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부부의 신라왕릉 탐방-10 진흥왕릉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에 위치한 사적 제 178호 진지왕릉 전경.

지왕릉은 진흥왕릉과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지만 태자가 일찍 죽어 왕이 된 사람이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일까? 왕이 되자 얼굴이 예쁜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궁으로 불러들이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재위 4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색을 좋아하여 죽어서도 민가의 여인이었던 도화녀를 찾았고 비형이라는 아들까지 낳았다. 아버지 옆에 누워서 지금도 끝나지 않은 잔소리를 듣고 있지나 않은지 모를 일이다.

문성왕릉 전경

신라 진지왕릉(新羅 眞智王陵)//사적 제178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김사륜/김금륜)이 모셔진 곳이다.

밑둘레 53m, 높이 3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은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도봉서당

그런데 이 안내판에는 진지왕이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표기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아니라고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못된 표기는 빨리 바로 잡아야 할 것 같다.

문성왕릉은 네 기의 무덤 중 탑지와 가장 가까운 무덤이다. 안내판을 보니 진지왕릉이 사적 178호였는데 문성왕릉도 사적 178호다. 이렇게 지정된 이유가 뭔지, 이장이라도 했다는 뜻인지…. 시대의 차이가 많이 나는데 표지석처럼 각각의 무덤 주인이 맞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서악리고분군

신라 문성왕릉 (新羅 文聖王陵)//사적 178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92-2

이 능은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헌안왕릉과 함께 선도산의 남쪽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지름은 20.6m, 높이는 5.5.m이다.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진지·문성·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문성왕은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신무왕의 아들이다. 신무왕이 장보고의 딸을 비로 맞이한다고 약속했지만 신분차이를 이유로 그러지 못하자 장보고는 반란을 일으켰다. 문성왕은 장보고의 부하 염장을 시켜서 장보고를 죽이고 청해진을 없앴다. 우리가 해상왕이라고 추앙하고 있는 장보고가 어이없이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 시대는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신분이었다. 그만큼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것이다.

헌안왕릉은 문성왕릉과 나란히 있는 무덤이다. 능은 별 특징이 없어서 안내판을 보았다.

신라 헌안왕릉(新羅 憲安王陵)//사적 제179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 김의정)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릉(眞興王陵)과 함께 선도산(仙桃山)의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지름 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封土)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신무왕(神武王)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文聖王)의 뒤를 이은 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에서 태종 무열왕릉 뒤에 있는 서악동 고분군 4기의 고분을 진흥·진지(眞智)·문성(文聖)·헌안(憲安)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아우이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 뿐이었다.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열 때 헌안왕이 눈여겨 본 사람은 응렴이었다. 응렴이 수련 중에 만난 세 사람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각각 윗사람이 되었지만 남의 밑자리에 앉는 겸손한 사람이고, 부자이지만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는 사람이고, 권력을 가졌으나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에 헌안왕은 감동을 했고 사위로 삼았다. 나중에는 경문왕이 되니 바르게 살고자하면 행운도 따라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왕릉을 답사하면서 왕들의 행적을 쫓아가다보니 잠시 그 시대로 가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헌안왕릉 바로 옆에는 왕릉과 같은 크기의 조선 전기의 문신인 황정(黃玎)의 묘가 나란히 있다. 그 밑에는 황정의 학덕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도봉서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선도산에 있는 왕릉 4기는 일반 문중의 묘 보다도 못할 만큼 너무 초라하다. 진흥·진지·문성·헌안왕릉으로 명명하기 보다는 선도산에 있는 4기의 왕릉이라는 뜻으로 '선사릉'이라고 하면 어떨까? 능 주변도 담으로 쌓아 깨끗하게 조성하면 조금이라도 위엄이 갖추어질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이 산책을 하게 만든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서악리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이 고분들이 오히려 앞의 네 왕의 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웅대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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