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부부의ㅡ 신라왕릉 탐방-9 법흥왕릉

18대에서 22대 왕까지인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은 전해져 오는 능의 기록이 없어 찾아가 볼 수 없다. 그래서 그 다음 왕인 23대 법흥왕의 능을 답사하기 위해 선도산을 찾았다.

왕릉을 추정할 때 사찰을 기준으로 어느 방향에 있다는 내용을 보고 정하는데, 그 기준점이 되는 사찰이 없어져서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법흥왕릉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능재애공사북(陵在哀公寺北)'라는 말이 나온다. 즉 애공사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효현동에 애공사터라고 전하는 곳에 3층 석탑이 있어 법흥왕의 능이라고 추정하였다.

법흥왕릉을 가기 전에 마을 진입로로 들어가 '효현리 3층석탑'을 먼저 찾았다.

경주 효현리 삼층석탑

(慶州孝願里三層石構)

보물 제67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20

이 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보여 주는 3층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중(二重) 기단 위에 세워졌다. 높이는 4.6m로 규모가 비교적 작고 기단의 기둥 새김이 면마다 아래위에 세 개씩이며, 지붕돌의 층단받침이 4단인 점으로 보아 9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꼭대기 부분(相輪部)은 없어졌다. 1973년에 해체, 복원 되었다.

탑이 서 있는 이 곳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애공사지(哀公寺址)라고 전한다.

탑이 세워진 이 터는 신라 법흥왕이 죽기 전까지 승려로서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가 있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하지만 지붕돌의 밑면 받침이 4단으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의 조각이 가늘고 약하게 나타나 있어 9세기 무렵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실제 애공사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삼층석탑뿐인데 글자 한 자, 그림 한 점 없이 무뚝뚝하게 서서 궁금증만 자아내게 한다.

효현리 삼층석탑을 둘러보고 법흥왕릉으로 향했다. 법흥왕 이전의 왕릉은 대부분 평지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법흥왕 이후의 왕릉은 구릉이나 교외에 위치하고 있다더니 맞나보다. 효현동으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난 논길로 들어서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삼층석탑으로 먼저 갔으니 오른쪽에 위치해있다.

멀리 산자락을 살피니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 숲이 보인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소나무 숲을 보면 왠지 능이 있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법흥왕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바로 나온다.

산 밑에 주차를 하고 한적한 숲길로 들어섰다. 고요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길이다. 쭉쭉 뻗은 소나무 사이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작은 나무들, 그 사이로 비집고 나온 풀잎들, 모두 정겹게 느껴진다. 법흥왕릉으로 오르는 길은 참으로 아기자기하다. 휘돌아 감아 흐르는 길 좌우로 노송들이 길게 늘어져 있고 길옆으로 나 있는 아름다운 개울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오는 이를 반기고 있다. 이렇게 100m쯤 올라갔을까? 소나무가 몸을 기대어 만든 문 안에 능이 보인다. 그리 크지 않은 봉분이지만 위엄이 느껴진다.

소나무 문을 통과하니 법흥왕릉임을 알리는 표지석 두 개가 나란히 서있는데 하나는 한자로, 다른 하나는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한자로 된 표지석은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듯 갈라져 있다. 바로 옆에 안내판이 있다.

신라 법흥왕릉(新羅 法興王陵)

종 목 : 사적 제176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산 63

이 능은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김원종)을 모신 곳이다. 봉분은 지름 13m, 높이 3m이며, 흙으로 쌓아 올린 타원형 무덤이다. 크기는 다소 작은 편이며 무덤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은 지증왕(智證王)의 맏아들이다.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고 율령(律令)을 반포하는 등 신라의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기초를 세웠으며, 한편으로는 금관국을 합병하여 낙동강유역으로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법흥왕 15년(528)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교(國敎)로 정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를 건립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애공사(哀公寺) 북봉에 장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여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 근거가 된다.

법흥왕은 참 많은 일을 한 사람이다.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고 고대 국가 기틀을 마련하여 신라의 삼한 통일에 기틀을 마련한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분 밑 부분에 불거져 나온 돌이 둘레돌인가 보다. 근래에 놓은 듯한 혼유석이 봉분 앞에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능과 함께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잠시 쉬면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사연을 떠올려 보았다.

법흥왕은 백성들에게 불교를 믿게 하여 나라의 번영을 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토속신을 멀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때 이차돈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위해 죽겠다고 하였는데 죽은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불교를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목을 베자 우윳빛 흰 피가 용솟음쳤고 머리는 멀리 금강산(경주에 있는 소금강산)에 떨어졌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비가 내리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머리가 떨어진 곳에 자추사(지금의 백률사)를 지어 혼을 위로하고 헌덕왕 때에는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순교비를 세웠다.

내가 아는 척을 하자 남편은 한술 더 떠서 순교비는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차돈이 순교하는 장면을 새긴 비를 본 적이 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씨도 있었던가. 다시 가면 자세히 봐야겠다.

돌아오는 길에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를 들렀다. 백률사는 불교를 공인받기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수많은 돌계단을 올라가니 아담한 절이 나온다. 지나온 내력에 비해 아주 작은 절이다.

요사채 앞에 복(福) 중에 최고의 복은 인연복이라는 글귀가 있다. '움켜진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아야 한다. 기다리는 인연보다 찾아가는 인연으로 살아야 하고….' 글을 읽다보니 내가 세상을 왜 이리 살았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부터라도 좋은 인연을 만들어 봐야지. 법흥왕과 이차돈의 인연은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이렇게 남아서 우리를 맞이하는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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