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성덕왕릉

경주시 조양동 산 8 위치한 사적 제28호 성덕왕릉.

효소왕릉에서 50m정도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성덕왕릉이 바로 나온다. 성덕왕릉은 거대한 소나무 숲에 싸여 있다. 왕릉의 입구는 소나무 두 그루가 묘하게 얽혀서 문을 만들어 놓았고 둘레에도 숲이 울창하다. 난간까지 갖춘 둘레돌이 봉분을 받치고, 파손되었지만 갑옷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무덤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성덕왕 때가 아무리 전성기라 해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방금 초라한 효소왕릉을 지나왔기 때문에 더욱 비교가 된다.

안내판이 우리에게 간략한 설명을 해준다.

능 주위를 지키고 있는 돌사자

성덕왕릉 (新羅 聖德王陵)

사적 제28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귀부

무덤은 밑둘레가 46m, 지름이 14.5m, 높이가 5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능 앞에 있는 문인상은 그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무인상은 상반신만 겨우 남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흔적이라도 남겨서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싶다. 화강암으로 만든 돌사자는 눈을 부라리며 네 귀퉁이에 앉아서 능을 지키고 있고, 높다란 혼유석도 왕릉의 조화를 도와주고 있다.

성덕왕은 성덕대왕신종으로 많이 알려진 왕이다.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건물 오른쪽에 있다.

제35대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봉덕사에 큰 종을 만들라고 하였다. 쇠가 모자라서 시주를 받으러 다녔는데 한 가난한 집에서 아이밖에 없다고 하였다. 종을 만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자 그 아이를 시주 받아 쇳물 속에 넣게 되었다. 종을 만들었는데 종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 소리가 마치 '에밀레, 에밀레' 하면서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같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종이 완성되기 전에 죽고 아들인혜공왕 대에 완성하게 되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성덕왕이지만 이렇게까지 백성의 피를 짜는 행위를 과연 좋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을까?덕을 가진 임금이었으니 야단을 칠 것 같다.

저 앞 논 가운데에는 엄청난 규모의 귀부가 떡 버티고 앉아있다. 주변에 잔디를 깔아 깨끗하게 정비를 해놓아서 가보기가 쉽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거북의 머리는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능비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 흔적은 완벽하다. 거북의 앞뒤 발에는 발톱을 정교하게 새겨놓아 마치 살아 있는 느낌을 준다.

둘레에 놓인 돌 위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모를 심지 않는 무논에서 로타리를 치던 농부가 일을 끝냈는지 길로 나선다. 편편하게 물이 담긴 논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수로부인을 떠올려본다.

성덕왕 대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여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위에는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하였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였으나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도 지어 함께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이틀째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한 노인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고 하니, 바다 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 말에 따르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의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에게 빼앗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해가를 불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아내를 약탈해 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먹으리라.

신라의 노래를 천년이 지난 지금 부르고 있으니 마치 시간을 거슬러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만인의 아버지인 왕들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대왕이라고 불린 성덕왕은 궁궐에 앉아서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전부인양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읽지 않고는 태평성대를 이룰 수 없으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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