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부부의 신라왕릉 탐방-15 무열왕릉온화하고 위엄있는 주인 닮은 듯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 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경주시내에서 소티 고개를 넘으면 무열왕릉이 자리한 서악동이다. 표를 끊고 들어가니 비각이 떡 버티고 섰다. 먼저 설명을 듣고 싶어서 문화유산 해설사부터 찾았다. 마침 대기하고 있던 분이 있어서 우리를 비각으로 끌었다. 비각 안에는 국보 25호인 신라태종 무열왕릉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비몸이 없어지고 거북받침돌 위에 머릿돌만 얹혀 있지만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왕릉비'라고 새겨져 있어서 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됩니다. 거북을 잘 보세요. 마치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죠?

이야기를 듣고 보니 거북의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생동감이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인상을 준다. 거북의 발가락을 세어 보라고 한다. 앞은 다섯 개인데 뒷발은 네 개밖에 없다.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나중에 김인문의 비와 비교해보란다. 여섯 마리의 용이 좌우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머릿돌 부분에 글자가 남아 있다. 바로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의 글씨라고 한다. 이 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며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알 수 있다고도 한다. 도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합세한 다른 가족과 함께 자리를 옮겨 왕릉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태종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이고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진지왕이고, 아버지는 이찬벼슬을 지낸 용춘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딸이자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부인이고 진덕여왕이 죽자 진골출신으로 최초의 왕이 되었다. 신라는 천년의 세월을 안고 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몇 년일까? 해설사의 물음이다. 천년이 조금 안 된다는 것은 알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992년이라고 알려준다. 참 긴 세월이다. 우리나라의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나라가 유지된 셈이다.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고 가운데에 봉분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이루며 단정하게 앉아있다. 둘레에 지금까지 본 다른 능보다 더 많이 드러난 호석이 눈에 띄지만 별다른 꾸밈이 없다. 봉분 앞에는 여러 개의 돌판으로 이루어진 낮은 혼유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주변의 풍경 때문인지 진지왕릉과는 달리 위엄이 느껴진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쪼르르 뛰어가더니 능을 타고 오른다. 손자가 할아버지 등을 타고 오르듯이. 위엄이 감돌던 왕릉에 갑자기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무열왕이 하얀 수염을 흩날리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만 같다.

경주시 서악동 842에 위치한 무열왕릉. 별다른 꾸밈 없이 단정한게 특징이다.

신라 무열왕릉 (新羅 武烈王陵)//사적 제20호//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

이 무덤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의 묘

안내판을 읽어보고 잠시 앉아서 쉬었다. 나는 남편에게 문희와 김춘추에 얽힌 일화을 소개해주었다.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 두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장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 동생인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문희는 그 꿈을 사기를 바랐다. 문희는 비단 치마 한 벌을 주고 옷자락을 벌려 꿈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 뒤 김유신이 김춘추와 같이 자기 집 앞에서 축국을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떨어뜨리고 제 집에 들어가 달자고 하였다. 김유신이 맏누이 보희에게 꿰매게 했으나 보희가 이를 거절하여 문희에게 다시 부탁하니 문희는 그 뜻을 알고 대신 꿰매 주었다.

그 뒤부터 김춘추가 자주 김유신의 집에 드나들어 문희가 임신하게 되었다. 김유신이 부정하게 관계를 하여 임신한 문희를 꾸짖고, 선덕여왕이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마당에 장작더미를 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려 하였다. 왕이 이를 보고 측근에게 누구의 소행인가를 다그쳤는데, 김춘추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문희를 구하고 혼인하게 하였다. 후에 김춘추는 왕이 되고 문희는 왕비(문명왕후)가 되었다.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분군으로 올라갔다.

무열왕릉 못지않은 네 기의 무덤은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은 고분이라고 한다. 처음에 우리가 진흥, 진지, 문성, 헌앙왕릉이라고 생각했던 무덤이다. 고분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들이 있다고하는데 1호분은 법흥왕릉, 2호분은 진흥왕릉, 3호분은 진지왕릉, 4호분은 문흥대왕릉(김용춘, 뒤에 추존)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단다.

무열왕릉을 나와서 길 건너편을 보니 왕릉 못지않은 무덤 두 기가 있다. 비각이 있는 쪽은 무열왕릉비에 글을 쓴 김인문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무열왕의 9대손인 김양의 묘이다. 비각 안에는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본 것과 비슷한 귀부가 있다. 김인문 묘비라고 하는데 앞 뒤 발가락이 모두 다섯 개라고 하여 세어보니 과연 그랬다. 거대한 모습이 비슷하고 조각 솜씨도 매우 뛰어나 보인다.

하지만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느꼈던 진취적인 기상은 왠지 덜한 느낌이다. 비몸과 머릿돌은 보이지 않는데 서악서원에서 김인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무열왕을 도와 삼국통일에 기여한 사람이다. 김인문 묘와 나란히 있는 김양의 묘도 거대하다. 김양은 신무왕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기여한 사람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며 주위를 둘러보다보니 어느덧 신라를 주름답던 장군들의 묘 위에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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