 버스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셨는데 차로 40분 이상이 걸리는 학교까지 직접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그것도 밤에 오셨는데 제가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10시가 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밤눈도 많이 어두우신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저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차를 천천히 모시며 저를 태우고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괜히 제가 다쳐서 아버지만 고생하시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 매번 그렇게 태워다 주셨습니다. 너무나 죄송한 마음에 다리가 다 낫지 않았는데도 붕대를 그냥 풀어서 다 나았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운전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이 글을 통해서 그땐 정말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마운 마음보다 죄송한 마음이 훨씬 큰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다리를 다쳤을 때 학교까지 태워다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감사 예순넷.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고 기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3년 내내 공부만 한 것은 결국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지 궁리했던 고등학교 생활이었고 가장 힘들었던 때도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제 고등학교 생활은 아침 6시에 일어나 밥 먹고 씻고 하면 7시였고 7시부터 소위 0교시라는 자습시간을 가졌습니다. 8시부터 학교수업은 시작되었고 보충수업시간까지 더해 오후 6시에 학교정규수업시간이 끝이 났습니다. 1시간의 저녁식사 후에는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했습니다. 기숙사생은 11시까지 의무로 공부를 하고 11시까지 하고 나서도 새벽 1~2시까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각박하게 짜인 학교 생활 속에 저의 시간이란 있을 수 없었고 저 또한 이를 악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누군가 짜준 스케줄을 따라가면 몸이 적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3년간 준비하고 공부한 결과 조금은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부담이 되지 않는 국립대학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부모님께 알려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는 잘 했다며 저를 칭찬해주셨습니다. 여기에는 고 3때 담임선생님의 노력도 있었는데 저에 대한 자기소개서를 정말 잘 써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잘한 일이 없는데 저에 대한 장점만 적어주셨고 남들에 비해 성심성의껏 적어주셨습니다.

대학입학통지서는 저의 3년간의 노력의 결실이지만 그 뒤에는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저 혼자 이뤄낸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입학통지서를 받고 나서 부모님이 저를 위해 해주신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혹여나 부담이 될까봐 신경을 쓰지 않게 해주신 것부터 시작해 집에 갈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신 것도 그렇고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고 그렇게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뻐해주셔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 입학통지서는 모두 부모님이 이뤄낸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고 기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다섯. 외조모상이 났을 때 침착하게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을 거의 마무리 지을 때쯤 어머니께 한 통의 연락이 왔습니다. 수업을 하러 가는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께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너무나 침착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담담하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내일 바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장례식에 갈 때까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여 비로소 장례식에 도착하자마자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 도착해서도 어머니의 표정은 담담하셨습니다.

저를 보시고 앞에 있는 외할머니께 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조문객들을 모시기 위해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서도 어머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이 담담하고 아무 느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밤을 새고 나서 외할머니를 고향 뒷산에다가 묻으러 가는 날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태운 리무진을 앞세우고 우린 뒤를 따라 갔습니다. 외할머니의 고향에 도착하여 관을 들고 산으로 향했습니다. 비탈길의 산을 올라 외할아버지의 산소 옆에 외할머니가 묻히는 그때에 어머니도 참았던 울음을 그제야 터뜨리셨습니다. 외할머니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울음을 참으셨던 이유도 있겠지만 저에게 담담한 모습을 보여 혹여나 제가 이성을 잃지 않게 하려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사실 많은 슬픔과 주체할 수 없는 허무함이 어머니를 덮쳤겠지만 그렇게 슬픔을 억누른다는 게 매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됩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울음을 참으셨던 이유가 저에게는 매우 죄송한 이유였습니다.

조금 있으면 외할머니의 기일이 돌아오는데 그 때 반드시 휴가를 내서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신 외할머닌 댁을 찾아뵐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외조모 상이 났을 때에도 제가 혹여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봐 침착하게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여섯. 친척들의 만남을 항상 주선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서 사람을 사귀로 친하게 지내려면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뜸하게 만나는 친척들과는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낯을 많이 가리는가 하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어떤 용무가 있을 때 말을 걸려고 하면 머뭇거리는데에만 시간을 다 허비하고 제가 보기에도 너무 답답한 성격이었습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저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습니다. 이런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친척들과는 혈연지간이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친척들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면서 친척들과의 만남을 많이 만들어주셨습니다. 저를 일부러 친척들의 집에 보내셨습니다. 처음에 친척들 집에 혼자 갔을 때에는 너무나 어색했습니다. 친척들에 저에게 잘해주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습니다. 며칠간의 친척집 나들이는 저에게 가식방석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저를 친척집에 보내셨는데 친척들과는 가족처럼 평생 볼 사이인데 어색해지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계속 친척들 집에 갔더니 친척분들과도 친해졌고 어색하지도 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젠 제가 휴가를 나가면 친 척분들을 찾아뵙는 사이가 되었고 술도 한잔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날이나 명절에 친척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예전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이젠 제가 먼저 말을 꺼내서 화제를 만듭니다. 그런 모습들에 친척분들은 놀라시기도 합니다. 어릴 적부터 말이 없었고 과묵한 그 아이가 이젠 말도 잘하니 말입니다. 친척들 말고도 이젠 낯선 사람들과도 말을 그럭저럭 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고 제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쭈뼛거리기보다는 먼저 말을 걸어서 길을 묻기도 하고 남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만큼 제 성격이 바뀌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 덕분에 친척들과 많이 친해졌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저의 성격까지 바꿔준 부모님이 너무나 위대하다고 느껴집니다.

다시 한 번 친척들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친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일곱.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최대한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살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하는 것이 참으로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용돈이라도 제가 벌어서 써야 했기에 힘들더라도 참고 그냥 일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이젠 시험기간이 다가오자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성적으로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으면 성적도 좋고 장학금도 받고 일거양득인 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학기 때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이 상위권에 들어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액수는 아니어서 실망하기는 했습니다.

부모님께 최대한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장학금을 받았지만 결론적으로는 부모님께서 저에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셔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때 용돈도 보내주셔서 금전적으로 무리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장학금도 물론 장학금이지만 이것으로 부족해서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이런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부모님께서 만류하시지 않으시고 적극 권유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면서 닥치는 대로 그런 것들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고등학교 수능이 끝나자마자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경험도 있었고 사람을 상대하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경험을 쌓는 것이 늘어가서 그만큼 대처하는 방법이나 요령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주셔서 공부하는 것과 일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게 힘이 들지 않았고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걸 보고 주변에서는 기특하다며 장학금을 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다 부모님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열심히 하라고 하셨고 지치고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분명히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학금까지도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준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 예순여덟. 상을 타오면 몰래 기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서 상을 참 많이 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상도 글쓰기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제가 글쓰기를 통하여 백일장에 자주 나가게 된 이유는 원래 글 쓰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고 일기를 쓰는 것도 귀찮아하는 아이었습니다. 한 번은 학교선생님께서 제가 일기를 쓰는 걸 보시고는 되게 혼을 내셨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부터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타오면 부모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상패를 타와서 보여드려도 그냥 잘했다는 말만 남기시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을 타오면 항상 책상위에나 올려두고 그냥 방치해두다시피 했습니다. 상을 타온 어느 날, 상장을 책상위에 올려두고 나중에 살펴보니 상장이 보이지 않았고 주변을 살펴봐도 없었습니다. 한참뒤에 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상장을 들고 오셨습니다. 아들이 상을 타왔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왔다며 약주를 조금 하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주를 하지면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관심이 없나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식이 상을 타왔는데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희 부모님은 그렇게 티내지 좋아해주신 덕분에 오히려 덕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다른 부모님들은 자식이 상을 타오면 겉으로 너무 좋아해주고 기를 살려주기에 여념이 없지만 그렇게 기가 산 아이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가 제일 잘난 아이로 자라나기 쉽습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부모님께서도 그런 걸 염려하셨나봅니다.

제가 큰 상을 타오든 작은 상을 타오든 항상 과도한 칭찬은 금물이라는 듯이 제게 대하시던 모습은 제가 항상 겸손하게 살게 된 것에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부모님의 그런 교육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집에는 부모님께서 티를 안내며 좋아하셨던 상장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하나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상을 타오면 몰래 기뻐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예순아홉. 직접 짜드린 목도리를 선물했을 때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수능이 끝나고 시간이 넘치도록 남았던 것 같습니다. 이미 대학도 붙어놓은 상태라서 마음도 편안했고 남들처럼 논술준비나 이런 건 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을 한번 배워보자 싶어서 문득 뜨개질을 배우면 어떻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주변에 있는 뜨개질 집을 찾아서 무턱대고 찾아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들께서 빽빽이 들어차있었고 남자 손님은 처음 받아본다며 매우 반겨주셨습니다. 거기서 실도 사고 바늘도 사고 본격적으로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코를 빠뜨리고 간격도 제각각이어서 누구를 선물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를 위한 목도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뜨개질을 배우고 어머니를 위한 목도리를 하나 만드는데 시행착오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특이한 실로 만들어서 코를 끼우는 것도 애를 먹었고 레이스가 달린거라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목도리를 만드는 것이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하루에 4~5시간 씩 일주일을 잡고 만들어야 완성할 정도로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뜨개질을 열심히 했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뜨개질에만 전념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모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아주머니들이 예쁘다며 누구를 줄 거냐고 물어보면 어머니를 드린다고 하면 모두 놀라셨습니다. 어머니에게 드릴 목도리를 완성시키고 잘 포장을 하여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사실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실 줄을 몰랐습니다. 원래 내색 같은 걸 잘 안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목도리를 받으시더니 표정이 밝아지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모습에 선합니다. 한동안 그렇게 제가 직접 목도리를 하고 다녔습니다. 제가 직접 짜준 목도리를 하고 다니시는 모습을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좋아해주시니 제가 어머니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한 것 같았습니다. 아직은 봄이지만 조금씩 준비해서 제대를 한 후에 다른 목도리도 하나 새로 선물할 생각입니다. 그때도 이렇게 좋아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짜드린 목도리를 선물했을 때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 사춘기 때 감정조절을 못하여 친구랑 싸웠을 때 타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사춘기가 다른 남자 또래아이들에 비해서 조금 빨리 찾아온 편이었습니다. 또래 여자 아이들과 비슷하게 찾아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춘기가 빨리 찾아와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데 다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툭하면 신경질을 내고 친구들의 사소한 장난에도 화가 났습니다. 사춘기 소년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사춘기 시절에 화가 나고 아무런 이유 없는 곳에 화풀이를 하다 보니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친구와 별 것 아닌 이유로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다가 결국은 몸싸움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남들보다 성장이 빨라서 그 친구를 조금 다치게 했습니다. 선생님들부터 부모님들까지 다 모여서 왜 싸웠냐고 물어봤는데 싸운 이유는 그냥 화가 나서 그랬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부모님께서는 저를 크게 혼내지 않았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많이 혼났을 텐데 제가 사춘기가 온 것을 아셨나봅니다. 사춘기가 오면 그럴 수도 있고 충분히 남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화가 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가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었고 다른 사람의 행동도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많은 신경을 쓰기 싫어서 남들이 뭐라고 말을 하든지 간에 그냥 무시하면서 지냈고 그냥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싸웠을 때에도 저는 제 잘못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먼저 시비를 걸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만 몰아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잘못이 있으면 인정을 해야 하고 지금은 네가 예민한 시기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저 대신에 친구 부모님에게 사과를 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에게 막 혼내시고 다그쳤으면 저는 다른 길로 삐뚤어 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와서 잘 생각해보니 참 올바른 교육방법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사춘기의 소년을 잘 구슬리면서 다루기 힘드실 텐데 저를 잘 다독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시 예민한 시기, 친구랑 싸웠을 때 저를 잘 다독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 하나. 저를 위해 차를 구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집에 차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차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에도 짐을 옮길 때에는 경운기 하나로 충분했고 추석이나 명절, 친척집에 방문할 때에는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그럴 때면 동생과 제가 불편하다며 투덜거렸던 생각이 납니다. 버스를 타고 오랜 시간동안 있으면 멀미를 해서 비닐봉지를 하나씩 챙겨가곤 했습니다.

차가 없어서 또 제가 불평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남들은 학교를 마치고 부모님께서 차를 태워다주시거나 어디로 여행을 갈 때에도 자가용을 몰고 가는데 저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차를 사자고 계속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차를 구입하기로 부모님께서는 마음 먹으셔서 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따려고 시험공부를 하셨습니다. 집에서 운전면허학원까지 가는데에만 왕복으로 1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학원을 가기에도 힘들었고 운전면허시험을 준비하랴 농사일도 하랴 일이 더욱 늘어나셨습니다. 오전에는 운전면허 공부를 하러 학원에 다녀오시고 오후에는 다시 농사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밤에는 운전면허시험을 공부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셔서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하시고 차를 사셨습니다.

그렇게 차를 구입하고 나서도 바쁜 농사일을 제하고 지각할 것 같으면 저의 편의를 위해서 학교까지 저를 태워다주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곤 하였습니다. 솔직히 차라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때문에 차를 구입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버지가 차를 사셔서 제게 편리한 점밖에는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가 괜한 고생을 하셨고 굳이 차를 살 필요가 없는데도 차를 구입하셔서 부담만 안겨드린 것 같습니다. 이제는 눈이 침침하셔서 운전을 하시는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얼른 차를 잘만하여 아버지가 운전을 그만하시게 하여 아버지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태워다 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여행을 즐기실 때 제가 운전기사 노릇을 톡톡히 해드려야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위해서 차를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 둘. 대학을 고민할 때 확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열심히 공부했지만 대학에 대한 확신은 그렇게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들었고 설사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해낼 자신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자신감도 많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항상 불확실한 미래 속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워낙 조용해서 반에서 저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묻곤 했습니다. 선생님들께서도 저의 이름을 아시는 분은 드물었습니다. 그렇게나 조용한 아이였지만 제 속마음은 조용하지가 않았습니다. 공부는 한다고 하는데 성적은 잘 오르지 않고 괜히 남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제가 하는 일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상은 고등학교에 올라가 3년 내내 그랬었는데 고 3 때 특히 제일 심해졌던 것 같습니다. 수능이 점점 앞으로 다가올수록 제가 수능을 잘 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자주 두통 같은 것이 찾아왔으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원인이 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을 표출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 걸리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 들어간다면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마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동생도 공부를 잘했지만 실업계였고 저는 인문계였기에 부모님이 제게 기대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제게 말하기를 대학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학비 걱정은 전혀 하지 말고 학업에만 전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동생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제가 대학에 들어가고 난 후 결국 1년 뒤 동생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어머니께 나는 왜 대학에 보내주지 않느냐고 울고불고 했지만 지금은 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른 성공해서 동생의 학업을 마무리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고민할 때에 부모님께서 제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 확신으로 인하여 끝가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대학을 고민할 때 확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셋. 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힘이 들 때마다 항상 옆에 있어주던 분은 부모님이었습니다. 어릴 땐 잘 몰랐습니다. 힘이 들 때에는 항상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고 친구들에게 한 번씩 말하곤 했습니다. 그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 같습니다. 혼자서 해결하거나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다보면 언젠가는 친구들이 떠나기 마련이고 제 자신에게 의지하다보면 한계에 부딪히는 날이 많았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지주와 기대를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들어줄 수 없고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저와 놀 때는 즐겁게 놀지만 정작 제가 힘이 들 때에는 옆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힘이 들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는 하지만 제가 인간관계가 그렇게 깊지 않아서 그런지 그런 친구들은 제 곁에 없었습니다. 모두 제 잘못이지만 그런 친구들에게 실망감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묵묵하게 옆에서 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기쁠 때나 힘이 들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 상담을 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나눈 것도 않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저에게 위로가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부모님이 제 옆에 계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큰 힘이 되었고 제가 힘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귀신 같이 저의 표정을 읽어내셨습니다.

특히 가장 힘이 되었을 때에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주변에 말할 사람도 없고 나밖에 없다고 느낄 때 항상 옆에서 챙겨주시곤 하였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유일한 낙이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부모님이 해주시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을 뵙고 밥을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도 났었고 2주 동안 떨어져 있는 동안에 활력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부모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기대는 사람보다 그걸 받아주는 사람이 더욱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저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넷. 동생과의 사이를 회복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생과 사이가 나빠진 시기는 중학생 때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동생도 사춘기였고 저도 사춘기여서 서로 예민할 때였습니다. 동생과 한 방을 썼었는데 볼 때마다 티격태격 싸움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동생이 싫고 미웠습니다. 한창 그렇게 티격태격 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제가 고등학교를 타지로 나가 동생과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도 하지 않게 되고 사이는 더욱 벌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사이가 엄청 좋았습니다. 매일 같이 붙어있다 보니 이야기도 많이 하고 어디를 갈 때에도 꼭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동생을 좋아했는데 갑자기 사이가 안 좋아지니 제 생활에 뭔가가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그 기류를 느끼셨나 봅니다. 원래는 말도 많이 하고 서로 잘 놀았는데 아무 말없이 있는 걸 보니까 알아차리신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일 없다고 둘러대다가 지금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게 제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남매라서 서로 서로 결혼해 버리면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지만 동생은 출가외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지금 잘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듣고 보니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핏줄이 섞인 남매 사이인데 이대로 가다가는 친한 친구사이보다도 더 못한 사이가 될 것 같아 사이를 회복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동생에게 먼저 말을 걸어 이야기도 나누고 화제가 될 만한 것들을 입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동생도 제 의도를 파악했는지 제가 하는 말에 반응을 보이며 옛날처럼 돌아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저랑 동생사이에서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사이가 멀어졌을 것입니다. 사실 동생과 제가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혼내실 법도 하지만 전혀 혼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동생과 제가 더욱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가금씩 옛날에 동생과 싸웠던 생각이 나는데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동생과 저의 사이를 회복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다섯. 저를 위해 컴퓨터를 구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에 컴퓨터가 있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부모님께 컴퓨터를 한 대 사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컴퓨터 한 대 가격이 200만원 가까이 했기에 감히 사달라고 말을 못했었습니다. 학교에 컴퓨터실에서 게임을 하다가 막상 집에 오면 컴퓨터를 한 대 사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컴퓨터가 없기에 친구 집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친구 집에서 컴퓨터를 같이 하다가 집에 돌아오고 나면 계속 잔상이 아른 거리곤 했습니다. 컴퓨터로 게임만 하는 것이 안이라 학원의 강의도 들을 수 있어서 덜 나간 진도는 컴퓨터로 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컴퓨터를 산다고 해도 저희 마을엔 인터넷이 아직 설치되기 전이였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렇게 컴퓨터 없이 지내고 있다가 부모님께서 저에게 컴퓨터를 한 대 사줄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감히 사달라고 꺼내지 못한 말을 부모님께서 직접 해주시니 너무 기뻤습니다. 며칠 뒤에 컴퓨터가 저희 집에 들어왔습니다. 컴퓨터 뿐 아니라 프린터기까지 사주셔서 공부할 때 쓰라고 하셨습니다.

컴퓨터가 생기고 나니 정말로 편했습니다. 학교 숙제 같은 것도 인쇄해 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친구네 집에서 눈치를 보면서까지 컴퓨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얼마 뒤 인터넷선이 깔려 학원에서 듣는 수업을 집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여가시간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컴퓨터에만 빠지지 않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하루에 공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1시간 이상 컴퓨터 오락을 하지 말라고 하셨고 되도록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제겐 너무나도 큰 선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가 사달라고 해서가 아니가 부모님께서 제게 필요하신지 물어보시고 사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낍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부담이 되었을 텐데 저를 위해 사주셔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숙제를 할 때에도 친구네 집에 가서 하지 않게 되고 친구네 집에서 컴퓨터를 계속 붙잡고 있다가 눈치도 안 봐도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위해 컴퓨터를 구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여섯. 야생 개를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농사에 해가 되는 동물들을 많이 잡고 다녔습니다. 수렵기간에는 꿩같은 것도 잡으셨고 제비나 까치 같은 것도 잡으셨습니다. 저에게도 새총 만드는 법을 알려주셔서 해보라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 그런지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번은 밖에 나가셔서 늑대 비슷한 것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자세히 보니 입은 길쭉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는 도중에 발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크게 겁내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가면 관심을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하면서 슬금슬금 뒤로 내뺐습니다. 먹이로 유인하여 아버지가 그 야생개를 잡으시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원래는 일반 집에서 키우던 개인데 버림받았거나 집에서 뛰쳐나가 길을 잃어서 그렇게 야생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고 늑대개라고도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혹시나 위협이 될까봐 주둥이를 묶어놓으셨습니다. 조금 안쓰러워 다시 다가가보니 얌전하게 가만히 있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반겼습니다. 이렇게 순한 데 입이 묶여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되어 풀어달라고 하니 아직은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시며 좀 더 사람 손에 길들여지면 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어느덧 야생개가 사람 손에 길들여저서 잘 따랐습니다. 밥을 먹을 때만 입을 풀어줬는데 이젠 풀어줘도 괜찮겠다 싶어서 아버지가 다 풀어주셨습니다. 입을 풀어주고 나니 완전 활발해 졌습니다. 일반집의 애완견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른 개들에 비해 몸집이 크고 입이 늑대처럼 컸지만 제 눈에는 귀엽기만 했습니다. 한동안 그 개와 재밌게 놀았습니다. 몸집도 크고 해서 제가 등에 올라타도 거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귀여워했던 개였는데 산에서 잡아왔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기관 같은 곳에 이 개를 보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원래 제가 개를 키우면 죽을 때까지 키우는데 개를 다른 곳에 준다고 생각하니 막막해졌습니다. 그 개도 자기가 어디로 간다는 것을 아는지 제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개는 기관으로 보내지고 또 한동안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 다른 개를 구해주셔서 위로는 됐지만 제겐 그 개가 선물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야생개를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일곱. 수능이 끝나고 자유롭게 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험생들에게 수능이 끝난 자유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3년간의 노력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홀가분한 마음은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수험생들이 다 그렇듯이 수능이 끝나고 무엇을 할까라는 궁리만 하고 그날을 기다려왔습니다. 막상 수능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고 나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막막함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을 보면 부모님이 얼마간 놀게 한 후에 영어학원이나 자격증을 따라고 독촉하거나 이제 수능을 쳤으니 논술을 준비하고 더 심한 친구들은 수능을 잘 보지 못하며 재수학원에 벌써 등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시험을 잘 봤든 보지 못 했든 그렇게 고생했으니 이제 마음대로 놀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정작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게 놀라면서 통장으로 돈까지 보내주셨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대학에 1차까지만 붙은 상태여서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2달 정도 아무 생각 없이 놀았던 것 같은데 의미 없이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이거해라, 저것해라라고 독촉했다면 수능이 끝났는데도 심한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누가 시키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생활은 지긋지긋했습니다. 추억이 많았고 친구들과 정도 많이 쌓인 것도 사실이지만 1~9교시까지 빡빡한 틀 안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학교를 의무적으로 가야한다는 것 자체가 저를 너무 옥죄여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능이 끝난 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2차 면접은 물론 저 혼자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합격까지 했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 2개월 반이라는 공백 속에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겁게 놀았던 때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수능이 끝나고 저를 자유롭게 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여덟. 항상 저의 부담감을 덜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장남이어서 그런지 커 갈 때부터 부담감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직접 언급 안하시고 주변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셨습니다. 제가 말도 없고 조용한 성격 탓에 항상 듬직한 이미지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사람들에게 각인시키게 되었고 그만큼 기대치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역에서 이름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니 항상 저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공부는 잘되가니부터 시작하여 반에서는 몇 등 하고 전교에서는 몇 등 하는지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세세하게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들이 듣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학생 때 친척들에게 잘 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제 성적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고 제가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조차 잘 물어보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그런 의도를 알게 된 건 고 3때였습니다. 고 3이 되면 부모님들은 반드시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해야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바빠서 면담을 못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담임선생님이 저희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여 면담을 잡으셨습니다. 저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못 오실 줄 알고 면담을 못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의아했습니다.

담임선생님과 부모님간의 면담이 시작되고 저는 잠시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실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얼마 뒤 부모님께서 면담을 끝내시고 바쁘셔서 먼저 가시고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저에 대해서 정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은 안하셨지만 혹시 저에게 부담을 줄까봐 성적 같은 것이나 저러 학교생활 하는 모습들을 담임선생님에게 다 물어보신 것입니다. 저에게 또 관심이 없는 척 하는 것도 제가 다 알아서 하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그걸 알고 나서는 제가 부모님께 제 성적과 학교생활이 어떤지 조금씩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니 제 속도 조금은 후련해지고 부모님도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아들이 말해주니 속이 시원하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께서 해주신 덕분에 제가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부담감을 덜어주시기 위해 노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일흔아홉. 할머니의 수술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릴 적에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만큼 할머니는 제게 소중하고 고마우신 분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부분에서 할머니께서는 담배를 많이 피우셨습니다. 저도 호기심에 몇 개비 피워봤지만 아버지께 걸려 된통 혼나고 난 이후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하루에 한 갑 가까이 담배를 피우셨습니다. 매일 볼 때마다 담배를 피우고 계셨고 마을에 있는 할머니들 중에서도 할머니만이 담배를 피우셨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께 담배를 피운 이유를 물어보니 옛날에 너무 힘들어 담배를 피우시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서른도 되지 않아 할아버지를 한국전쟁에서 여의시고 혼자 몸으로 세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려니 고생을 잊게 해준 건 담배였다고 하셨습니다. 근 30년 가까이 담배를 피우셨으니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부모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았기에 할머니가 후두암에 걸린 걸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수술이 필요한 위급한 상황이었고 친척분들은 어른들만 알고 있자고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시며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할머니와 같이 살았고 만약 저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제가 나중에 엄청 원망할 것이라 했습니다. 비록 할머니가 수술장까지 들어가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없는 할머니를 바라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좋게 끝났지만 평생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어 기계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때 당시에 부모님께서 저에게 할머니의 수술결정을 알려주지 않고 나중에 알려줬다면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경사는 참석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조사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할머니께서도 제가 옆에 있어서 든든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저를 먼저 부르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 여든. 제대로 인사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혼자서 이루는 법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작용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란 것도 순전히 부모님 덕분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 있는 사람 덕분이라 항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숫기가 없어서 인사성이 밝거나 유쾌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고서는 항상 인사를 밝게 해야 주변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였습니다. 그 결과 주변에서 예의 바른 아이로 비춰졌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인사부터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인사를 할 때 항상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자기보다 나이가 적든 많든 간에 인사를 먼저 하여 손해 보는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전 가장 기본적으로 나누는 것이 인사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이 가장 기본이 안 되는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지랖이 넓은 것이 인사예절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인사를 할 때에도 진심을 담아서 하다보면 어느새 제가 가지고 있는 불평도 사라진다고 하셨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할 줄 아는 그런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하다 보니 주변사람들에게도 조그마한 온정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고마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일인 줄 몰랐으며 상대방의 기분도 쉽게 파악이 되고 눈치도 조금 빨라진 것 같았습니다. 그 덕분에 웃음도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인사를 할 줄 안다는 것이 이렇게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줄 몰랐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나중엔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은 나비효과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지금도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길에서 인사를 할 기회가 오면 항상 제가 먼저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러면 상대편에서도 제 인사를 반갑게 맞아주거나 기분 좋게 받아줘서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인사하는 법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잘 자랐습니다

감사 여든하나. 소극적인 성격을 바꿔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의 소극적인 성격을 바꿔주시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셨습니다. 제가 왜 소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냐고 묻는다면 달리 답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건 저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제 성격을 개조시키는데 많은 공을 들이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소극적인가 하면 남이 말을 걸지 않으면 저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돌부처처럼 조용히 있었습니다. 친한 사람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낯선 사람과 있을 때는 너무나도 불편했습니다. 또한 어디 나가서 발표를 하거나 큰 시험을 치룰때에는 너무 긴장이 되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제가 소심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 성격을 바꿔주시기 위해 제가 제일 잘하는 것부터 칭찬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저를 칭찬하시기에 저도 의아해했지만 기분만큼은 좋았습니다. 그리고 소심한 성격에 대한 저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격이 소심해서 나서기를 싫어하고 옆에서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며 제 모습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설명해 주셔서 남이 볼 때 제 모습이 어떤지를 잘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얼른 성격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답답해 보였고 한 번에 고치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씩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과 이야기도 잘하고 아직 찬선사람과 있으면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제 얘기도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해의 위치에 따라서 변하는 그림자의 길이처럼 저에게 변화를 주고 있는 것 같았고 또 거기에 제가 따랐기 때문에 성격이 변하였고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은 완전히 소극적인 성격이 고쳐지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제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을 볼 때에도 너무 많이 변했다는 소리를 듣고 활발해졌다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소극적인 성격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둘. 하나를 알면 열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삶의 지혜가 많으십니다. 다른 부모님들도 많겠지만 제가 보는 저의 부모님은 제가 뛰어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인생에 대한 경험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융통성이라는 것이 없어서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아는 것에 만족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심화나 발전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셔서 그런지 뭔가 실용적이고 지름길 같은 그런 방법들을 되게 많이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논에 물꼬를 터야할 일이 생기면 그 시기와 적절성을 고려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책을 도모하셨습니다. 비가 계속 내릴 때까지 기다려 단 한 번에 물꼬를 터줄것인지, 아니면 물꼬를 여러 개 만들어 빨리 물을 흘러가게 할 것인지 등 해결책을 많이 생각하고 계시고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선택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기적절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즉흥성과 재치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저도 이런 부분들을 부모님한테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런 능력이라면 하나를 알고도 열을 알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이런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꽉 막히고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를 가르쳐줘도 하나를 오히려 까먹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호기심에 가득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바로 질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질문을 하면 부모님께서는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부모님께 물어봤고 부모님께서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저도 자식이 생긴다면 이런 교육방식이 가장 본받을만한 것이라 생각해서 반드시 이렇게 교육시킬 것입니다.

많은 질문들 속에서 서서히 답을 찾아가고 그 답 속에 또 다른 답을 찾게 하는 질문에 하나를 알면 열을 알게 되는 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며 제가 부모님께 받은 교육방식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하나를 알면 열을 알게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셋.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그 우물 안에 갇혀 있으면 그 우물이 자기 세상이라고 느끼듯이 만약 그 개구리가 밖으로 나온다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을 자기의 우물로 삼을 것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저를 우물 속에서 계속해서 꺼내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좁은 곳에서 놀지 말고 항상 넓은 곳에서 놀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곳이 있으면 자기가 보는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생각하는 것도 제한적이어서 저의 전학도 고려해주셨고 이사까지도 생각하셨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본인들의 희생까지도 감수하시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셔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넓은 세상을 제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좁은 제가 사는 마을을 꼭 벗어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희생을 하는 것을 보니 얼른 이곳을 벗어나 넓은 세상을 바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세상은 다르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얼른 제게 찾아왔으면 했습니다.

좁은 학교에서 벗어나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넓은 도시에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니 시야가 넓어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생각이 넓어져 뭔가 깨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정된 관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새로운 것들이 제 안에 유입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높은데서 바라보니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또 다른 넓은 세상으로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넓은 세상을 제게 보여주셔서 아직 제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부산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나중에 직장을 구하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봐서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속 좁은 사람이 되지 말고 남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도 동시에 가져 더욱 큰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말씀대로 저는 계속 넓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하여 끝없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더 넓은 세상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넷.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또한 그 능력도 탁월한 것 같습니다. 제게 만약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로 표현하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많은 곤욕을 치룰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제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도 제게 쉬운 일입니다. 이런 능력을 갖춰준 건 바로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말을 잘 하지 못하고 표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글을 쓰는 걸 항상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하니 글을 한 번 써봐라고 하셨고 그렇게 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보니 글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제게 쉬웠습니다. 제가 말을 하면 항상 뭔가가 부족하고 틀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데 글을 쓰면 그런 느낌을 받지 않고 또한 틀리면 다시 고쳐 쓰면 되기 때문에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제가 말을 하다가 보면 한 번 틀리면 그 뒤부터는 수습이 잘 안되어 곤욕을 치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제게 글쓰는 능력을 최대한 극대화 시켜주셨습니다. 제가 어디 대회 같은 곳에 나가서 글을 쓰면 항상 그걸 읽으셨습니다. 책에서 제 글이 나오면 그 글을 읽고 이 글은 어떻게 썼냐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 물으시니 대답을 해야 하니까 막상 대답을 하고 나면 한 번 쓴 글이 제게 퇴고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쓴 글이 어디가 잘못되었고 어떤 부분을 새로 다시 고쳐 써야 하고 잘 된 부분은 또 어딘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습작으로 쓰는 글이든 어디에 게재가 되는 글이든 항상 부모님께 보여드립니다. 부모님께서는 그 글을 보시고 잘되었다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제게 하시지 않습니다. 제가 항상 그 글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모님의 방식이 너무나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글을 써서 공모전 같은 곳에 냈었는데 조만간 부모님께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다섯. 외모에 신경 쓰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사춘기가 될 때쯤에 제가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을 보시고는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다보면 정작 다른 중요한 곳에 신경 쓰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춘기 때에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그럴 것입니다. 지금 커서도 그런 건 맞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모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뿐이고 정말로 중요한 건은 외모가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겉모습은 남을 홀릴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효력을 잃게 되며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춘기 시절,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솔직히 그렇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머리를 매만지고 혹여나 냄새라도 날까봐 깨끗이 씻고 그렇게 했는데 부모님께서는 그런 제 모습을 보시더니 혼을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혼을 내시는 모습을 보고서 왜 이렇게 꾸미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실 까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춘기가 끝나고 저도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말씀하셨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에 중요한 자리에 나가야하거나 공적인 곳에 참석할 때에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항상 외모에만 신경을 쓰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쓰는 시간보다는 저를 더 발전시키고 투자하는 곳에 신경을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렇게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냥 깔끔하게만 다니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도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다수 있습니다. 매일 다른 옷으로 바꿔 입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1시간 이상이나 외모에 투자하는 사람을 보면 겉모습보다는 속을 가꾸고 아껴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스치곤 합니다. 지금도 그렇게 항상 저에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여섯.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께서는 너무나도 신중하십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항상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생각하는 버릇이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행동하고 생각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부모님을 보고 배워 성격이 점차 변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생각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항상 의논을 하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무턱대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도로가 생겨 논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왔었는데 너무나도 신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도로를 만드는 업체 쪽에서는 얼른 논을 팔아야 일을 진행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부모님께서는 그런 독촉 때문에 얕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이 논을 팔아서 어떻게 될지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저도 그 때 옆에 있었는데 몇 주간을 부모님께서 논 때문에 상의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저도 성격이 부모님처럼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부모님이 그렇게 하시니 저도 그렇게 변하는 것은 당연할 것 같습니다.

처음엔 성격이 저도 행동으로 바로 옮겨졌지만 점차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뭔가 문제에 부딪히면 항상 생각부터 먼저 합니다. 그래서 그 생각대로 옮기고 만약에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또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바로 옮겨서 난처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 바로 옮기다보면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것에 비해서 시행착오를 굉장히 많이 겪게 됩니다. 막상 부딪혀 보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는데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듯이 항상 생각부터 먼저 하는 습관이 제게는 좀 더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조금 더 과묵해지고 생각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 저를 보시는 사람들 중에서는 답답하다는 분들이 있으신데 저는 직접적인 행동으로 보여드리는 것보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실행에 옮기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일곱.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대학교 들어가기 전, 고등학교 때에는 성격이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많이 받았고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심해서 세상을 항상 비판하고 왜 이렇게 살아야하며 제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은 항상 제 탓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이며 주변 인물들의 잘못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나 부정적이어서 주변 사람들조차 저에게 부정적으로 대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면모만 보이니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긍정적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집안에서도 절대 불화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뭔가 부모님께서 서로 싸우셔도 저 몰래 그냥 다투시는 것 같았고 그리고 금방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험한 곳이 아니며 그냥 살아갈만하다고 그 당시에 저에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말을 듣고도 저는 항상 비판적인 생각과 뭔가 불만에 가득한 행동으로 부모님을 대했습니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아무런 내색 없이 제 이야기를 다 받아주시면서 저를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정적인 모습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뀐 건 부모님의 혁혁한 노력이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제가 부모님 덕분에 긍정적으로 변하고 나서는 매사에 불평 불만하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매일 같이 받던 스트레스도 줄어들었고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버릇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변하고 나니 제 자신에게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불평이나 불만은 하다보면 끝이 없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 이렇게나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여나 불평이나 불만할 것이 생기더라도 부모님이 하신 행동을 보면서 생각의 전환을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부정적으로 살다가보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쉴 새 없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하게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오히려 주변사람들에게서 저에게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고 웃어주었습니다.

다 부모님이 긍정적으로 행동하시고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저에게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시고 모범적인 모습만 보여주려 하신 것이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여덟.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평생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항상 옆에 있어주는 것도 항상 가족이기 때문에 언제나 가족을 보면서 힘을 내기도 합니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제게 가족을 중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더라도 항상 생각하고 먼저 가족부터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부모님과 남매인 저와 동생 이렇게 4명이 있는데 항상 저희 가족부터 챙기셨습니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행동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들을 다 표현해주셨습니다. 만약 제가 바빠서 친척집에 늦게 갈 것 같으면 저를 위해서 기다리셨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같이 행동해야 하는데 저만 빼놓고 간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가족과 고등학교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6년 정도 떨어져 지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이렇게 제가 떨어져 있어서 항상 챙겨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저에게 가족은 소중한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항상 연락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 그래서 매일 부모님께서 연락이 오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매일 연락이 오는 것에 대하여 귀찮아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그렇게 저를 생각하시고 가족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깨닫고 알아가고 나니 전혀 그 연락이 귀찮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반가움으로 느껴졌습니다. 부모님께서 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죽을 때까지 가족이라는 인연이 이어지지만 누군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 항상 가족에게 잘해서 후회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후회는 하기 마련이지만 그 후회를 최대한 하지 않도록 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가족에게 더 열심히 신경 쓰고 더 잘해주고 항상 연락하여 평생토록 가족이라는 인연이 단순히 인연이라는 말로서 끝나지 않고 동반자라는 생각으로 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가족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여든아홉. 재물에 연연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릴 때에는 돈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살았습니다. 주변에 널린 게 먹을 거리였고 마을에 그렇게 부자인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이 그냥 비슷비슷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부자인 친구와 가난한 친구들이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끼리끼리 논다고 부자인 친구들과 가난한 친구들이 따로따로 노는 것을 보면서 제게 혼란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렇게 구분되어서 놀아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점차 커가면서 그 모습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때 한 친구는 과외를 한다면서 한 달에 100~200만 원 정도 되는 과외를 받고 그것도 모자라 매주 주말에는 논술학원에 피아노 학원까지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학원을 비싼 곳에 다니냐고 물어봤더니 그냥 부모님이 다니라고 해서 다닌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저는 전혀 학원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학원을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저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에게 저도 고액과외를 받고 싶었고 제가 하고 싶은 것도 학원을 다니면서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을 부모님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나 부담이 될까 해서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부모님께서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저에게 학원을 한 번 다녀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아마 친척분들에게 들으신 것 같은데 공부도 열심히 하니까 저에게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솔직히 마음이 흔들린 건 사실이었지만 학원을 다니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요즘에는 고액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많다고, 나도 그렇게 시켜주고 싶은데 그렇게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죄송한 건 저였습니다. 부모님께서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줄 몰랐으며 많은 경제적 부담이 되실 텐데 저에게 학원을 다니라고 권유까지 해주신 것만으로도 은혜롭게 생각합니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 물질과 돈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였습니다. 그런 건 단순히 삶을 윤택할 수는 있지만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과외를 받지 않아도 번듯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다시 한 번 재물에 연연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 기대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어리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장남이고 첫째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리광을 피우는 광경들을 보면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것 같아 싫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런 걸 또 싫어했습니다. 저 스스로 해결하려고 많이 노력했고 누구에게 기대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모님의 교육도 컸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항상 듬직한 사람이 돼야하고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 중에서도 특히 아버지가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항상 보면 말이 별로 없으시지만 듬직하시고 의지하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이끌어 가십니다. 애정표현도 안하시고 비록 칭찬도 잘 안하시지만 저는 그런 모습이 훨씬 좋습니다. 애정표현도 잘하고 칭찬도 잘 해주시는 부모님들도 물론 계시지만 저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 덕분에 어리광 같은 건 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항상 듬직하게 행동했고 제가 힘들면 혼자 해결하지만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제가 위로해주는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기대는 사람은 항상 기대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의지가 약하고 굳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며 언젠가는 기대는 사람이 없을 때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기대는 것을 싫어하고 어색합니다. 차라리 혼자서 제게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비록 저에게 많은 애정표현 같은 걸 하지 않으셨지만 저를 무척이나 아끼고 관심이 있다는 걸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무뚝뚝한 성격이 저에게 기대는 법을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 기대지 않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친구들도 항상 저에게 너는 걱정거리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걱정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괜히 친구들에게 말해서 걱정거리를 늘리는 것보다는 저 혼자 해결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격이 다소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봐오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기대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하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을 믿는 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주변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속고 또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사람을 믿는다는 자체가 제게는 어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랑 제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매일 그 친구랑 같이 지내면서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하는 사이까지 발전했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드문 경우였습니다. 친구를 사귀면 저는 표면적으로만 사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저에게도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저랑 친하게 지냈는데 갑자기 사이가 안 좋아졌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을 해도 잘 받지 않고 저랑 만나는 기회가 뜸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서로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락을 했는데 그냥 그 친구가 무턱대고 연락을 하지 말라고 통보를 하고 그 이후론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다른 친구한테 그 이유를 들어보니 너무나 황당했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몰래 욕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그런 적이 없고 만약 그랬다면 저랑 이야기 하면서 풀어야 하는데 저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그 이후로 믿을 사람은 없구나라는 생각을 또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런 저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그건 제가 마음을 열지 못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믿으려면 먼저 그 사람이 저를 믿을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제 자신이 먼저 사람을 믿고 상처를 받더라도 그 상처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데 너 혼자 그렇게 살아가다는 영원한 외톨이가 될 수 있다고 하셔서 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사람을 다시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먼저 마음 문을 열고 다가가니 사람들도 제게 마음을 열고 다가왔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고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걸 받았습니다. 이후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지만 부모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사람을 믿으면서 그 상처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둘. 듬직한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촐랑거리거나 뭔가 떠들썩한 사람들이 제 주변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분위기도 잘 이끌어가고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많이 받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한번 제 성격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고 그런 주목들에 행복감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부모님과 겸상을 하고 있는데 떠들썩하고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부모님께 말을 걸면서 막 장난도 치고 그랬었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런 저를 보시고는 놀라는 듯 하시더니 왜 그렇게 행동하냐고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제 자신을 조금 바꿔보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저는 그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항상 말이 없고 듬직한 모습이 어울린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너는 너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마음대로 바꾼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며 촐랑거리는 것보다 듬직한 것이 부모님의 눈에 보기가 더 좋다고 했습니다.

가끔씩 저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시샘이 나기도 합니다. 저도 저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저는 듬직함으로 밀고 가려고 합니다. 그게 저에게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성격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전혀 저에게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초반에 조금 활발한 척 했지만 금방 제 성격으로 돌아왔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어색하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 제 듬직한 성격대로 살았더니 그게 훨씬 낫고 보기 좋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렇게 듬직하게 있으면 저절로 안정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를 보고 사시기 때문에 항상 그런 모습이 보기가 좋고 불안해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는 더욱 듬직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항상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듬직한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셋. 여유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정말 살면서 쉴 틈이 없이 살아온 것 같습니다. 뭔가에 항상 쫓기고 누군가가 쫓아올까봐 두려워서 도망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마 성격도 급한 부분이 있었고 교육체제가 저를 이렇게 바꿔 놓은 것도 한 몫 했습니다. 일정의 등수까지 올라가면 뒤에 있는 사람이 쫓아올까봐 항상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뒤에 있는 사람에게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서 앞에 있는 사람을 추월하기 위해서 여유 같은 건 제게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지으시니 제가 성적을 올리는 걸 보고서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천천히 해도 되고 오히려 급하게 행동하다가 더 처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서는 단순히 흘려버리고 저는 쉬지도 않고 열심히 등수를 올리기 위하여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지쳐버렸습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다보니 무리가 왔으며 뭔가 무기력해지고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싶었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데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지친 모습을 보시고는 저를 데리고 밭을 갈러 가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 만사가 귀찮았기 때문에 따라가기도 싫었습니다. 부모님이 밭을 묵묵히 가는 동안 저도 따라서 그냥 아무 말 없이 밭을 갈았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집에서 가져온 참을 먹었습니다. 그 참을 먹고 다시 일을 하니 뭔가 새로운 기분이었습니다. 잠깐 동안의 휴식이지만 일을 하는 도중에 그런 휴식을 짬짬이 가졌더니 전혀 일하는 것이 지루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일을 다 끝내시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일을 하는 것도 중간에 휴식이 필요하고 만약 휴식 없이 주구장창 일만 한다면 분명히 제 시간 안에 끝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달려왔던 거리는 전속력으로 달린 것이지만 지금부터라도 페이스 조절을 잘 하여 중간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대학 올라와서 부모님께서 해주신 말을 잘 새겨듣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뭔가 급한 일이 앞에 닥쳐도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면서 차근차근히 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넷. 저를 비춰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비춰 본적은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한마디로 사춘기 때 느꼈던 감정들이 그대로 쭉 이어진 것 같았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왜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혼란에 빠졌습니다. 저를 비춰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누군가가 구해줬으면 했습니다. 그게 바로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혼란에 빠졌을 때 저를 비춰볼 수 있는 능력을 제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제가 바빠서 이번에 집에 내려갈 수 없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그냥 알았다고만 했습니다. 보통 다른 부모님 같았으면 왜 못 내려오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꼭 집에 내려오라고 했을 텐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모님이 조금은 이상했습니다. 사실 아르바이트도 있고 집에 한 번 내려갔다 오면 제 생활 패턴이 많이 망가지기 때문에 그랬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부모님께서 다시 제게 연락이 오셨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제 안부를 묻는 전화였습니다. 그냥 저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고 평소처럼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부모님에게 대했는지 스스로 비춰지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하고 제 생활패턴이 바뀌는 것 때문에 집에 내려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부모님께서 직접 언급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렇게 제게 직접적으로 묻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제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부모님께서는 저를 비춰보시는 능력을 그렇게 키워주셨습니다. 무조건 제가 먼저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가 느끼고 스스로 행동을 교정하고 지금 어떻게 제가 남들에게 비춰지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교육시키는 방법이 정말 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지금까지도 혼란에 빠지지 않고 저 자신을 비춰보면서 앞으로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비춰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다섯. 어른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제 동생은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비록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부모님께서는 겉으로 표현하기에 동생과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셨으며 동생에게 좀 더 친밀하게 대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장남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부모님께 존댓말을 써왔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 그냥 친구처럼 대하고 존댓말과 반말을 막 섞어가면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마음에 그냥 부모님께 동생이 부모님께 하듯이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부모님께서는 저를 보고 엄청 혼내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버릇없는 행동과 말을 배웠냐면서 한동안 저를 교육시키셨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만 너는 충분히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어른들은 너의 친구가 아니고 너보다 훨씬 많이 살았고 인생의 경험도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어른들은 항상 공경해야 하며 예의를 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 정말 사람이 되지 않았고 막 대하는 어른일지라도 저도 똑같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른을 대할 때에는 항상 존중하고 어른을 약 올려서는 안 되며 비꼬아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부모님을 욕보이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저는 부모님을 항상 존경하게 되었고 부모님 뿐 아니라 다른 어른들에게도 버릇없이 굴지 않고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른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1살이라도 많은 사람에게는 막 대하지 못하고 예의를 갖추고 친해졌다 하더라도 일정 선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게 행동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어른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여섯. 은혜를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골에서는 항상 은혜를 받으면 은혜를 어떤 식으로든 갚아주려고 노력합니다. 저도 그런 방식이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바쁜 농사철에 일손을 도와주면 그 일손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국수라도 한 그릇 삶아서 내오거나 아니면 다음번에 일을 도와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절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으로 저절로 우러나와서 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한창 컴퓨터 자격증 시험 열풍이 불어서 저도 거기에 동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에 컴퓨터 선생님은 젊은 남자 분이었는데 저희가 자격증을 따게 하기 위해서 정말 많이 노력하셨습니다.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학교에 남아서 저희가 부족한 부분을 수업해주셨고 컴퓨터를 할 때에도 1:1로 수업을 해주셔서 저희가 진도를 따라가기에 훨씬 수월했습니다. 컴퓨터 시험을 치러 갈 때에도 원서비를 컴퓨터 선생님께서 직접 다 내주셨습니다. 저는 항상 그렇게 해주시니 당연하다고만 느꼈는데 그걸 부모님께서 말씀드리니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시는데 너도 선생님께 뭐라도 해드려야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직접 선생님을 찾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아들을 신경 쓰고 잘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직접 하시고는 고마운 건 직접 바로바로 고맙다고 말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저도 누군가에게 고마운 것이 있으면 항상 고맙다고 말하고 그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어서 그 은혜에 고맙다고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한다면 제가 불편하고 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말씀 덕분에 항상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도 합니다. 감사함을 느낀다는 감정에 대하여 축복을 받은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감사함을 모른다는 것은 스스로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부모님이 항상 어떤 은혜를 받든지 감사함을 보답하는 것 같아 그것이 항상 존경스러웠습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는 쉽지 않은 그런 것들이 아마 부모님들이 저에게 가장 많이 보여 준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은혜를 받으면 갚을 수 있고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일곱.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추억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추억들이 단순히 제게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간직되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런 추억들을 부모님께서는 저를 위해 만들어주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항상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히 관찰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기셨습니다. 때로는 사진으로 제 모습들을 담으시거나 아니면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과거에 찍었던 사진첩을 이리저리 뒤져보면 정말 추억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어릴 적, 토끼 귀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는 장면이나 닭에게 쫓겨 울고 있는 장면을 찍은 것도 있고 아주 잘 차려입고 소풍가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추억들이 제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항상 추억을 간직할 수 있고 그것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부모님께서 제게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부모님은 어릴 적에 사진 한 장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워낙 가난해서 사진을 찍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셨고 그게 한이 되어서 나라도 사진을 많이 찍어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고 지금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부모님의 추억을 만들어 드려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추억을 만들어 드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부모님이 추억에 남을 수 있을만한 것들을 실천해보이겠습니다. 평생 일을 하시느라 쉬지도 못하셨는데 얼마간은 휴식을 내어서 멋진 곳에 가시면 부모님이 제게 하셨던 것처럼 제가 사진사가 되어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저에게도 조금이나마 편할 것 같습니다. 제가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서 대학교에서도 MT를 가면 추억을 남기려고 사진을 제가 도맡아서 찍곤 합니다. 다 부모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록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제가 찍었다는 그런 자부심과 함께 남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었다는 생각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여덟. 뒤에서 지켜주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이기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승부욕이 없는 것이기 보다는 뭔가 분위기나 그런 것들을 파악하면서 임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려고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승부욕이 굉장히 강한 아이였습니다. 운동도 곧 잘해서 항상 달리기를 하면 1등을 도맡아서 했고 초등학교 때에는 반장도 몇 번 했었습니다. 그렇게 항상 뭔가 으뜸이 되려고 하고 이기려고 하니 저에게 부딪히는 점들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의 의견도 들어줘야 하고 항상 문제가 생기면 제가 먼저 나서서 하는 입장이 되어야 했으며 선생님께 혼날 때에도 대표로 제가 혼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점점 그 생활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랑은 그런 것들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에게도 너무 맞지 않아서 힘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몇 번 반장을 하다가 안하시는 걸 보시고는 왜 안하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냥 제가 힘들어서 안한다고 했더니 부모님께서도 그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앞에서 나서는 것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것이 더 적성에 맞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로는 뒤에서 몰래 도와주거나 그냥 지켜보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저에게도 편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만약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저만의 방식으로 도와주라고 하셨는데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그냥 도왔습니다.

한 번은 현금도난사고가 일어났었는데 범인이 나올 때까지 선생님께서 저희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할까 싶어 그렇게 큰돈이 아니어서 제 용돈을 그냥 그 친구의 가방에 넣어주고 나중에 그 친구가 돈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 저희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부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만의 방식으로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거나 도와주는 걸 좋아합니다. 만약 부모님이 그 때 억지로 반장을 하라고 강요하고 앞에 나서서 활동하라고 했으면 저는 더욱 힘들어졌을 것이 분명하고 적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아흔아홉.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누가 시켜서 하고 짜인 공식대로 살아갑니다. 저도 물론 그랬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만 꼬박꼬박하고 그 외에 것은 손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수동적인 아이였습니다. 저는 시키는 것만 잘하면 뭐든지 다 끝난 줄 알았고 잘한 줄 알았습니다.

나이가 점차 들고난 후 누군가가 제게 시키는 것이 많이 줄었습니다. 옛날에는 누군가가 제게 청소하라, 숙제하라는 말을 많이 했었던 것 같은데 이제 그런 말을 더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큰 것도 있었고 저 스스로 잘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도 제게 능동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시켜서 하기 보다는 저 스스로 하는 것이 올바르고 또 그 선택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으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늘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제가 능동적으로 변하게 된 건 부모님께서 저에게 신경을 그렇게 안 쓰는 척 하면서 저를 유심히 지켜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모님의 관심을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금씩 부모님의 관심을 알아가다 보니 저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 것 같습니다. 나중에야 부모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셨는데 직접 말하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나 제가 엇나갈까봐 저를 채찍질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스스로 하겠지라는 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부모님의 그런 믿음 덕분에 저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누군가 시키면 싫었습니다. 누군가가 직접 지시하기 보다는 저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좋았고 제가 다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깔끔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록 독불장군이고 고집이 센 면도 있지만 수동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부모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조금 더 스스로 할 수 있게 만들고 일도 하고 싶을 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부모님의 일을 도와주고 싶을 때 도와주고 공부도 하고 싶을 때 하라고 말씀하셨고, 하기 싫은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 하셔서 저는 지금도 하기 싫은 일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제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백.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부모님을 저를 사랑하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신 것을 100가지 감사의 마지막으로 장식하고 싶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부모님도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과 저는 서로서로 마주보며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서로 쑥스러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제야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편지에서나 어버이날 때 편지로만 사랑하고 아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는데 이제는 직접 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께서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제게 너무나도 어렵고 뭔가 말하기가 힘든 말이었습니다. 어디 캠프에서 참가해서도 저는 서로 사랑하면서 포옹하라고 하면 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친구를 사귈 때에도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보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가 저보고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그냥 돌려서 말했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자 친구와의 사이가 안 좋아진 것도 있지만 저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모님께서 사랑한다는 말을 제게 하지 않고 저도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지금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저를 아껴주시고 보살펴주셨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한 번 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죄송할 따름입니다. 비록 부족한 아들이고 별 볼일 없지만 끝까지 믿어주시고 저를 위해 희생해주신 부모님께 너무나도 큰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은 글에서만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휴가를 나가서 직접 나가게 되면 부모님께 직접 표현하려 합니다. 비록 제가 하는 말이 처음 하는 것이라 많이 서툴지만 제 진심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모님 항상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감사 백. 그리고….

부모님께는 감사하다는 말로 수식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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